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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향 Sep 22. 2017

동행

일상의 메모 No.24


네가 우리 집에 온지 꽤 여러 해가 지났구나.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때 부모를 선택할 수 없듯이,너 또한 집주인을 선택할 수 없었겠지. 동물병원 쇼윈도에서 발견한 너는 활동적인 너의 오빠한테 짓눌리면서도 얌전히 웅크리고 있던 아이였어.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한 번 안아주었는데, 갈색털을 가진 네 가슴에 하얀 반달모양의 털이 있더구나. 반달가슴곰이 품고 있는 새하얀 반달과 꼭 닮았더라.그래서 우리 가족은 착하고 예쁜 너에게 반해버렸지.


태어난지 석달도 채 안 된 너를 거실에 내려놓았다. 아장아장 걷던 네가 거실바닥이 미끄러운지 옆으로 넘어지기도 하고 다시 일어나 비슬비슬 걸었어. 잠잘때는 우리 품속으로 파고 들며 엄마 젖을 빠는 시늉을 했어. 꿈을 꾸는지 가끔 흐느끼기도 하면서. 네가 너무 작고 여려서 병이 날까 다칠까 불안한 나날이었단다. 아기들 이유식 먹이듯 따뜻한 물에 사료를 곱게 으깨 먹였는데, 어느새 쌀알같은 너의 이가 튼튼해져서 아작아작 사료를 씹어댔지. 키도 크고 몸에 살도 붙고, 넌 폭풍처럼 성장했어.


너의 존재 자체만으로, 이유 없이 그냥 네가 사랑스러웠다. 그러다 집안 구석구석 활보하고 다니면서 예기치 못한 일들을 저지르기 시작했어. 가끔 눈감아주곤 했는데, 배변 만큼은 그냥 넘어가기 힘들었단다. 배변훈련을 제대로 시키겠다며 너의 실수를 용서하지 않았어. 정해진 곳에 일을 보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했지만, 넌 번번이 엉뚱한 곳에서 실수를 했단다.


생각해보니 많이도 때렸던 거 같아. 훈련을 위한 질타가 아니라 뒷청소를 해야 한다는 귀찮음 때문에, 내 감정이 폭발해 널 혼냈던 거야. 내 감정대로 널 다루지 말았어야 했어. 일관성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훈련을 시켰어야 했던 거야. 변덕이 죽끓듯 하는 내 기분대로, 이랬다 저랬다 하면서 너에게 상처만 준 것 같아 미안하구나.


오늘은 가을바람이 좋아서 너와 함께 걷고 싶었어. 평소 빈 집에서 외로움으로 몸서리쳤을 너를 생각하면 죄인이 된 것 같아. 가족들은 네가 애교를 부리고 예쁜짓을 할 때만 좋아 하고, 너를 씻기고 산책시키는 일은 바쁘다며 서로 미루곤해. 정말 너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번거로움은 책임지지 않으려고 했던 거야.


오늘따라 너의 발걸음이 빨라서 나도 따라 빨리 걸었어. 가다말고 뒤돌아보며 내가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는 너. 우리가 다니던 길을 언제 다 기억하고 있었니? 갈림길에서도 망설이지 않고 길을 찾더구나. 너와 나 사이에

연결된 끈이 있는 한, 우린 절대 헤어질 수 없어.그런데도 너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내가 오는지 확인하며 길앞잡이처럼 나를 이끌어 왔어.


네 나이도 사람 나이로 치면 벌써 마흔 중반이야. 인생의 중년을 맞이한 건 너나 나나 같구나. 네가 나를 주인으로 만나 여태껏 살아 온 삶이 어땠는지 모르지만, 이즈음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남은 삶도 함께 걸어가 보자. 한 마디의 말도 나눌 수 없지만, 우린 이미 서로의 눈빛과 몸짓으로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고 의지하고 있잖아. 너를 평생 가족으로 인정하고 책임질 것을 다짐했던 우리의 첫마음. 오래도록 간직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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