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지 없는 남자의 길

by 이상현


남자는 구멍가게로 들어가 담배와 술을 대여섯 병 사 가방에 넣었다. 유리문을 밀고 나오며 바라본 하늘은 수의를 입고 마주하던 하늘과 다르지 않았다. 하늘과 산과 태양은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며 빛나고 있었다. 남자는 그 세상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마음에 들떠 두 팔을 하늘 높이 뻗어 올렸다. 하지만 곧이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람들이 쉽게 변한다고 중얼거리며 구멍가게를 나왔다.

남자가 담배를 한 대 입에 물며 버스정류장에 서 있었다. 버스가 정류장에 몇 대 멈췄다가 지나갔지만, 남자는 버스에 올라타지 않았다. 태양은 하늘 높은 곳에서 점점 서쪽으로 이동했다. 찬 바람은 거세게 불어와 남자의 왜소한 몸을 흔들었다. 남자가 담배 한 갑을 곧 다 피웠다. 남자의 입술이 하얗게 부풀어 유난히 차가워 보였다. 검은 눈빛은 생기 없이 탁해 더욱 쓸쓸해 보였다. 멀리 또다시 먼지바람이 일었다. 버스 한 대가 어김없이 남자 앞에 멈춰 섰다. 남자는 버스기사를 슬며시 쳐다보고 입에 물고 있는 담배를 바닥에 던져 발로 비벼 꿨다. 가야 할 곳이 없는 남자는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 채 무작정 버스에 올라탔다. 남자가 자리에 앉아 차창 밖을 바라보자 버스가 속력을 올리기 시작했다. 차창 밖 풍경이 단조로웠다. 종착지 없는 길 위에 놓여 버스가 달리는 데로 가야만 할거 같았다. 남자는 창을 열어 팔을 차창 밖으로 길게 내뻗었다. 급기야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바람을 잡아보려는 듯 상체를 반쯤 내밀고 두 팔을 허공에 뻗으며 미소마저 지었다. 차창 밖으로 곡예를 하듯 매달린 남자를 피하기 위해 버스와 나란히 달리는 차들이 급하게 방향을 틀며 경적을 울렸다. 버스 안의 승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남자의 무모한 행동은 차창 밖으로 몸이 튕겨 나갈 듯 휘청거려서야 멈췄다. 버스 기사가 남자에게 고함을 질렀다.

"거기, 당신. 죽으려고 환장했어?"

"죽다니 누가 죽는다는 거야? 함부로 말하지 맙시다. 답답해서 바람 좀 쐬고 싶어서 그런 건데."

버스 기사는 남자의 말에 어이가 없는지 한 숨을 푹 쉬다 차창 밖으로 가래침을 뱉으며 운전대를 잡았다. 미친놈 아냐. 승객들은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 소리를 남자는 가만히 앉아 듣기만 했다. 혀를 끌끌 차는 노인부터 어린 자식의 손을 꼭 잡고 경멸하듯 쳐다보는 여자와 젊은이들까지. 그들의 시선은 왜 그렇게 사냐고 묻는 듯 날 선 비수같이 날카로웠다. 남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자신의 내부에 울려 퍼지는 소리에 집중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해. 누구도 나를 이해하려 하지 않아.'

남자는 혼잣말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창턱에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코까지 골며 깊은 잠에 빠졌다. 승객들이 하나 둘 내리고 버스에는 오로지 남자 혼자 남아 있었다. 해는 진작 저물어 사위가 어두웠다. 거리에 오가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달리던 버스가 한적한 곳에서 멈췄다. 버스 기사가 백미러로 남자를 힐끗 쳐다봤다. 웅크리고 자는 남자의 모습이 왜인지 나이 든 아이 같았다. 나이만큼 몸은 자랐지만, 어딘가 모자라 보였다. 버스 기사가 남자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 치자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게슴츠레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던 남자가 눈앞의 버스 기사를 보고 안심하는 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남자가 쉰 목소리로 삐딱하게 물었다."

"여기? 종점이에요. 이제 내려요. 내려. 다 왔어."

"아니, 깨워야 할 거 아니에요?"

"지금 깨웠잖아요. 어서 내려요."

"그게 아니라 종점까지 와서 깨우면 어떻게 한단 말이야. 여기가 어디야?"

남자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주위를 살폈다. 사위는 어두웠다.

"이 사람이, 기껏 깨워줬더니 한다는 소리가...... 이게 무슨 택시인 줄 알아? 어서 내려."

떠밀리듯 버스에서 내린 남자는 우두커니 서서 사라지는 버스를 바라봤다. 버스 정류장 이정표만 덩그러니 놓인 종점은 어디로 출발해 어디로 끝나는 부분인지 알 수 없었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문 남자가 불을 붙여 길게 연기를 뿜어냈다. 그리고 입을 오므려 도넛 모양으로 허공에 연기를 뿜고 그 아래 서서 마치 영화 속 주인공처럼 두 팔을 양옆으로 크게 뻗었다. 빙그레 웃으며 숨을 들이마시는 모습이 날개를 퍼덕이지만 날지 못하는 기괴한 새의 모습과도 같았다.

담배만 피워대던 남자가 우두커니 서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차가운 바람에 뼈 마디마디가 시렸다. 한기에 수인들끼리 몸을 부대끼며 잠을 청하던 교도소와 바깥세상은 달랐다. 일단 오늘 밤을 무사히 넘겨야 했다. 길거리에서 얼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남자의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남자는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걷던 남자가 갈증을 느껴 가방에서 술병을 꺼내 입으로 가져가 반쯤 비워냈다. 그때 남자의 눈에 가로등 불빛이 보였다. 사방이 어둠뿐인 그곳에 홀로 빛나는 불빛은 불나방처럼 남자를 이끌었다. 남자는 남은 술을 다 비우고 가로등 불빛 아래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빛의 테두리 아래서 양팔을 벌려 연극 무대 속 주인공처럼 빙그르 돌았다. 한참을 빛 아래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남자 앞에 페인트칠이 벗겨져 녹이 슨 이정표가 비스듬히 박혀 있었다. 처음에 미처 보지 못한 이정표였다. 이정표는 가로등 불빛 밖으로 보이는 마른나무들 사이를 가리켰다. 숲으로 향하는 입구였다. 남자는 빛의 경계선에 서서 그곳을 잠시 바라봤다.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숲의 기운이 남자를 끌어당겼다. 불길했지만 망설임도 잠시, 남자는 시커만 아귀의 입속 같은 그 길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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