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펜던시아 섹션4: 「혼령의 여정」

「혼령의 여정」 상영작 리뷰와 아트포스터

by 모퉁이극장

눈에 보이진 않지만 사라지지 않은 시대의 공기와 존재의 자취를 느껴본 적 있다면, 오민욱 감독의 <해협>은 당신의 감각을 두드릴지도 모른다. <해협>은 타이완의 진먼 섬을 시작으로 동아시아 전역에 흩어져 있는 전쟁의 흔적을 따라가는 다큐멘터리다. 영화는 평화로워 보이는 현재를 그저 느리게 연결하는 것 같지만, 이 기록이 이어질수록 역설적이게도 관객은 해협을 표류하는 영혼들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음을 촉각적으로 깨닫게 된다. ‘없지만 분명 있는 것’을 찾아내고야 마는 이 음산한 혼령의 여정을 직접 체험해보길 권한다.

아트포스터 by 디펜더스 디자인팀 신가영

<해협>: 보이지 않지만 분명 있는 것


천장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소리만 감도는 어느 지하실. 카메라는 좁고 길게 이어진 지하실의 어두운 통로를 비추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고, 그에 맞춰 일정하게 움직이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고요히 들린다. 그러다 서서히 또 다른 하나의 소리, 다른 간격으로 걸어오는 어떤 이의 발소리가 그 위로 묘하게 겹친다. 축축한 땅 위를 느리게 저벅저벅 밟는 소리와 그 위를 빠르게 뛰어가는 소리는 점차 분명해지다가 서로 충돌한 뒤 사라진다. 이질적인 소리들로 범벅된 고요한 지하실. 이 청각적인 이미지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기척을 일깨운다.


<해협>은 그런 영화다. 서사를 만들어 뭔가를 설명하려고 하기보다, 오직 소리와 이미지만을 조합해 감각을 두드리는 영화 말이다. 오민욱 감독은 ‘진먼섬’을 시작으로 타이완과 중국, 한국과 일본을 잇는 해협을 건너며 동아시아 전역에 흩어져 있는 전쟁의 흔적들을 찾는다. 그의 카메라가 닿는 곳은 어떤 실증적인 단서도 없는 고요하고 텅 빈 공간들이다. 부식된 탱크 주위로는 바람에 넘실대는 나무가 그득하고, 시간이 멈춘 군사의 조각상 곁에는 매미들이 권태롭게 울부짖는다.

그러나 이 여백의 이미지가 머금고 있던 불안한 기운은 극중 화자인 ‘샤오’가 전쟁에 대한 자신의 기억을 읊어주면서 점차 밖으로 흘러나온다. 학살당한 산자오 마을 사람들에 관한 참담한 이야기, 혹은 진먼 섬의 평온하고도 기이한 풍경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그가 담담히 전할 때, 일상적인 자연의 풍광은 이제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땅 위를 일렁거리는 나뭇가지의 그림자는 혼령의 미세한 움직임처럼, 묘지를 적시는 빗소리는 영혼의 조용한 울음소리처럼 느껴진다. 사라지지 못한 익명의 존재들은 여전히 이 공간들 속을 표류하며 꿈틀대고 있는 것만 같다.


감독은 그렇게 전쟁의 흔적이 스며든 자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서도, 참혹한 이때의 기억이 현재에 어떻게 호명되고 있는지를 탐문한다. 그는 축제로 변모한 각국의 위령제를 향해 카메라를 돌린다. 기온 마츠리를 비롯한 이 국가적인 제의들은 현재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원령들을 불러낸다. 오민욱 감독은 축제 속 빽빽한 사람들 사이로 카메라를 욱여놓고 한층 더 줌인해 극도로 밀접한 자리에서 사람들을 관찰한다. 인간이 위치할 수 없는 자리에 카메라를 놓은 그의 시도는 마치 혼령의 시점에서 이 기괴한 집단적 움직임을 낯설게 바라보고자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가까운 간격에서 수많은 얼굴들은 표정도 제대로 보이지 않은 채 화면을 빠르게 부유한다. 검은 뒷모습들은 카메라 앞을 수시로 지나가며 화면을 위협적으로 가리고, 흐릿하게 지나치는 인파 사이로 간혹 초점이 맞아 뚜렷한 얼굴이 불쑥 엄습하며 두려움을 자아낸다. 귀를 찌르는 기괴한 나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고, 카메라는 우글우글한 인파를 벗어나고 싶은 듯 이리저리 요동친다. <해협>은 색다른 감각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이 집단적 제의가 착취적일 수도 있음을 드러낸다. 역사에서 희생된 존재들이 ‘평화’를 명목으로 다시금 희생되는 것은 아닌지, 잠들지 못하고 이승을 자꾸만 떠돌게 되는 것은 아닌지 질문한다.

영화는 수평선 위로 붉게 솟아나는 태양의 이미지,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으로 끝을 맺는다. 벌겋게 물든 바다 위로 정체모를 반짝이는 검은 물질들이 평화롭게 떠다닌다. 그러나 그 전까지 <해협>이 쌓아왔던 축축하고 구슬픈 궤적들 속에서 이 장면은 마냥 아름답게 감각되진 않는다. 작고 무수한 부유물들은 마치 영혼의 쓸쓸한 잔재처럼 보인다. 해협의 거센 파도 속에서 수없이 휩쓸리다 분해된 혼령의 외로운 흔적이 물 위를 얕게 물결친다. 그것은 사오의 말마따나 소리 없이 무언가를 불러내는 것만 같다.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존재들의, 들리지 않지만 들리는 음성이 마음 한 켠을 깊게 파고든다.


(디펜더스 리뷰단 이준혁)


2020년 11월 5일 인디펜던시아2020 섹션 4 상영회 / BNK부산은행아트시네마 모퉁이극장



필진 소개

이준혁 - "미디어를 전공하지만 어쩌다보니 영화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살고 있습니다. 영화를 온통 설명해버리는 말끔하고 선형적인 글보다, 영화의 다층적인 감각을 전하는 울퉁불퉁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



다가오는 토요일 (11/7) 장태구 감독의 장편 <모아쓴 일기>가 인디펜던시아 섹션 5: 「일상, 기억, 마음의 편린들」에서 상영됩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모퉁이 극장 SNS (블로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서 확인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