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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향 Dec 10. 2017

사랑에 빠졌을 때만은 같은 모습

-영화 <나의 사랑, 그리스>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지인의 강력한 추천으로 <나의 사랑, 그리스>를 보게 되었다. 영화의 배경은 그리스가 국가 재정 위기에 직면하면서 국민들이 현실적 어려움을 겪는 시기다. 시리아 내전으로 난민들이 그리스 땅에 들어와 살면서 자국민들과 이민자들의 갈등으로 이어져, 폭력이 난무하고 유혈사태를 빚기도 했다. 국가 재정 위기 상황이라 기업은 대규모 구조조정이 불가피하고, 이 과정에서 생활고에 시달려 자살하는 사람도 속출한다. 감당하기 버거운 현실 앞에서 사람들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하고, 암흑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주는 것이 바로 ‘사랑의 힘’이다. 신화의 나라 그리스 답게 영화의 큰 축 하나는 사랑의 신 ‘에로스와 프시케’의 사랑이야기다. 


영화 제목이 왜 <나의 사랑, 그리스>일까 궁금했다. 얼핏 제목만 보면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인 것 같지만, 사랑 이야기다. 제목 앞부분에 ‘그곳에 사랑이 있었다.’라는 말이 힌트를 준다. 세 편의 이야기 모두 그리스 현지인과 이민자들 커플이 등장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나라에 함께 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처지, 그러나 미워할 수 없는 나라. 그리스가 좋아서 독일을 완전히 떠나 와 그리스 여인을 사랑한 사람 이야기다. 다만, 세바스찬이라는 독일 출신의 역사학자의 입을 빌어, 그리스라는 나라가 얼마나 위대한 나라인지, 고대 철학자들부터 문화와 조화의 역사도 그리스인들이 썼다고 말함으로써 애국심을 불러일으킨다.     


영화는 옴니버스 형태로 부메랑, 로세프트 50mg, second chance 총 3편의 이야기가 나온다. 세 편의 이야기가 개별적인 듯하지만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에서 힘든 현실을 묵묵히 견디며 살아가는, 한 가족의 이야기이며 연령대별 사랑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대학생 딸 ‘다프네’와 시리아 이민자 ‘파리스’의 만남을 통해 20대의 사랑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아들 ‘지오르고’와 스웨덴에서 그리스의 회사를 매각하기 위해 그리스로 파견된 ‘엘리제’의 만남을 통해 40대의 사랑에 대해. 세 번째 이야기는 다프네와 지오르고의 엄마인 ‘마리아’와 독일에서 그리스로 이주해 온 역사학자 ‘세바스찬’을 통해 60대의 사랑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20대, 40대, 60대 연령대별로 사랑하는 모습은 어떻게 다를까, 영화 내용을 떠올리며 비교해 보자. 


먼저 다프네와 파리스의 사랑 이야기. 괴한에게 공격당하는 다프네를 파리스가 구해주면서 둘의 만남은 시작된다. 우연히 파리스를 다시 만났을 때, 다프네는 길거리 잡상인 이민자 파리스한테 별다른 호감을 느끼지 못 하지만, 곧 파리스의 진심을 알게 되면서 연인관계로 발전한다.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진 것도 어쩌면 그들이 20대라서 가능한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수록 사랑이라는 새하얀 도화지에 자기가 원하는 밑그림들을 미리 그려두게 된다. 그래서 이것저것 따지고 가리는 게 많아진다. 이민자의 운명으로 변변한 거쳐도 없고 언제 추방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환경의 남자, 아버지가 죽도록 미워하며 벌레 같은 존재로 여기는 적을 딸인 다프네는 사랑한다. 오직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같은 곳에 함께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두 사람이 언어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 배운 단어는 수영, 음식, 행복, 널 원해, 안녕, 이름이 뭐예요?, 당신은 아름다워요. 그리고 위기, 시간, 사랑에 빠졌어, 난 두려워, 당신이 그리워, 네가 어딜 가든 함께이고 싶어, 어느 곳이든 우린 함께할 수 있어 라는 말들이다. 

예상대로 사랑에 빠져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위기가 찾아온다.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해오지만 그들에게는 상대가 어딜 가든 불구덩이라도 함께 뛰어들 용기가 있다. 무모한 용기라고 해도 그들을 막을 수는 없다. 결국 다프네는 아버지의 동지가 쏜 총에 맞아 목숨을 잃고 그들의 사랑도 힘없이 무너져 내린다.  


