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어둠 속으로 걸어가며 단숨에 술을 한 병 비웠다. 술기운이 올라 남자의 몸에 열이 나지만 숲의 한기를 견디기 버거웠다. 교도소의 시멘트 벽 틈에서 느껴지는 추위와 도시의 네온사인 불빛 아래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과는 다른 한기였다. 남자는 가방에서 술병을 다시 꺼낸 뒤 숲 안으로 계속해서 걸어 들어갔다. 숲은 어둠이 팽창한 듯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할 만큼 음산하고 괴괴한 기운이 강했다. 남자는 술을 목구멍으로 넘기며 걷다가 발에 치이는 마른 낙엽 소리에 숨을 죽였다. 종종 뒤를 돌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낯선 존재가 있는지 확인하기도 하고 소심하게 어이, 어이, 하며 소리치기도 했다. 하지만 남자는 서서히 숲의 어둠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숲의 어둠이 주는 두려움은 희미해지고 홀로 남겨진 고독은 여유로움으로 바뀌어갔다.
남자가 술을 서너 병쯤 비웠다. 무적신세인 남자를 만류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술기운이 올라온 남자는 어둠이 주는 두려움을 잊고 있었다. 오히려 숲의 주인처럼 산책하듯 여유롭게 걷는 남자였다. 왕의 정원을 거닐듯 여유롭던 남자가 유독 음산한 기운이 강하게 서린 나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나무에서 한기마저 느껴졌다. 겨울이 주는 추위와는 달랐다. 피부에 전류가 흐른 것처럼 솜털이 곤두서고 닭살이 올라오는 한기였다. 남자가 나무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피기 시작했다. 마른 낙엽만 수북이 쌓여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우뚝 서 있는 남자가 나무 주위를 다시 천천히 돌다 미끄러지며 넘어졌다. 다른 곳은 다 메마른 낙엽만이 수북한데 그곳에만 무엇인가 쏟아져 흘린 듯 끈적거리는 액체가 질펀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무 위를 올려다봤다. 어둠 속에 하얀 실루엣이 나뭇가지에 늘어져 있었다.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인 남자가 다시 나무 위를 올려다봤다. 나무 위에는 목을 맨 사람의 몸이 축 늘어져 있었다.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남자가 급히 몸을 일으켜 어둠 속을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마른 나뭇가지에 얼굴이 긁히며 상처가 났지만 아픔을 느끼지도 못했다. 목을 맨 시체가 바로 등 뒤에 있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남자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한참을 정신없이 달리던 남자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져 발버둥을 쳤다. 오른쪽 발목을 무언가가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귀신이 나왔다고, 귀신이 사람 잡아간다고 내지르는 비명이 허공에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급기야 남자는 두 손을 머리 위로 맞잡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잘못을 빌며 울기 시작했다.
"살려주세요. 잘못했습니다. 다신 안 그럴게요. 살려주세요."
순간 남자의 머릿속에 과거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떠올라 순식간에 흘렀다. 그 시간은 정제된 어둠 속에 고개를 묻은 남자의 눈앞에 번뜩이다 사라졌다.
땀과 눈물이 뒤섞인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남자는 나무뿌리 사이에 걸린 오른쪽 다리를 빼낸 뒤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앉아 거칠게 숨을 몰아 쉬었다. 흥분이 쉽게 가라앉지 않은 남자가 가방에서 술병을 꺼냈다. 술을 얼굴에 쏟아붓듯이 마시던 남자는 수첩을 꺼내 들었다. 수첩 제일 뒤에는 남자의 어린 사진과 가족사진이 같이 꽂혀 있었다. 한참을 사진을 메 만지며 보던 남자의 두 뺨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이야......'
남자의 중얼거림은 단호하고 나직했다. 어둠 속 숲에서 갈 곳 없는 남자가 홀로 있는 시간을 견디기 위한 자기 암시 같았다. 남자는 빈 술병을 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달려온 그 방향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한참을 헤맨 끝에 남자는 한기가 서린 나무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남자가 입은 패딩 잠바는 땀으로 젖어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맺혀 사라졌다. 시체는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뭇가지에 몸을 축 늘어뜨린 채 매달려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밥을 먹고 잠을 자며 심장이 뛰던 사람이지 않았나. 시체를 올려다보며 생각에 빠져있던 남자가 소매를 걷어 올리고 나무를 올라타기 시작했다. 연신 미끄러지던 남자가 가까스로 시체가 목을 맨 나무줄기를 잡으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온 거야. 하긴 죽으려면 무슨 짓을 못 하겠어. 제길.'
남자가 손을 뻗어 시체의 목에 감긴 줄을 잡아당겨 얼굴을 보았다. 시체는 둥그런 얼굴에 단발머리를 한 여자였다. 남자가 나뭇가지에 묶인 줄의 매듭을 풀자 시체는 기다렸다는 듯 땅으로 떨어지며 둔중한 소리를 냈다. 남자가 거칠게 숨을 내뱉으며 시체를 내려다봤다. 무릎까지 내려온 헐렁한 와이셔츠가 잠옷같이 보여 깊은 잠에 빠진 여자에 불과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인가.'
시체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리던 남자가 나무에서 내려와 시체의 하얀 와이셔츠에 묻은 흙을 털어 내고 나무에 기대어 놓았다. 한기는 이제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는 시체에 다가가 풀어헤쳐진 하얀 와이셔츠의 칼라 단추를 여민 뒤 가방에서 손수건과 술병을 꺼냈다. 손수건에 술을 부어 여자의 얼굴을 닦아 주던 남자가 문득 무엇인가 떠오른 듯 손수건을 매맨지기 시작했다. 손수건은 남자의 어머니가 교도소에 있는 남자에게 영치금과 함께 넣어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