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이었다. 남자는 어린 나이였지만 그날의 기억을 지금까지 또렷이 할 수 있다. 하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잊고 싶지 않고 지워지지 않는 기억. 남자는 수없이 부정해 봤지만 트라우마와 같이 뇌리에 박힌 기억의 조각이었다. 남자의 어머니는 가련한 여자였다. 아니면 나약한 여자였는지도 모른다. 일말의 핑계가 있다면 여자의 남편은 남편으로서 올바른 행실을 하지 못하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을 선택한 잘못도 여자의 나약함으로 말할 수 있을까. 여자의 남편은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수중에 조금이라도 돈이 있다면 술을 사 먹고 밤낮으로 노름을 즐기는 전형적인 한량이었다. 남자의 어머니와 결혼하기 위해 처음 선을 보고 몇 번의 만남을 가졌을 때 남편이라는 작자는 술꾼임을, 노름꾼임을 숨기고 착실한 사업가 이미지로 보이기 위해 애를 썼다. 결혼하기 위해 선을 보고 만남을 가졌듯이 남자의 어머니도 큰 의심은 하지 않았다. 가난한 농부의 딸이 사업가와 결혼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그 결혼은 한 가정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남편이 사업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데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밤낮으로 마시던 술을 결혼해서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었고, 잔뜩 취해 대자로 뻗어 자는 남편을 여자는 깨울 수 없었다. 거기다 남편은 주사가 있었다. 주사가 심했다. 자고 있는 남편을 깨울라 치면 여자는 남편에게 두드려 맞았다. 무엇이든 손에 물건이 잡히는 대로 여자에게 던졌고 주먹이 여자의 얼굴로 향했다. 여자는 술 마시는 남편에게 맞고 싶지 않았다. 가난한 농부의 딸이지만 단 한 번 맞아본 적 없는 아버지에게 이쁨 받는 딸이었다. 남편이 술을 마시면 술을 마시는 데로 놔두었다. 비위를 거슬리는 날은 어김없이 손찌검을 하는 남편을 피해 집밖으로 도망쳐야 했다. 술만 마시는 남편이 일을 해 돈을 벌어 올 리 만무했다. 쌀독에 쌀이 바닥나 있었다. 맞아 죽든 굶어 죽든 둘 중에 하나였다.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다. 도망갈 수도 있었다. 기회는 있었다. 뱃속에 아이가 들어서지 않았다면 여자는 진작에 남편을 피해 도망갈 수 있었다.
여자는 만삭의 몸을 이끌고 어김없이 일을 해야 했다. 하루 일당을 받아 숨겨놓으면 남편이라는 작자는 어떻게 아는지 품삯 받은 돈을 뒤져 술을 사 마시고 대낮부터 코 골며 자거나 노름에 빠졌다. 여자는 배 속에 아기만 없다면, 없었다면이라는 생각을 점점 자주 하게 되었다. 사기 결혼과 다름없는 그 생활을 견뎌야 했던 이유는 뱃속의 아기가 전부였다. 여자는 몸이 아파 일을 못 나가 집에서 쉴 때면 술에 취해 자고 있는 남편의 얼굴을 피부를 벗겨낼 듯 응시했다. 생기 없는 눈빛으로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남편의 눈썹과 코와 입술, 귀, 턱선까지 모조리 할퀴고 나면 어느새 창밖 하늘에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창밖 노을이 번지는 핏빛 하늘은 여자의 충혈된 눈과 닮았다.
여자는 사내아이를 낳았다. 사내아이를 낳았다고 남편은 좋아했다. 사내아이를 몇 시간 동안 어르고 안으며 젖병까지 직접 물렸다. 갑자기 남편은 돈을 벌어야 한다며 일을 하러 나가겠다고 여자를 챙기는 모습까지 보였다. 남편의 모습에 여자는 당황했다. 저럴 수가 있을까. 여자는 깊은 불신으로 집을 나서는 남편을 바라봤다. 며칠 동안 착실한 모습을 보여주려는 남편이었다. 하지만 술이 문제였다. 여자에게 사업가 행세를 하던 남편이 할 수 있는 일은 막일뿐이었다. 점심을 먹고 잠시 쉬면서 술을 한 잔 마신다는 게 취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벽돌을 지고 계단을 오르다가 발을 헛디뎌 추락해 사고가 났다. 들것에 실려 집에 온 남편을 보고 여자는 놀라지도 울지도 않았다. '차라리 죽었어야 했다' 며 중얼거렸다. 여자의 생활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목구멍은 하나 더 늘었고 병시중까지 해야 하는 남편의 추태는 더욱 심해졌다.
