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에세이스트] 끝없음에 관하여 리뷰
허무, 그것은 방 한구석 숨어든 초록색 어둠.
허무, 그것은 이른 아침 내뱉는 차가운 한숨.
허무, 그것은 부조리, 무의미. 그리고 끝없음.
당신은 주인공이 아니다. 아니 사실 그 누구도 주인공이 아니다. 내 삶은 특별하리라, 나에게만 이런 일 이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한발 떨어져 보면 당신도 그들과 같고 그들도 당신과 같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당신의 영웅적인 행동도, 크리스마스 날 내리는 눈을 보며 얻은 감동적인 감상들도, 다른 이들에겐 그저 그런 일. 그저 그런 이야기. 아무런 의미도 감흥도 없는 당신.
‘끝없음에 대하여’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제3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당신의 이야기는 어떠한가. 한번 상상을 해보자.
『 당신은 초등학교 때부터 수많은 웃음과 울음을 같이한 친구 둘과 함께 외딴 마을로 여행을 떠났다. 함께 목적지도 없이 걷던 길에서 신나는 음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여기가 어디인지도 어떤 노래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친구는 몸을 흔들고 발을 까딱거리기 시작했다. 그 리듬은 천천히 전염돼 소심하던 나마저도 움직이게 만들었다. 우린 노을이 지는 외딴 벽돌 길가에서 한 아담한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춤을 췄고, 카페에 앉은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았다. 그때의 온도와 그때의 바람. 그때의 햇빛과 그때의 감정. 우린 이를 기억하기로 다짐하며 그들에게 마치 공연을 마친 무용수가 그러듯 인사를 올리고 다시 길을 떠났다.』
어떤가 얼마나 특별하고 낭만적인 경험인가. 마치 주위를 반짝이는 빛들이 감싸고만 있을 것 같은 경험. 이 이야기는 영화 속에서 동일하게 등장한다. 놀랍도록 무미건조하고 지루한 방식으로.
『 길. 카페. 사람들이 앉아있다. 길을 걷던 여자 셋이 갑자기 춤을 추고 사람들은 박수를 보낸다. 그들은 짧은 인사를 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 세상은 다시 조용해진다.』
현실은 이렇다. 여느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주인공의 속마음이나, 때에 맞춘 클로즈업, 반짝이들과 배경음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에게 일어난 특별했던 경험들은 그저 다른 이들에겐 아무것도 아닌 지나가는 일상 속 배경 중 하나일 뿐. ‘끝없음에 관하여’도 이렇게 전개된다. 의미 없어 보이는 수많은 이야기의 나열. 아마 영화를 관람한 관객들 중 나를 포함한 대다수가 ‘이 영화 지루하다.’라고 느꼈을 것이다. (사실 영화를 보다 10분 정도 졸아버렸다.) 물론 입 밖으로 그 감상을 내뱉진 않았지만.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 지루함이 말로 당신의 삶을 바라본 세상의 시선인걸.
당신은 그저 이 흘러가는 거대한 세상 속 하나의 물방울. 아니 그 물방울을 구성하는 원자에 불과하다. 열역학 제1법칙. 에너지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다른 모습으로 변화할 뿐. 당신은 우주를 탄생시킨 빅뱅의 잔존 에너지. 우주배경복사의 한 모습일 뿐이다. 여기까지 도달하고 나면, 나의 행동과 생각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회의감이 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회의감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난다. (열역학 제1법칙의 선행조건과 우주배경복사의 특성은 과학적 비유로 겸허히 눈감아주기 바란다.)
허무란 이렇게 시작된다. 어린아이가 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된 순간처럼. 코페르니쿠스가 지구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고 말한 순간처럼. 나라는 존재가 특별한 것이 아니었나?라는 방아쇠에서 시작된 생각은 끊임없이 방안의 한구석 초록색 어둠 속에서. 이른 아침 내뱉는 차가운 한숨 속에서. 끝없이 덩치를 점점 키워나가 당신을 잡아먹고 만다. 그리고 잡아먹혀버린 초점 잃은 눈동자로 바라본 세상이 바로 ‘끝없음에 관하여’에서 표현된 인생의 작은 편린들이다.
우린 영화에 나온 사람들처럼 결국 허무에 사로잡혀 색이 바래진 채 박제되는 숙명을 가진 걸까. 이에 대한 대답은 이미 당신께 보여드렸다. 당신의 색이 바래지는 것은,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았을 때. 3인칭 관찰자의 시점에서이다. 춤을 추던 친구들은 다른 사람이 보기엔 그저 지나가는 배경이었다. 하지만, 첫 번째 상상처럼 1인칭의 시점으로 들어온 순간. 그들의 춤은 화려한 색과 반짝임으로 가득 차게 된다. 허무를 이기는 방법은 스스로를 3인칭으로 보는 것이 아닌 1인칭으로 살아나가는 것이다.
내가 갔던 샌프란시스코를 기억한다. 여행의 마지막 날 밤 가로등 불빛과, 바다 내음. 빌딩 숲과 그 사이를 지나가는 트램. 트램의 시작역에서 종착역까지 트램 밖에 매달려 도로를 지나갔던 순간. 내 얼굴을 스치던 바람과 속도. 그리고 트램에 탄 채 이름도 국적도 모르는 길을 걷던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고 인사를 하고 하이파이브를 쳤던. 반짝이는 그곳. 3인칭에서 나는 아무런 소리도 내용도 없는 지나가는 배경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경험에선 내 머릿속에선 그렇지 않았다. 1인칭의 그곳은 재즈가 흐르고 있었고, 극적인 클로즈업과 특수효과가 들어가 있는 낭만적인 영화의 클라이맥스였다.
‘끝없음에 관하여’를 이렇게 관람하길 추천한다.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한 명의 상황에 몰입해 이야기를 만들어보기. 그러고 나면 그저 배경에 불과했던 칙칙하고 지루했던 그들은 빛을 되찾고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악랄한 악당으로 당신에게 다가올 것이다.
당신은 세상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영화에 나온 모든 인물처럼. 회화의 한 장면이자 에너지 흐름의 또 다른 모습일 뿐.
하지만, 기억하라. 당신은 당신의 주인공이다. 이를 깨닫는 순간 끝없는 허무는 마무리되고, 새로운 시놉시스가 시작될 것이다.
그럼 레디, 액션.
본 리뷰는 시네마에세이스트 정상원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