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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향 Dec 26. 2017

20분간의 기적

일상의 메모 No.27-야속하게 버스는 떠나고


며칠 전부터 여자 친구와 스키장을 가겠다며 졸라대는 아들을 말려봤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당일치기로 스키장을 보내주겠노라 약속하고 말았다. 새벽 6시 10분 셔틀을 이용해 홍천까지 가려면, 늦어도 5시 30분에는 일어나야만 한다. 아침잠이 유난히 많은 아들을 걱정스럽게 쳐다보자, 아무 걱정하지 말라며 큰소리 뻥뻥 쳤다.

 새벽 5시 30분에 알람이 울렸고, 나는 눈을 떴다 다시 감았다.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6시 정각이었다. 화들짝 놀라 아들 방으로 뛰어갔더니 세상 편한 자세로 자고 있었다. 도저히 믿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버스 타는 곳까지 차가 안 막힌다고 해도 족히 7~8분은 걸릴 텐데, 지각은 당연한 것이었다. ‘늦잠 잤으니 포기해라.’ 차라리 잘 됐다 싶다가도 아들이 실망할 걸 생각하니 마음이 흔들렸다. 혹시라도 셔틀버스 기사님이 조금 기다려주지 않을까. 일말의 희망을  걸고, 눈도 못 뜨는 아들을 끌고 내리 달리기 시작했다.


 

주말 이른 시간이라 도로가 한산했다. 얼마나 다행인지. 어지간한 신호는 다 무시하고 계속 달렸다. 기적처럼 6시 13분에 출발 장소에 도착했는데 버스는 보이지 않았다. 마침 아들이 차도 안 쪽으로 진입한 버스 한 대를 발견하곤 틀림없이 그 차가 셔틀버스라며 확신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버스 옆으로 붙었지만, 곧바로 신호가 바뀌고 버스는 한산한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 반사적으로 버스 뒤를 열심히 쫓아갔다. ‘아, 제발 다음 신호에 꼭 걸려야 하는데.’ 어쩐 일인지 버스는 논스톱이었다. 이대로 홍천까지 가야하는 건가 생각이 복잡해지던 순간,  다행히 버스가 신호에 걸려 섰다. 나는 바로 버스 옆 차선으로 이동한 후 비상 깜빡이를 켰고, 그 틈에 아들은 얼른 내려서 버스 문을 두드렸다. 놀랍게도 기사님이 문을 열어주셨고 아들은 버스에 무사히 몸을 실었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다시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었고 집으로 방향을 틀려던 순간, 아들한테 주려고 꺼내놓은 체크카드와 현금 오만원이 옆 자리에 그대로 있는 걸 발견했다. 만약 저 돈이 없으면 스키복 대여도 못 받고 종일 밥도 못 사 먹을 건데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다시 미친 듯이 버스 뒤를 쫓았다. 이번에는 버스가 다음 신호까지 얼마 걸리지 않고 멈췄다. 버스 바로 옆 차선에 비상 깜빡이를 켜고, 버스 문을 막 두드렸다. 이번에도 기사님이 문을 열어주셨고, 나는 "방금 탄 학생한테 이 돈 좀 전해 주세요. 죄송합니다." 하고 운전석 옆으로 밀어 넣었다. 아저씨는 아침부터 무슨 일인가 하는 황당한 얼굴로 외쳤다.


 

 “늦게 탄 학생, 와서 이거 받아 가세요.”


 

위험천만한 도로 위에서의 질주와 승차 그리고 늦잠꾸러기 엄마의 궁색한 부탁으로 시작된 별난 아침. 그날따라 날씨는 해빙기를 맞은 이른 봄 날씨 같았다. 스키장에서 좋아하는 여자 친구와 보드를 타면서 얼마나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을까 생각하니 보내길 잘했다 싶었다. 저녁 아홉 시쯤 돌아온 아들의 두 볼이 햇볕에 빨갛게 그을렸다. 여자 친구가 썬 크림을 발라주었다고 자랑 아닌 자랑을 했다. 들뜬 기분을  애써 감추며 내게 한 마디 건넸다.


 

“아침에 엄마 대단했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지?”


 

그러게 말이다. 나도 내가 무슨 정신으로 그랬는지 잘 모른다. 다만 그 일들이 20분 동안 일어났다고 믿기 어려운 뿐이다. 내 생애 가장 긴박한 20분이었던 것 같다. 어찌 됐든 그날은 운이 억세게 좋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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