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도망

by 이상현


그날은 한겨울 밤이었다. 불구인 남편을 집에 남겨 둔 여자가 남자를 등에 업고 도망가던 날 밤, 여자는 마을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 없이 발소리마저 죽여가며 조심스럽게 걸었다. 숨죽여 종종 거리며 걷는 여자 발소리 낌새를 느낀 마을 똥개들이 으르렁으르렁 짓긴 했지만, 여자는 담벼락에 붙어 숨을 고르며 다시 걸었다. 남자는 여자 등에 업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노랗고 동그란 달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달에 토끼 있어. 토끼야. 토끼."

"조용히 해. 좀."

여자가 단호하고 날카롭게 일침을 놓듯 등에 업은 남자를 위아래로 흔들며 말했다. 남자는 집에 홀로 남겨진 아버지에 대한 언급은 마을을 벗어나는 동안 전혀 없었다.

새벽 어스름 동틀 무렵, 여자는 버스 터미널 벤치에 남자와 나란히 앉아 졸다 깨기를 반복했다. 여자가 앉아서 졸고 있으면 남자가 춥다고 보채며 여자를 흔들어 깨웠다. 보채는 남자의 얼굴에서 술주정하는 남편의 모습이 어렴풋 스쳐지나 닮아 보였다. '그 놈팡이 아들 아니라고 할까 봐.' 여자는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행선지를 찾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터미널에 몰리기 전 떠나야 했다. 여자는 지도에서 반대편 끝을 보고 표를 끊었다. 이 마을에 돌아올 일은 영영 없기를 바라며 여자는 남자를 등에 업고 버스에 올라탔다. 남자는 여행 간다며 들떠 발을 동동 굴렀다.

여자가 버스 종착지에서 내렸다. 여행 간다고 들떠있던 남자는 잠에 취해 여자 등에 업혀 칭얼거렸다. 지구 반대편이 이럴까. 차가운 한기에 뼈마디가 딱딱하게 얼어붙어 굳는 기분이었다. 여자는 남자가 들고 있는 손수건을 머플러처럼 접어 남자의 목에 감아 주었다. 거리에 드문드문 건물 몇 채만 보일 뿐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남자가 잠에서 깨자 여자에게 배고프다고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밤새 아무것도 먹지 않아 여자도 허기가 밀려왔다. 아무도 없는 거리를 얼마나 걸었을까. 허름한 식당을 발견해 여자는 남자의 손을 잡고 들어갔다. 국밥 두 그릇 시켜서 남자와 국물 한 방울 남김없이 다 먹어치웠다. 여자가 잠시 앉아서 식당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할머니 혼자서 주방과 서빙을 도맡아 하는 식당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는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며 음식을 나르고 계산도 빠짐없이 하고 있었다. 노인이 하는 일을 돕고 식당에서 지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여자는 카운터에 서서 할머니를 가만히 쳐다봤다. 할머니는 국밥 그릇을 곧장 주방에 갖다 놓고 카운터로 걸어 나왔다.

"맛있게 드셨수?" 할머니가 남자에게 박하사탕을 하나 쥐어주며 말했다.

"네, 잘 먹었습니다. 저, 할머니. 혼자 일하시나 봐요."

여자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며 말했다.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웃으며 카운터에서 장부를 꺼냈다. 여자가 지폐를 내밀며 조심스럽게 할머니를 응시하며 말했다.

"할머니, 여기 일손 필요하지 않으세요? 괜찮으시면 제가 할머니 일을 도우면서 지내도 괜찮을까요?"

여자는 조심스러웠지만 막무가내였다. 할머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댁을 언제 봤다고 내가 일을 맡기고 여기서 지내게 한단 말이오. 여기가 그렇게 바쁜데도 아니라 이 늙은이 혼자 해도 충분해요."

여자의 얼굴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당장 오갈 데 없는 여자가 오늘 밤 머물 곳을 찾아야 했다. 할머니가 장부를 정리하며 여자를 곁눈질로 쓰윽 흘겨봤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할머니는 볼펜을 들고 메모지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여기 이거 받아요. 여기라도 괜찮으면 찾아서 가봐요."

할머니는 메모지를 여자에게 건네고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여자는 메모지를 받으며 멍하니 서서 사라지는 할머니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남자가 박하사탕을 입에 넣으며 우물우물거리며 여자의 손을 당겼다. 그제야 여자는 메모지를 보았다. 메모지에는 주소와 가게 이름이 적혀있었다. 여자는 짚푸라기 라도 잡는 심정으로 식당을 나와 메모지에 적힌 주소의 가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자가 메모지에 적힌 건물 앞에 서서 멍하니 바라봤다. 건물은 황폐했다. 말 그대로 황폐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떠오를 정도로 사람의 손길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여자가 건물 앞에 서서 망설였다. 돌아갈까. 그때 남자가 춥다며 망설임 없이 쓰러질 듯한 건물 문을 밀고 달려들어갔다. 여자가 말릴 새도 없었다. 여자는 황급히 남자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에는 숨쉬기 어려울 만큼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한걸음 옮길 때마다 먼지가 사방으로 날렸다. 시체라도 썩고 있는지 벌레도 우글거렸다. 여자가 남자를 찾기 위해 어두컴컴한 건물 안을 이리저리 뒤지고 다니다 발에 무엇인가 걸려 넘어졌다.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일어나는 여자 눈앞에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여자는 너무 놀라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괴수였다. 아니, 괴수 같았다. 어깨까지 오는 장발과 몇 달은 족히 면도를 안 한듯한 덥수룩한 수염이 어두컴컴한 실내의 그림자에 비추어 괴수같이 보였다. 괴인은 위협적인 행동이나 말은 하지 않았다. 여자를 빤히 응시하다가 다시 자리에 모로 누워버렸다. 여자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다가 다시 남자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었다. 남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여자가 식은땀 흘리며 망연자실 우두커니 서서 괴인을 바라보는데, 건물 밖에서 여자를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추워서 들어갔는데 냄새가 고약하고 어두워서 그냥 나왔다는 남자의 말에 여자는 헛웃음이 나왔다. 여자는 남자의 손을 꼭 잡고 주위를 둘러봤다. 황량한 나무와 몇 채 보이지 않는 건물 그리고 눈앞의 괴인까지. 여자가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은 없었다. 한겨울 매서운 바람은 옷깃을 뚫고 피부와 눈을 시큰거리게 만들었다. 모자가 길에서 얼어 죽을 판이었다. 여자는 괴수 같은 괴인이 사는 집에 겨울바람을 피하기 위해 잠시 머물 뿐이라고 다짐하며 남자의 손을 꼭 잡고 시커먼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일요일 연재
이전 05화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