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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omi Sep 03. 2021

할머니의 부고

뒤늦게 깨달은 철원 외가의 의미

삼대가 만나는 자리 장례문화원에서 조문을 하며, 외할머니를 추억한다.

외할머니는 92세의 삶을 살다가 완연한 봄날 일요일 오후 소천하셨다. 코로나로 인해 가족 방문이 금지된 요양원에서 결국 홀로 사경을 헤매셨다. 얘기만 들어도 마음이 아팠다.


반평생 육남매를 홀로 키워내신

소박하고 순수하셨던 우리 할머니...


할머니는 착하고 참 좋은 분이셨다. 할머니는 근대사에 획을 긋는 과업을 세우신 건 아니었지만, 1930년도에 태어나 한국 근대사의 변천사를 올곧이 경험하고 육남매를 키워낸 그저 묵묵한 시골 할머니셨다.




그런 할머니를 잊고 지내던 건 대학교 졸업 이후, 사회 생활을 하면서부터였다. 내 인생의 어느 시점부터 잊혀져 갔던 할머니의 존재감이 그녀가 떠나서야 비로소 더 커지니 어찌하면 좋을까? 따뜻하고 정이 많으셨던 고마운 우리 외할머니를 추모하며 글을 쓴다.< 2021년 4월 마지막 주>



외할머니의 부고를 듣고 엄마와 함께 울기는 했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브런치에서 그 감정을 위로 받고 싶었다. 막연히 다른 이들이 할머니의 부고로 느끼는 슬픔을 찾아보다, 큰 위안을 받았다. 이 글 역시 같은 마음을 느낄 이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적어 본다.



외가는 강원도 철원에 위치했다. 유년 시절 내 뇌리에 박힌  시골집의 전형이 외가의 전경이었고, 포근한 꿈속 같은 시간들이 외가에서 보낸 시간이었다.

 유년시절의 방학 시즌이면 1주일 내지 2주일은 반드시 1주일 이상 머물다 가는 곳이었고, 아빠와 엄마가 만난 곳이기도 했고, 개울이나 계곡이 많아 유년 시절에 아빠와 함께 고기를 잡고 캠핑을 했던 추억이 서린 곳이 철원이었다.

 대부분의 장성한 청년에게 강원도 철원은 나와는 전혀 반대의 매섭게 추운 남한의 북쪽이란 걸 대학생이 되어서야 알았다. 반면에 내게 강원도 철원은 따뜻한 외가가 있는 곳이다.

 그렇게 크지도 그렇다고 너무 작지도 않은 100평 가량의 시골집에는 마당에 수세식 화장실이 있고, 풍무도 있고 절구와 창호지를 바른 미닫이 문으로 열고 닫아야 했다.

집 앞마당에는 우물과 작은 정원이 있어 풀벌레가 우는 여름밤이면 돗자리를 깔고 밤하늘에 총총 뜬 별을 보며 별자리 전설을 들었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평상에 모여 친척들과 다과를 즐겼고, 연탄불을 깔고 고기를 거하게 구워 먹었다. 외할머니댁의 앞마당은  행복한 추억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사실, 지금에 와도 할머니한테 죄송했던 것은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이었을 때의 일이다. 지금의 내 첫 조카의 나이쯤일 때 초저녁에 잠이 들면  누군가 할머니의 꽃이불에 나를 눕혔다. 자다가 퍼뜩 깬 난 잠결에 버릇없이 할머니 이불에서 할머니 냄새가 난다며 짜증을 낸 거였다. 난리를 피우며 할머니를 민망하게 했던 날 보고 그저 웃으셨던 할머니.


 그런데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할머니께 잘해드려야 한다는 것이 머리로 깨달아졌다. 이후론 할머니의 옆자리에서 자기도 하고, 할머니 방에 더 자주 오래 머물게 되었다.

(당시 할머니 나이를 뒤늦게 계산해보니 당시 외할머니는 70살이 안되신 나이이고... 지금의 엄마와 그닥 차이가 안나는 나이셨다. 고로 그렇게 늙은 할머니는 아니었다)



사춘기를 맞이하며 내가 집에서 가장 멀리 떠날 수 있는 여행지는 남한의 북쪽 끝  바로 철원 외가였다.

