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나의 과식시기
'나 지금 과식하고 있는 것 같아'
잠실철교를 지나는 퇴근길 지하철, 붉게 지는 석양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과식'이라는 단어가 내 머릿속에 들어온 순간부터
목구멍까지 가득 차올라서 더 이상 넘기지 못할 것 같은데 꾸역꾸역 무언갈 넣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나의 과식은 커리어였다.
이 과식을 욕심이라 불러야 할지 자기 발전이라 불러야 할지 애매하긴 하지만 말이다.
배움에 대한 갈망과 더 넓은 스택을 가지고 싶어 도전한 이직,
내 생각보다 더 큰 어려움과 버거움에 난 허덕이고 있었다.
게다가 내가 바빠지니 아이를 케어해야 하는 엄마로서의 나도 흔들리고 있었다.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은 결정이 나를 더부룩하게 하고
분명 나를 위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는데 모두 토해내고 나야 내 속은 편해질 것만 같았다.
아아
무심코 내가 나를 아프게 한다.
'내 분수에 비해 너무 큰 도전이었나'
나는 분수에 맞게 살으라는 말을 정말 싫어했다.
내 분수가 어디쯤인지 얼마큼 담을 수 있는 그릇인지 누가 정할 수나 있다는 말인가?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
그것들은 내가 나 자신과 타협하고 결정하는 것들이지
이미 한계가 정해지고 남들이 정해놓은 기준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건 가당치도 않다고 말이다.
그런데 요즘, 참 아이러니 하게도 나의 도전이 '과식'이라고 생각했던 그날 이후로
자기 '분수'라는 그것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게 됐다.
나의 분수는 인생을 살아가며 겪는 크고 작은 도전들을 극복했느냐 포기했느냐에 따라가 아니라
그 도전으로 인해 내가 무얼 깨달았는가로 결정되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내가 분수라고 생각했던 나의 그릇들은 늘 도전 앞에서 항상 깨부숴 지고 다시 만들어졌다.
그 크기와 모양은 늘 제각각이었지만.
그러니 새로운 내가 된다는 건 당연히 어려운 일이겠지.
그것이 성장의 본질일 테니까.
그 누구라도 힘들고, 버거웠을 테니, 나 역시 그 속에서 허덕이는 것이 당연했다.
내가 지금 과식이라고 느껴지는 이 감정들도
내가 분수에 맞지 않는 도전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도전은 늘 누구에게나 어려운 것이라고.
그러니 이만하면 괜찮다고, 장하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리고 이제 '분수에 맞게 살라'는 말은 나에게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분수라는 것은 단순히 정해진 것이 아니라, 도전 속에서 무너지고 다시 만들어지는 것임을 이제는 안다.
되돌아보면 내가 한계라고 생각했던 분수라는 그릇들은
늘 도전 앞에서 깨졌고, 그 자리에 새로운 그릇이 다시 자리 잡았다.
그 크기와 모양은 도전할 때마다 달랐지만, 새롭게 태어나는 그릇들은 내게 작은 의미로 남았다.
그러니 지금 내가 느끼는 버거움도
결국 새로운 나를 만들어가는 여정의 일부일 뿐이라고 되새겨본다.
이 도전이 끝났을 때 내게 다가올 새로운 그릇이 어떤 모습일지 기대하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