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에세이스트] 행복한 라짜로 리뷰
행복이란 무엇일까.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행복한 모습은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지만, 불행의 모습은 단 한 가지만 어긋나도 갈등이 생기고 다툼이 되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아마도 우리는 행복보다 불행에 더 많은 이유를 붙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영화 <행복한 라짜로>의 배경은 이탈리아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척박한 시골 마을 인비올라타다. 라짜로는 이웃들과 함께 마을의 지주인 후작 부인의 담배 농장에서 일하는 순박한 청년이다. 마을 사람들은 뼈 빠지게 일해도 계속 빚만 늘어난다. 후작 부인이 마을 소작농들을 착취하는 것이다. 후작 부인은 홍수로 고립된 마을에 정보를 차단하여 마을 사람들이 불공정한 대우를 받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소작농으로 전락한 마을 사람들은 가난한 상황에 불평하면서도 선뜻 속박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웃들은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 라짜로만 계속 마법의 주문처럼 불러대며 일을 시킨다. 마을 사람들은 후작 부인에게 착취당하는 동시에 다 같이 라짜로를 착취하고 있던 것이다.
사람들은 라짜로의 수고가 당연한 듯 여기며 하대하거나 놀림의 대상으로 만든다. 후작 부인은 마을 소작농들을 가리켜 “개돼지”나 마찬가지라며 착취의 연쇄 고리는 갑에서 을, 을에서 병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굳건히 믿는다. 그러나 후작 부인의 믿음과 달리 착취구조는 라짜로에 이르러 끊어진다. 라짜로는 타인을 착취하지 않았다. 자기가 선한 일을 한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그는 일을 해야 할 때는 일을 했고, 누군가를 대신하여 늑대로부터 양을 지켜야 할 때는 망을 봤으며, 할머니를 옮겨야 할 때는 할머니를 옮겼다. 그에게는 어떤 생각이나 판단이나 판단이 없었다. 단지, 필요한 일을 했다.
억지로 인비올라타 마을에 끌려온 후작 부인의 아들 단크레디는 스스로 자신의 납치극을 꾸며 마을을 벗어나려고 결심하고, 라짜로는 그런 그를 돕는다. 납치 신고로 마을을 찾아온 경찰에 의해 마을 주민들은 후작 부인에게 착취당하고 있었음이 드러나고, 소작농이었던 마을 주민들은 도시로 나가게 된다. 라짜로는 불의의 사고로 마을에 홀로 남게 되었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 마을 주민들이 이주한 도시로 나가게 된다. 오랜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든 마을 사람들과 예전 그대로의 모습인 라짜로. 여전히 맑고 순수한 모습의 라짜로를 나이가 든 주민들은 부활한 성인으로 여기거나 악마나 귀신으로 의심하는 등 그의 존재를 불편해한다. 봉건적인 시골 마을의 후작 부인의 착취에 벗어나서 자본주의 세상으로 나왔지만 착취의 주체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고통받는 마을 사람들. 그들은 자본주의 세상에서도 착취당하며, 또 누군가에게 사기를 치기도 하면서 순수성과 인간성을 상실해간다. 아마도 그렇게 선한 라짜로의 존재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져 그가 불편해지고 부정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성자가 나타난다면 우리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거나 어쩌면 별생각 없이 내칠 것”이라고 말한 감독의 인터뷰를 보았다. 기독교인이 아니어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병자의 모습으로, 거지의 모습으로, 사람들이 내치기 쉬운 약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들은 것 같다. 나는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날이 갈수록 약자를 더 착취하고, 강자들은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세상의 많은 것들을 독식하는 그런 구조로 정착되고 있다고 느낀다. 서로 돕고 나누는 것이 아니라 시험과 경쟁이 공평함을 가르는 기준이 되고, 경쟁에서 탈락하는 자에게 가차 없이 칼날을 휘두르고 내가 착취당하는 만큼 나도 누군가를 착취하는 게 당연한 사회.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과연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성자를 만나게 되더라도 성자를 알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낙오자’, ‘만만한 자’, ‘먹잇감’으로 업신여기고 내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나 또한 영화를 보면서 부당한 현실에 욕하면서도 라짜로가 너무 착하기만 한 것은 아닌가 답답했었으니까.
영화의 마지막에 사소한 오해로 평범한 사람들이 라짜로를 마구 때려 죽게 만드는 장면은 너무 무서웠다. 그들의 오해가 과연 한 사람을 죽게 할 만큼 큰 것이었나. 고작 새총을 가지고 있었을 뿐인 라짜로가 강자가 아님을 알아보고 약자에게 더욱 잔인하게 분노한 것은 아닌가? 익명성에 기대어 누군가를 매도하는 길에 나도 돌 한 개라도 던진 적은 없었는지 반성하게 된다. 죄 없는 자만이 죄지은 자에게 돌을 던지라고 했던 예수의 말이 떠오른다. 누가 과연 돌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
라짜로는 행복했을까? 아무런 가치판단 없이 누군가가 필요하다면 기꺼이 나의 몸, 노동력을, 시간을 내어주는 사람. 그는 행복했다기보다는 ‘불행’을 몰랐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우리는 사소한 행복 한 가지를 찾는 것보다 불행한 이유 열 가지를 찾는 데 더 익숙하다. 행복은 늘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저 너머에 사는 파랑새이고, 불행의 씨앗은 도처에 널려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행복을 어떻게 찾아야 할까. 라짜로 같은 순수한 성인 한 명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듯 이미 불행의 씨앗이 구조화된 우리 사회를 한 명으로 바꿀 수는 없겠지만, 착취구조의 굴레에 조금의 균열을 내는 일, 당한 만큼 갚아주겠다고 악다구니 쓰지 않는 일, 악순환의 연결고리에 순순히 나를 부속품으로 내어주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 그런 일부터 해야겠다. 나의 행복은 내가 찾는 것이지만, 그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행복해야 할 테니까.
본 리뷰는 시네마에세이스트 모리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