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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향 Dec 18. 2017

산울림 소극장에서 브람스를 만나다

일상의 메모-공연 관람 후기

천재적 예술가들에게는 재능을 불어넣고 영감을 주는 존재, 즉 뮤즈라 불리는 연인이 있었다. 그들은 예술가들의 구원자이며 동반자, 때로는 조력자이며 영혼의 안식처가 되기도 했다. 단테에게 베아트리체, 달리에게 갈라, 존 레논에게 오노 요코, 찰리 채플린에게 우나 오닐, 백남준에게 구보타 시게코, 백석에게 김영한이 있었고, 피카소에게는 10년 주기로 무려 7명의 뮤즈가 있었다고 한다. 뮤즈들은  예술가들의 삶 깊은 곳에 들어가 그들의 작품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특히 피카소는 7명의 뮤즈를 만나는 시기마다 작품의 풍조나 느낌이 다르다고 하니, 어떤 연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예술적 영감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 출처ㅡ네이버 이미지)


음악계에서도 잘 알려진 뮤즈가 있다. 바로 클라라 슈만이다. 클라라는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 신동으로 유명했으며, 슈만은 클라라의 피아노 연주에 반해 클라라 아버지의 제자가 되겠다며 자처하고, 클라라의 집으로 들어와서 지낸다. 슈만과 클라라는 사랑에 빠지게 되고 아버지한테 결혼 승낙을 부탁하지만 반대에 부딪힌다. 슈만이 이십 대 초부터 정신적 장애를 앓고 있다는 것을 아는 한, 절대 자기 딸을 내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은 아버지를 상대로 법정 싸움까지 벌여가며 3년 뒤에 결혼 승낙 판결을 받아낸다. 슈만과 클라라는 결혼식을 올리고 무려 7명의 자식을 낳았다. 슈만은 클라라한테서 얻은 영감으로 결혼 후에도 왕성한 작곡 활동을 했으며, 클라라와는 ‘결혼 일기’를 서로 교환할 만큼 다정한 잉꼬부부였다고 한다.  

  (사진 출처ㅡ네이버 이미지,영화의 한 장면)


요하네스 브람스를 만나게 된 슈만 부부는 당시 스무 살 청년 브람스의 음악적 재능을 신선하다 여기며 감동받게 된다. 브람스가 슈만 부부를 스승으로 모시며 가깝게 지내는 동안, 브람스를 대하는 14살 연상인 클라라의 마음은 각별했다. 두 사람이 급속도로 가까워지게 된 계기는 슈만이 정신적 고통으로 괴로워하다가 자살을 시도한 뒤 스스로 요양원으로 들어가면서부터다. 슈만의 부재로 인한 자리를 브람스가 채워주게 된 것이다. 점점 서로를 사랑하게 된 두 사람. 슈만의 죽음 이후 클라라는 슈만의 뮤즈에서 브람스의 뮤즈가 되었다.  


 브람스는 ‘자유롭지만 고독하게라는 삶의 원칙을 정하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클라라와 결혼을 할 수도 있었지만 결혼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존경과 연민, 열정 그리고 사랑과 우정, 무한 신뢰와 순수한 마음을 바탕으로 죽는 순간까지 관계를 유지했다. 그 세월이 무려 40여 년이라니.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음악적 영혼을 공유했다. 또한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이야기도 나누며 서로를 이해하며 사랑을 키워갔다. 두 사람의 사랑이 플라토닉 사랑이다 아니다를 놓고 말들이 많았다지만, 두 사람의 사랑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그들의 사랑을 만들어갔기에 인정하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 브람스가 온전히 음악에 생을 바칠 수 있었고,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당당하게 오를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클라라와의 사랑이다.  


화려하고 웅장한 대공연장만 열심히 찾아다니다가, 문득 옹기종기 모여 앉은 소극장 생각이 났다. 객석에 앉아 무대를 바라보면, 배우들의 흔들리는 눈동자와 표정 주름까지도 볼 수 있고, 연주자들이 연주할 때마다 움직이는 잔 근육들도 볼 수 있다. 심지어 입에서 튀어나온 침이 조명에 반사된 채 먼지처럼 흩날리는 것도 보인다. 소극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생생한 현장감이다.

몇 년 만에 찾아간 ‘산울림 소극장’에서 인문학과 클래식 음악, 연극과 라이브 연주의 만남을 통해 불멸의 작곡가들의 삶과 예술을 재조명하는 ‘편지 콘서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2013년부터 시작해 올해가 다섯 번째 무대지만, 이번이 처음이다. 편지 콘서트라는 타이틀만으로도 마음이 끌리는데, ‘브람스’라는 이름이 더해지면서 꼭 봐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공연 시간이 임박하자 객석이 하나씩 채워졌다. 내 옆자리에 일흔쯤으로 보이는 노부부가 앉았고, 딸과 함께 온 사람, 중년의 여자들끼리, 중년의 커플들이 주를 이뤘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산울림 소극장은 대학로의 소극장들과 달리 다양한 연령대가 찾는다는 특징이 있다.  


 피아노 연주와 함께 공연이 시작되었다. 브람스와 클라라로 분장한 배우들이 편지를 읽어가며 스토리를 풀어나간다. 그러는 중중간 연주자들이 작은 무대 위에서 피아노,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연주를 하고, 바리톤의 목소리로 브람스의 ‘자장가’도 부르고, 클라리넷 연주도 들을 수 있었다. 클래식에 대해 문외한인 나는 곡이 연주될 때마다 그 순간 마음에 와 닿는 느낌 그대로 음악을 느껴보려 애썼다. 클래식을 자주 듣지 않아서 뭐라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이번 ‘편지 콘서트’는 음악만 있는 것이 아니라 ‘브람스와 클라라의 사랑’이라는 애틋한 스토리가 더해져 연주되는 음악들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특히 아이들 잠재울 때 불러주던 자장가가 좋았고, 클라리넷 연주자의 연주 모습과 클라리넷과 피아노가 만났을 때 내는 아름다운 소리가 좋았다.

(작은 무대에서 편지 콘서트는 열리고...)


공연장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둡고 고요한 데다, 잔잔하고 아름다운 음악이 울려 퍼지면 어느새 눈꺼풀이 자꾸만 아래로 내려온다. ‘그래, 음악 감상은 눈을 감고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속으로 생각하며 눈을 감고 듣다가, 깜빡 잠이 들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옆에서 알아챌까 봐 눈치 보며 화들짝 놀랄 필요 없다. 음악이 자장가처럼 편안하게 느껴져서 잠이 들었다면, 그 순간 내가 편안함을 느꼈다는 것이니 스스로 질책하지 말자. 괜찮아, 나는 브람스를 만났고, 그의 음악을 통해 그의 삶을 상상하며 그의 사랑과 고독에 대해  헤아려 보았으니까. 일 년 뒤 여섯 번째 무대가 열리면 때 다시 찾아오겠노라 되뇌며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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