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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향 Dec 22. 2017

그냥 지나치기 미안한, 세 가지

일상의 메모 No.26


나는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지하철을 이용한다. 지하철 입구 쪽으로 가면, 영락없이 전단지 아주머니가 기다렸다는 듯이 전단지를 내민다. 손에 짐이 있거나, 비가 와서 우산을 쓰고 있거나, 날씨가 너무 춥거나 할 때면 정말 무시하고 그냥 지나치고 싶다. 하지만 손에 든 짐을 손목으로 끌어올리고, 우산을 얼굴과 어깨 사이에 끼우고, 주머니에 든 손을 꺼내서라도 전단지를 받는 편이다. 다들 비슷한 심정이겠지만, 받는 것도 귀찮은데 받고 나서 마땅히 버릴 곳이 없어서 난감하다. 지하철역 안에 쓰레기통이 보이면 그 자리에서 바로 버리지만, 나는 습관적으로 가방이나 주머니에 넣었다가 집에 와서 버린다. 이런 나를 보고 친구는 “나는 저 사람들이 주는 전단지가 필요 없어서 안 받는데? 나 같은 사람한테 주면 아깝잖아. 억지로 받으라고 강요당하는 것 같아서 싫어!"라고 말했다.친구 말도 지만, 전단지라는 것이 대부분 불특정 다수에게 배포하는 식인 데다, 특히 추운 날 아주머니들의 노고에 조금은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나는 차마 거절하지 못한다.  
 

개찰구를 통과하기 위해 지하철역 안에 있는 긴 통로를 뚜벅뚜벅 걸어간다. 조금 걷다 보면 꼭 만나게 되는 풍경. 연말연시가 되면 산타처럼 홀연히 나타나는 빨간 자선냄비가 기다리고 있다. ‘여기 좀 쳐다보세요. 그리고 당신의 따뜻한 마음을 보여주세요. 딸랑딸랑딸랑!’ 귀로 먼저 듣고 힐끔 내 눈으로 확인하고 그다음은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휙 지나간다. 무심한 표정과 무심한 발걸음으로 나는 걷고 있지만, 마음은 영 불편하다. 이럴 때 주머니 속에 천 원짜리라도 들어있으면 좋으련만, 돈을 꺼내기 위해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지갑을 꺼내 열어야 한다는 사실이 번잡하게 느껴진다.  
 

후원의 손길이 줄었다는 뉴스가 들려오는 것처럼, 과히 사람들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 사회의 기부문화가 아직 정착하지 못한 것도 있고, 후원단체들에 대한 불신과 배신감 때문에 기부 자체를 혐오하는 분위기가 팽배하기 때문이다. 모두들 외면하는 자선냄비한테 성큼 다가갈 용기가 내겐 없는 것 같다. 솔직히 아직도 그런 행동이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어색하고 부끄럽다. ‘그래, 그냥 가. 다음에 하면 되지 뭐.’ 걸으면서 단순 명료하게 생각이 정리될 즈음 나는 플랫폼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다시 출구로 나오는데, 이번에는 추위에 잔뜩 웅크린 아저씨가 잡지를 손에 들고 있다. 빨간 조끼 등판에 새겨진 ‘BIG ISSUE(빅이슈)'라는 로고가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지인으로부터 선물 받은 ’ 빅이슈‘ 잡지를 보고, 딱 한 번 구매해 본 뒤로 잊고 지냈다. ’ 빅이슈‘는 홈리스에게 잡지 판매를 할 수 있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판매 수입금의 절반을 홈리스에게 돌려주는 시스템이다. 잡지 전체가 재능기부로 완성되며 판매 금액은 한 권에 오천 원이다. 내가 한 권 사면 판매한 홈리스 아저씨가 이천 오백 원을 벌어가게 된다. 지하철 계단에서 손 벌리고 구걸하는 사람들과 달리 자활을 꿈꾸는 사람들이니 한 권이라도 사는 게 좋겠지만, 얼어붙은 날씨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도 꽁꽁 얼어붙어버린 걸까. 누구도 빨간 조끼의 아저씨한테 관심이 없다. 뭐하는 사람인지 조차 알지 못한다. 나도 '다음에 사면 되.'하고 가던 길을 간다.  


날씨가 추울수록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사람들은 추울수록 옷깃을 여미고, 앞만 보고 가던 길을 재촉한다. 도움의 손길을 외면하는 사람들도 결코 마음이 없어서는 아닐 것이다. 각자 사정이 있고 생각은 있으나 행동으로 옮기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런 와중에 누군가는 용기 있게 따뜻한 마음을 실천하기 때문에, 그들도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품고 추위와 싸우고 있다. 그냥 지나치기 미안하면, 가끔 잡지 한 권 사 주고, 자선냄비에 돈도 좀 넣어 주고, 불쑥 내민 전단지도 한 번 받아주면 된다. 생각해 보면 참 쉬운 일인 것 같지만 직접 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오늘도 나는 잘 지키지도 못 할 거면서 괜스레 마음만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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