마음이 답답하거나 어딘가 훌쩍 떠나고 싶을 때면 난 소박한 우리 외할머니가 계신 외가를 찾았다.


 내가 따뜻한 마음을 갖고 성장할 수 있는 자양분 중 하나도 외가에 남겨진 추억들이고, 그 한편에 따뜻한 우리 외할머니가 계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외할머니란  존재는 '치매'라는 무서운 병이 찾아오며 내게도 그 존재감에 희미하게 사라져가고 있었다.  스스로를 잃어버리고, 좋은 기억을 지워가는 그 무서운 병마로 인해 외할머니란 깊은 존재감은 내 삶 속에서 점차 잊혀지고 있었다.



대소변을 가리기 어렵고,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외할머니와 시간을 보낼 때면 싫은 기색을 보였던 나를 반성한다.

 할머니의 부고를 듣고도 새벽같이 출발하지 않고 다음날 오전 9시가 넘어서야 출발을 했던 나의 굼뜬 행동을 반성한다.


 이전에 철원을 갈 때는  대중교통 혹은 아빠차, 이모부, 이모의 차를 타고 갔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스스로 운전을 해서 가게 되었다. 무려 100km의 대장정이었다. 50km 운전이 최대치였던 내게 김포로 가서 사촌동생을 픽업해

함께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모험이었다.


혼자서라면 찾아가지 못했을 그 길을 사촌 동생과 함께 갔다. 외가 앞마당을 기저귀 차고 다니던 동생은 이십대 후반의 건장한 청년이 되어, 할머니의 빈소에서 조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장례의 시간 속에 잊고 지낸 외할머니의 부재와 보이지 않았던 영향력과 그 존재감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이전까지는 그저 외할머니, 시골에 계신 정겹고 구수한 우리 할머니의 존재감이 살아나는 시간이었다.  



 요양원에서 홀로 돌아가신 할머니 생전에 집으로 모시고 오지 못해 마음이 걸렸던 자식들은 발인을 하기 전,  할머니가 살았던 집을 도는 시간을 가졌다. 스물 한살의 사촌동생이 외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들고 집 마당과 집안을 둘렀다. 집 옆의 작은 교회의 예배당에 영정 사진을 들고 돌아보고 나오는 시간을 가졌다.

 검은 상복을 입고 흐느껴 우는 이모들과 외삼촌들 뒷편에서 나역시 눈물을 떨구며 유년 시절의 추억이 가득한 그 시골 거리를 걷는데 오래 전 젊고 건강하셨던 외할머니 모습과 웃는 모습이 함께 스쳐 지나갔다.



그 때 문득, "강원도 외가"의 의미를 깨달았다.

100평 남짓의 할머니 집은 '할머니의 세계'였던거란 걸. 그 곳에서 6명의 자녀들이 자라고, 그 자식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출가를 하고, 가정을 일구어 그 자식이 자식을 낳고, 손주 손녀가 그 세계에 들어와서 안식을 얻어간 곳.


 주변의 시댁 식구 친척들이 잠시 들렀다 가고, 담소를 나누고, 옥수수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주전부리도 하며 가끔은 개와 고양이도 머물러 갈 수 있는 할머니 주변 사람들의 쉼터이자 할머니가 온전히 주인이 되는 곳이란 것을 말이다.


 앞마당의 작은 정원의 돌턱에 앉아 환하게 웃으시는 할머니의 모습이 선명하게 살아난다.


1990년도 였던가? 동네 분들과  전방에 가서 잡초를 뽑고 하루 일당을 받았다고 환하게 웃으셨던 모습, 게으름을 부리지 않고 늘 묵묵히 자신이 할일을 하셨던 우리 할머니...

집 앞 우물가에서 찬물로 세수하고, 물을 길으시던 할머니,  엄청 추운 겨울이면 연탄불을 봐주시고 따뜻한 아랫목에 이불을 펴주시던 할머니, 손이 시렵지 않냐며 이불속에 내 손을 넣어주시던 할머니... 고단하게 코를 골며 주무시던 할머니, 형광등을 교체해 드리니  침침하던 안방이 환해졌다고 함지박 웃음을 지으신  할머니의 모습이 자꾸 자꾸 떠오른다.

