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에세이스트] 환상의 마로나 리뷰
꽤나 많은 사람과 만났다. 그리고 꽤나 다양한 사람과 사귀어보았다. 연애를 많이 해보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연애의 스펙트럼이 넓었다.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누군가는 장애 아동을 가르치는 여자였고, 또 누군가는 저 멀리 바다 건너의 여자였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와 전혀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의 세상은 충돌했고 합쳐졌고 그녀로 가득해지곤 했다. 그리고 그녀들이 떠난 후에도 그 잔상들은 빛나는 별들로 남아 아직까지 내 세상에 잔존한다. 마치 마로나에게 마놀, 이스트반, 솔랑주.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저 멀리 스위스 제네바엔 LHC (Large Hadron Collider ; 강입자 충돌기)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실험기구가 있다. 27km. 약 서울에서 인천까지 거리에 다다르는 실험기구 안에서 과학자들이 연구하고 있는 것은 바로 ‘만남’이다. 원자, 그 작디작은 입자가 LHC 안에서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가속된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던 입자 둘이 만나는 순간. 과학자들은 우주의 탄생을 마주하곤 한다. 커다란 세계 속 우연한 마주침으로 이뤄진 새로운 우주의 탄생.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만남이다.
환상의 마로나 속 표현된 파리의 밤거리는 무척이나 정신없었고 그렇기에 화려했다. 거리를 걷는 행인들은 단 한 명도 같은 색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단 한 명도 같은 그림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각자 가지고 있는 이야기와 색으로 칠해져 걸어가는 그들은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곳은 화려하면서 복잡했고, 공존하면서 독립적이었다. 우리의 귀여운 아기 강아지 마로나가 첫 번째 주인인 마놀을 만나기 전까진 말이다.
종소리가 울린다거나,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거나. 사랑에 빠진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은 많지만, 개인적으로 ‘온 세상이 너로 가득하다.’란 표현을 선호한다. 실제로 누군가에게 빠진 순간만큼은 다른 모든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강렬하기 때문이다. 더 나은 형질을 가진 자손을 만들기 위한 DNA의 계획, 옥시토신과 엔도르핀 등 여러 호르몬으로 인한 교감신경의 활성화 등. 사랑과 만남, 두근거림의 과학적 이론은 많이 밝혀졌지만, 사랑에 빠짐으로 인해 세상이 변화하는 신비를 규정하긴 어려울 것이다.
마로나가 마놀을 만난 순간이 그러했다. 그녀가 마놀의 품 안에 안긴 순간, 새로운 이름이 붙여진 순간. 그녀의 세상은 곡예사인 마놀의 모습처럼 끝없이 늘어나고 끝없이 움직였다. 누군가와의 얽힘은 내 세상과 관점을 바꾸곤 한다. 마치 애벌레가 번데기 안에서 구조를 잃고 녹아 초록색 액체가 되어 다시 나비로 구조를 구성해나가는 것처럼. 만남은 ‘연인, 친구, 관계’ 란 이름의 번데기 안에서 둘이 서로의 구조를 허물고 함께 녹아 섞여 새롭게 자신을 구성해나가는 변태(變態; metamorphosis)의 과정인 것이다. 나비로 날아오를 자신을 위해서.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며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비의 날개는 더 화려해지고 각피는 단단해지며, 마로나의 세상은, 우리의 세상은 새로운 이름들과 함께 상대방의 모습으로 가득해진다. 아스트반과 함께하던 때엔 파란색의 선으로 이뤄진 설계도의 모습으로, 솔랑주와 함께하던 때엔 동화책의 모습으로. 서로 동화된 시간 속에서 새로운 경험을 쌓아나갈수록 그녀는 상처받았고 아파했으며 단단해졌고 아름다워졌다.
우린 때론 헤어짐으로 인해 만남의 덧없음을 떠올리곤 한다. 내가 누군가와 만나온 그 긴 시간이 한순간 헤어짐으로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나비가 다시 애벌레가 되지 않는 것처럼. 만남으로 인해 변화한 나는 그리고 만남 동안 새겨진 내 행복 상자 속 당신은. 마주친 순간 만들어졌던 우주 속 밝은 별들로 남아 앞으로 이어질 내 삶을 밝게 비쳐줄 것이다.
삶은 하나의 선이다.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면 검은색 직선으로만 그어졌을 삶은 누군가를 만나 퉁, 퉁 부딪치며 각도가 변하고 성질이 변하며 때론 곡선으로 때론 주황색으로 그어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 뒤를 돌아봤을 때 이미 내 삶에서 벗어나 버린 그 들과의 짧은 만남이 얼마나 내 삶을 다채롭게 만들어주었고 더 많은 시도를 이뤄내게 해주었는지 깨닫게 된다. 영화가 끝나면 영화 속 주인공은 멈추게 된다. 늘 같은 행동 같은 대사만 할 수 있는 그들. END.라는 단어와 함께 그들과 헤어지게 되더라도 주인공들은, 마로나와 마놀, 이스트반, 솔랑주는 겪었던 수많은 감정들과 함께 내 안에 내재하게 된다. 지금까지 마주쳤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헤어졌지만, 헤어지지 않은 상태로. 실체는 없지만 눈을 감으면 보이는 형상. 그것이야말로 진정 환상이 아닐까.
내 우주를 채워준 수많은 별들과 환상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며. 당신의 우주도 만남으로 인해 더 밝게 빛나길 바라며. 환상의 마로나를 내 맘 한구석 빛나는 별로 간직하려 한다. ‘왈왈’ 만큼 짧은 시간 동안 만난 그대여 안녕.
본 리뷰는 시네마에세이스트 정상원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