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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은 Feb 25. 2022

H의 단어

소신




H: 나 요즘 영 별로야. 내가 믿고 있는 모든 것들이 죄다 흔들리는 것 같아.

나: 왜? 너 한 뚝심 하잖아.

H: 그게 다 얼마나 허약했는지 알게 됐다니까.

나: 무슨 일 있었어?

H: 아휴, 몰라! 




그는 나와 동갑이지만 키도 훌쩍 크고 목소리도 한 톤 낮다. 주로 어두운 색 옷을 고르는 H는 생머리를 질끈 묶고 늘 같은 에코백을 휘두르며 걷는다. 너무 단호해서 때론 거칠게도 여겨지는 게 그의 화법이다. 나는 그런 성숙하고 털털한 느낌이 좋았다. 우물쭈물했던 20대의 나는 H 같은 사람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끌렸다. 그런 친구가 이번에는 나보다 더 물러 보였다.


“무조건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 혼자 끝까지 안정된 모습으로 일할 자신이 사라지고 있거든. 그런데 자꾸 결혼이 해결책으로 귀결되는 것 같아서 끔찍해. 게다가 지난달엔 친구 결혼식에 가려고 절대 사지 않으리라 결심했던 명품 가방도 샀어. 나 빼고 다 있는 것 같더라고. 그 돈이면 내가 사랑하는 가수의 공연을 30번 볼 수 있는데 말이야. 사고 나서 후회했지만, 어느새 다음 가방은 뭘 살까 구경하고 있다니까. 그리고 나 정치에도 관심 많은 거 알지. 그런데 가끔은 일 때문에 나랑 다른 정치적 신념이 담긴 글을 기계적으로 쓰기도 해.”


따발총 쏘듯 고민을 꺼내놓은 그는 “이젠 여러 종류의 보험과 도피처를 만드는 데 몰두하며 사는 것 같아.”라고 끝맺었다. H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는 언제나 소신 있는 사람들을 선망했고,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고 말겠다는 마음으로 20대를 힘차게 헤쳐왔다. 스스로 튼튼한 뿌리를 심어놓았다고 믿었는데, 다 자란 듯 보이는 나무 기둥은 이내 휘청인다. H가 만든 뿌리와 기둥은 산들바람만 부는 화창한 날에도 허무하게 제 몸을 떨었다.




전문 읽기 : https://a-round.kr/h의-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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