다음은 지오르고와 엘리제의 사랑을 엿보자. 파산 위기의 직장과 별거 중인 아내와의 갈등으로 우울증을 앓고 있던 40대 지오르고. 고단한 현실을 잊기 위해 BAR에 들렀다 우연히 만난 엘리제와 불꽃같은 하룻밤(정사 이후 지오르고가 쫓겨났으니 정확히 하룻밤이라고 할 수는 없다.)을 보내게 된다. 엘리제는 그날 밤 일을 부정하고 싶지만, 점점 지오르고의 매력에 빠진다. 뒤늦게 엘리제가 지오르고의 직장 상사라는 것을 알게 되며 두 사람 관계에 복잡한 마음들이 얽히기 시작한다. 구조조정이라는 무거운 임무를 맡은 엘리제는 마케팅 매니저 지오르고를 두고 갈등한다. 지오르고는 엘리제에게 친구 오디세아만큼은 직장에서 내쫓지 말아달라고 어렵게 부탁하지만 오디세아는 쫓겨났다. 얼마 후 오디세아의 자살 소식을 들은 지오르고는 자괴감에 빠져 엘리제와의 결별을 선언한다.  
 


이별 앞에서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매달리지 않는다. 이별 후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빈자리를 서성이며 그리워하고,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들을 쏟아내고 싶어 하지만 그냥 삼킨다. 각자 처한 상황을 외면한 채, 순수하게 상대만을 사랑할 수 없다. 20대의 사랑이 무모할 만큼 용기 있는 사랑이라면, 40대의 사랑은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균형 잡기를 한다. 20대에 비해 일, 가정, 사랑이라는 복잡한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사랑’ 하나만 생각할 수 없다. “사랑이 모든 걸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는 지오르고의 물음에 엘리제는 단호하게 “안 해”라고 말한 것처럼, 사랑의 힘을 온전히 믿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20대 못잖게 열정적인 사랑을 꿈꾸며 기다리는 것도 40대의 사랑이다. 40대는 사랑에 관한 한 생각이 너무 많은 나이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마리아와 세바스찬의 사랑이야기를 들어보자.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곳은 마트 앞이다. 세바스찬이 쇼핑한 물건이 바닥에 떨어지자 가까이 있는 마리아한테 주워달라고 부탁한다. 허리가 아파서 숙일 수 없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세바스찬의 적극적인 구애로 같은 요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만난다. 평범한 가정주부인 마리아는 독일에서 이민 온 역사학자 세바스찬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알아간다. 선물을 받고 책을 읽게 되고 무엇보다 너무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사랑’의 감정을 맛보게 된다. 젊은 시절 ‘두려움’ 때문에 사랑에 실패한 세바스찬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알고, 이번만큼은 마리아와 사랑을 이루고 싶어 한다. 반면, 마리아는 자신의 선택이 실수라고 해도, 이제 와서 모든 걸 포기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 세바스찬은 모든 건 사랑에 빠지면서 시작한다고, 우리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두 번째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위로한다.  



주름진 얼굴과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가진 두 사람이 사랑하는 모습은 느리지만 따뜻하다. 20대의 열정과 용기 대신 은은하고 묵직한 위로와 격려가 있고, 40대의 복잡한 마음 대신 복잡한 마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유로움과 여유로움이 있다. 60대가 된 그들에게는 주변 환경이나 타인의 시선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두 사람의 남은 시간을 위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다. 마리아는 남편을 향해 쌓아두었던 말을 모두 토해내고, 얼굴에 침을 뱉은 뒤 짐을 꾸리는 순간, 마리아의 딸 다프네가 총에 맞아 죽고 만다. 결국 마리아는 딸의 죽음으로 세바스찬 곁으로 가기를 포기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두 사람은 재회한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무너지진 않을 것이다. 우린 만나야 하고 서로에게서 따뜻한 뭔가를 찾아내야 하니까. 세상에 대한 사랑을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 힘을 깨달았고 사랑을 신으로 만들었다. 바로 사랑의 신 에로스다. (세바스찬의 마지막 내레이션 중에서) 


이처럼 사랑은 인류 보편적인 주제이며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나이와 상관없이 성별에 상관없이 사랑하는 마음이 존재하는 곳 어디서나 예외란 없다. 우리 모두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얼굴을 보라.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얼굴은 서로 닮았다. 부드러운 눈빛과 생기 있는 표정, 봄 햇살처럼 따사로운 기운이 느껴진다. 사랑에 빠지면 사랑하는 사람과 모든 것을 함께 나누고 싶어 한다. 세바스찬이 마리아에게 책을 읽게 하고, 관심도 없던 세상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만 봐도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세상 곳곳에서 들려오는 ‘사랑의 힘’이 담긴 이야기는 끝이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를 위한 판타지는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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