여자는 앙상한 겨울나무처럼 뼈마디가 시큰거리고 메말랐다. 피부와 머릿결은 금방이라도 녹아 흘러내릴 듯 푸석거렸다. 여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생각하면 위험했다. 생각하는 순간 여자의 메마른 눈빛에 살기가 번뜩거렸다. 사내아이는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지만 정서적으로 부모와 교감이 부족했다. 말문도 또래보다 늦게 뜨였다. 그저 여자는 사내아이를 굶기지 않을 정도로만 보살폈다. 불구가 된 남자는 방구석에 누워서 술 가져 오라며 고래고래 소리치는 게 일상이었다. 술 한 모금이라도 목구멍에 들어가야 잠잠해지는 남자였다. 여자는 일을 마치고 집에 와 남자에게 작은 주전자를 던지듯 주었다. 그제야 여자는 아이와 쉴 수 있었다. 여자는 아이에게 밥을 물리며 누워서 주전자 주둥이로 술을 반쯤 흘리며 마시는 남편을 쏘아보았다. 아무 말하지 않아도 여자의 눈빛은 남편에게 병신새끼라고 쏘아붙이는 말로 들리는 거 같았다. 남편이 소매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야,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여자가 남편을 흘깃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편이 주전자 주둥이를 입에 가져가며 물었다.
"야, 너 지금 나 보면서 욕 했지? 욕했잖아? 맞아. 내가 다 알아. 저거 병신새끼라고 욕한 거 다 안다고."
남편이 주전자를 던지면서 엎어졌다. 여자는 눈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내아이에게 밥을 떠 반찬을 올려주었다. 그 모습에 남편의 눈동자가 하얗게 돌아갔다. 밥상을 엎은 남편은 이번에는 여자에게 다가가 목을 잡고 조르려 뉘었다. 여자는 목을 잡힌 상태에서 낄낄 웃었다.
"죽일 수 있으면 죽여봐. 병신새끼."
"......"
남편은 분이 안 풀려 여자의 목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여자는 아무 저항도 하지 않으며 낄낄 웃기만 하며 사내아이를 쳐다봤고, 사내아이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저 울어 젖히기만 했다. 남편이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웃더니 여자의 목을 잡던 오른손을 허리춤으로 내려 바지 혁대를 끌르기 시작했다. 혁대를 끌르고 바지 자크를 내리며 여자의 치마를 올리려는데 여자의 눈빛이 살기 가득하게 변했다. 여자가 발로 남편의 배를 밀치며 걷어찼다.
"이젠 하다 하다 별짓을 다 하려고 하네."
남편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벽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여자가 남편 옆에 뒹굴고 있는 주전자를 들고 부엌으로 들어가 술을 채워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여자는 주전자를 들어 남편 눈앞에 한 번 흔들고 던지듯 놓았다. 남편은 비굴한 눈빛으로 손을 떨며 주전자를 집어 들고 주둥이째 마셨다. 그날 밤, 여자는 술에 곪아 떨어진 남편을 두고 집을 나왔다. 도망이었다. 코 골며 자고 있는 남편 얼굴에 손수건을 던지며 올려다본 밤하늘에는 둥그런 달빛이 여자를 반기고 있었다. 가방을 들고 대문을 나와 걷다가 사내아이가 신경 쓰였다. 남편의 아이이지만, 여자의 아이이기도 했다. 여자는 집으로 돌아갔다. 사내아이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남편 옆에 앉아 있었다. 여자는 사내아이를 업고 다시 집을 나와 남편을 떠났다. 그때 사내아이는 여자가 남편에게 던진 손수건을 손에 쥐고 여자의 등에 업혀 집을 떠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