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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가 온다

[시네마에세이스트] 행복한 라짜로

by 모퉁이극장

<행복한 라짜로> 와 이강백 작가님의 <파수꾼> 을 통해 말하는 선 이야기.


다'는 '촌장'과 대립한다. '다'는 진실을 알아버렸다.

'늑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지 않는 다 했을 뿐인데, '가'와 '나'는 '다'를 겁쟁이라 부른다. '다'는 '촌장'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촌장'은 '다'에게 '늑대'가 없다는 사실을 마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분노해서 도끼로 첫 번째 살인이 발생할 것이라고 한다.


'다'는 겁에 질리고, 진실을 덮고는 체제에 굴복한다.

하지만 이것은 선하지 않은 행동일까?


보이지 않는 것의 존재를 믿고, 보이지 않는 것을 두려워한다. 보이지 않는 것이란 무엇인가? 존재를 느낄 수 없는 것. 하지만 이데올로기는 존재한다. 라짜로도 존재한다. 선, 그것은 보이지 않지만 존재한다. 그것의 집합체로 표현된 것이 라짜로이다.


이데올로기가 공동체에 존재하고, 그것을 따르는 개인들을 볼 수 있듯이. 큰 존재인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듯.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 두려워하는 것 그 자체로의 가치를 따질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근본적인 모순을 볼 수 있다. 법은 정의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모순. '다'는 체제에 굴복한다. 물론 이것은 마을 사람을 속여서 이권을 취하는 '촌장'의 부패를 묵인하는 정의와는 상반된다. 하지만 '다'는 마을 사람들을 걱정한다. 그가 파수꾼인 이유도 마을 사람들의 안전과 그들의 모습에서 죽음의 피를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다'는 사랑이라는 가치를 선택했다. 이것은 신실함과도 같은 것이다.


라짜로라는 '선'의 존재는 결코 선함을 가져오지 않는다. 그것이 필요조건이라고 생각되게 라짜로의 존재가 그려지지만- 결코, 그럴 수 없다. 그것은 결말과도 결부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다'는 전지전능하지 않지만 마음에 선을 품고 있는 라짜로와 같다. '다'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부패한 권력에 굴복하고 보이지 않는 '늑대'의 두려움에 떨어야 한다. 이것이 '다'가 택한 길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정의'라고 할 수 없지만 '다'의 십자가이자, '다'의 사랑이다.


하지만 '사랑'도 '정의'가 될 수 없다. 그것이 선이 될 수 없다.


이러한 무수한 가치판단의 오류와, 모순 속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 수 없다. 공리적인 선은 존재하기 불가능하고, 체제도 법도 시스템도 아무것도 안전하지 않다. 스스로의 생각 조차 확신하기 어렵고, 더 큰 가치를 본다는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한 '마을 사람들'도 무수한 오류 속에 있다. 무수히 많은 간극들 속에서 스스로의 중심을 찾기 어렵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야 할까

아니면 더 큰 정의를 찾아 나서야 할까?


'다' 는 그렇게 양들과 마을 사람들을 지킨다. 자신만의 십자가로 말이다. 하지만 그 양들이 결국 '다'에게 모든 책임을 묻고 '다'를 죽인다면-


<행복한 라짜로>에서 나는 답에 가까운 것을 찾았다. 선은 결국에 눈물을 흘릴 것이라는 것을. 파수꾼인 '다'도 겨우 자신이 못 지킨 것들에 대해 생각하며 눈물을 흘릴 것이라는 것을.


그렇게 먹먹한 순간들이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할 것을.


본 리뷰는 시네마에세이스트 김지윤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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