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우리의 삶에 관하여

[시네마에세이스트] 행복한 라짜로 리뷰

by 모퉁이극장

<행복한 라짜로>는 신기한 영화였다. 최근에 들어서 유럽 영화는 많이 본 적이 없는 기억이 든다. 아마 2000년대에 나온 영화는 프랑스 감독 레오스 카락스의 <퐁네프의 연인들>을 마지막으로, 고전 영화인 세르지오 코르부치의 이탈리안 웨스턴을 같은 자극적인 맛의 영화를 많이 보다 보니 <행복한 라짜로>의 뭉글뭉글한 감성은 꽤 반가운 기분이었다.


영화 자체는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다. 1980년대 이탈리아 시골의 인비올리타라는 마을에서는 후작 부인이 소유한 마을에서 소작농으로 일하는 마을 사람들. 그중에서도 라짜로라는 청년이 있다. 후작 부인은 소작농들을 착취하지만 이들은 라짜로를 착취한다. 그러던 와중 마을에 신고가 들어오게 되면서 이탈리아에는 소작이 폐지되고 후작부인의 불법행위가 발각되면서 마을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그 와중에 라짜로는 죽음에서 부활하여 마을 사람들을 찾아가는 여정을 떠난다. 간략한 이야기이다.


사실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는 왜 저 사람들이 소작 일을 하고 있느냐는 의문점이다. 한국 같은 경우에도 1950년대 이후로 지주들로부터 토지가 유상몰수, 유상분배가 되면서 소작제가 철폐되었는데 1980년대의 이탈리아 사람들이 도대체 왜 소작을 하고 있냐는 것이다. 굉장히 신기한 일이었다. 그러나 결국 후작부인의 사기극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사건이 현대로 들어가게 되면서 영화의 본격적인 진행이 영화를 좀 더 매력적이게 만든다.


라짜로는 극 중에서 한번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후작부인의 아들인 탄크레디를 찾으려고 열병에 걸린 체, 위험한 산길을 배회하다가 낙사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부활한다. 마치 성자처럼 말이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시간이 많이 지났고 사람들은 예전의 그 모습이 아니다. 사기에 대한 대가는 제대로 치러지지 않았고 좀도둑질과 사기로 근근이 먹고사는 그들은 순수함 그 자체의 라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또한 탄크레디의 재산을 돌려받기 위해 어린아이처럼 은행을 찾아온 라짜로를 패 죽이는 시민들의 모습에서 사회에 찌들어 폭력과 분노만이 남은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은 굉장히 무서웠던 것 같다.


늑대가 나오는 장면도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이탈리아 영화다 보니 영혼을 늑대로 묘사한 게 아닐까, 독일의 남부 지방에는 늑대를 풍요를 기원하는 축제의 신 같은 신령한 이미지로 묘사했었는데, 라짜로 또한 행복과 풍요를 가져오는 요정 같은 존재로써 이들에게 강림한 것을 보면 그의 영혼을 늑대로 묘사한 것도 새삼 인상 깊은 연출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는 종합적으로 생각했을 때 행복을 가져다주는 성자, 혹은 요정이 우리 곁에 왔을 때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라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그 와중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착취하는 사회의 모습을 대변하는 이들 속에서 성자(혹은 요정)가 어떤 영향을 주기에는 우리가 너무 타락하고 현실적인 것이 아닐까 싶다. 같은 마을 출신의 안토니아만이 유일하게 용서를 깨달은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궁상맞아진 후작가의 집에서 그들이 비싼 빵을 구걸하자 처음에는 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건네주는 장면에서 라짜로에 의해 변화한 유일한 인물이 아닐까 생각하며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싶다.



본 리뷰는 시네마에세이스트 서정웅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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