 제각각 성격이 다른 네 명의 딸은  다른 환경의 남편에게 시집을 갔고, 시집을 가지 않은 셋째딸이 그래도 곁에서 제일 잘 챙겨주고, 끝까지 늘 자주 요양원을 찾았다.   할머니의 가장 안 좋은 모습을 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심이 남다른 셋째딸의 관심과 사랑 덕에 요양원에서 4년 가량 있으셨던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진짜 사랑은 진짜 효심은 부모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하고 힘들고 아프더라도 그 옆에서 부모를 이해하고 받아주고, 받은 사랑을 조금이나마 돌려드리는 것이란 걸 알았다.


 할머니를 추모하며 이토록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는 건  할머니가 치매로 아프고 힘들 때 난 본체 만체했던 나의 태도가 죄송하기도 하고

치매로 온전치 못하신  할머니를 이해하지 못하고 더이상 내 할머니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인생의 후순위로 두었던 태도에 자괴감이 몰려왔다.


치매가 걸린 할머니를 이해하지 못하고, 예쁘고 깨끗하고 좋은 것만 좋아했던 철없던 나를 다시 한번 반성한다. 그 죄송한 마음에 장례식장에서 울고, 좋았던 할머니를 추억하다 여러 차례 눈물을 흘렸다.

 본인이 자식들에게 받은 용돈을 꼬깃꼬깃 모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내 손에 쥐어 주셨던 할머니의 그 마음이 뒤늦게 더 크게 다가왔다.


독실한 신자가 아니셨음에도 작은 아들의 전도에 몇번 밟으신 집 옆의 교회에 예배도 출석했던 우리 착한 할머니.


언젠가 할머니께 복음을 알려드렸는데, 주님을 마음으로 믿고 구주임을 입으로 시인하며 구원을 받는다는 얘기에 좋아하셨던 모습이 떠올랐다. 하늘 나라에서 건강하고 예쁜 모습으로 소천하셨을거라 믿는다.

 치매로 인해 잃어버린 할머니의 좋은 시절들이 그곳 하늘나라에서는 생생히 기억에 남아 둘째 손녀 딸도 이젠 기억하고 계시길 빌어본다.




사람이 이 세상을 하직 하게 될 때 남는 것은 누군가에게 받은 것이 아닌 누군가에게 그저  남에게 준 것이란  말이 자주 상기된다. 할머니가 그랬다.


외할머니는 이 세상과 마지막으로 하직하는 순간 어떤 행복한 기억들을 떠올리셨을까? 근 몇년 간 당신을 찾아뵙지 못한 나를 기억하시긴 했을까?

아주 잠깐이라도 날 떠올려주셨으면 좋았을텐데..할머니 주변의 좋은 사람들이 많아 나를 잊었다고 하더라도 괜찮다.


 할머니가 주셨던 많은 사랑에 고맙고, 되려 드린 것이 없어 죄송한 마음에 자꾸 눈물이 난다.

오래도록 나의 외할머니의 좋은 모습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할머니가 온전하셨을 땐 생전에 엄마에게 잘하라 당부하셨던 것처럼 우리 엄마한테 잘하자 다짐한다. 또한 할머니가 남겨 놓은  6명의 자녀와 또한 그 자녀의 자녀들에게도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할머니를 생각하며 나 역시 받은 사랑을 전해야지 다짐한다.



할머니를 언젠가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음을 믿는다.

그 곳 하늘나라에서 먼저 간 반가운 이들을 만나셨을까? 하늘나라에서 할머니의 남편도 먼저 떠난 할머니의 친구분들도 그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첫째 사위도 만나셨길.. 화사하고 예쁜 모습으로 부활하셨길.


너무나 사랑하고, 감사드립니다. 할머니.

그곳에서 편히 쉬시길.

주신 사랑 떠올리며 따뜻한 할머니를 추억할게요.

정말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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