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인이 모로 누워있는 건물 주변에 몇 채 안 되는 건물이 있었다. 여자가 남자의 손을 잡고 괴인의 집에 먹잇감처럼 제 발로 찾아갈 이유는 없었다. 그 해, 겨울의 유난스러운 한기가 여자의 마음보다 차갑지는 않았다. 여자는 괴인이 정말로 괴수이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갑자기 나타난 괴수가 남자를 잡아가기를, 합당한 죽음이 되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합당한 죽음 뒤에 여자는 나비처럼 훨훨 날아다니는 꿈을 다시 꾸려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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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를 임신한 여자가 남편의 술주정을 피해 도망친적이 있었다. 급하게 이웃집에 몸이라도 피해 숨어 있으면 남편은 어떻게 알았는지 찾아와 머리끄덩이를 낚아채며 끌고 갔다. 가끔은 멀리 도시 밖으로 도망가기도 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다. 이웃집에 여자가 몸을 숨기면 다른 이웃 여편네가 남편에게 누구 집에 숨어 있다고 밀고자처럼 고해바쳤다. 시외로 나가도 마찬가지였다. 여자가 숨어 있을 곳도 그렇다고 숨길 수도 없었다. 여자는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른다는 말을 실감했다. 땅을 서서 똑바로 걷고 있는데 몸은 점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리는 기분. 이웃들이 보여주는 친절한 미소를 더 이상 믿지 않는 여자는 세상 사람들마저 불신하기 시작했다.
여자는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세수를 하다 거울에 비친 낯선 얼굴을 보았다. 푸석하고 건조한 피부와 머릿결, 날카롭고 생기마저 잃은 눈빛, 입꼬리는 축 쳐져 늘어져 있었다. 지옥 같은 생활을 견디다 처음으로 오롯이 거울 속 얼굴을 보고 여자는 눈물이 맺히고 말았다. 아무도 여자에게 말해 주지 않았다. 아무도 여자를 위로해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자가 넋두리와 위로를 바라지 않았다. 이제 여자는 삶이라는 터널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여자가 마지막 끈을 잡아보려 고향을 찾아갔다. 여자의 배는 이미 더 부풀어 오를 수 없을 만큼 부풀어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가까스로 고향집 대문을 열며 숨을 길게 토해냈다. 마당에서 여자의 아버지가 먼 곳을 응시하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대문을 밀고 들어오는 여자와 눈이 마주친 여자의 아버지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반기지도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담배를 비벼 끄고는 뒤돌아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여자가 왼 손으로 만삭이 된 배를 부여잡고 가까스로 마당에 놓인 디딤돌에 앉았다. 여자는 방으로 들어가 버린 아버지를 부르지 않았다. 부를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디딤돌에 앉아 조금 전 아버지가 바라보던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익숙한 풍경이 여자의 눈에 들어왔다. 셀 수 없이 보고 또 봤던 그 풍경들, 지겹다고 느껴져 고향을 떠나고 싶다고 여기게 한 그 풍경들이 지금은 여자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있었다.
그날 밤, 여자는 숨 죽여 울고 말았다. 여자의 아버지는 단호했다. '돌아가라' 한마디로 더 이상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는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매달리고 싶은데 그렇게 할 수 없는 처지에 화가 났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아버지의 뒷모습에 원망이 담긴 눈빛으로 쏘아보지만, 여자는 피식 헛웃음만 새어 나왔다. 중간에서 어쩔 줄 몰라하던 여자의 어머니가 돌아가라는 아버지의 말을 만류했다. 덕분에 여자는 고향집에 도착해서 한 시간도 안 되어 남편 같지도 않은 사내의 집으로 가 술주정을 받아야 하는 상황을 모면했다. 그리고 여자는 밤이 깊어가도록 고향집에서 숨 죽여 울었다.
하루 머물던 여자가 또 하루를 머물렀다. 여자의 어머니가 배가 만삭인데 지금 어디를 보내냐고 따지듯이 물어 여자는 하루를 더 머물 수 있었다. 여자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온종일 누워 있었다. 종종 여자의 어머니가 음식을 쟁반에 담아와도 여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아침에 여자의 어머니가 쟁반에 담아 온 음식이 차갑게 식어 굳어 있으면 여자의 어머니가 다시 새 음식을 담아 여자의 머리맡에 놓았다. 여자는 음식은 쳐다보지 않고 어머니를 불렀다.
"엄마, 엄마."
여자가 더 애처롭게 울음을 참아가며 말했다.
"엄마, 나. 이제 어떻게 살아?"
"......"
여자의 어머니는 음식을 놓고 나가려다 말고 여자와 나란히 누웠다. 한동안 여자와 여자의 어머니는 천장의 기하학적인 벽지 무늬만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자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까 천장의 벽지를 더 집중해서 쳐다봤다.
"엄마는 나 임신했을 때 괜찮았어? 그냥 궁금하네."
여자가 눈을 깊게 감았다 뜨며 시선을 돌렸다. 여자의 어머니가 천장에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괜찮다니? 무슨 말이 그래? 엄마는 하나밖에 없는 우리 딸 가져서 너무 행복했어. 당연한 말 또 한다고 하지만 당연한 말이 정말 정답이야. 그래서 엄마도 정말 좋았어. 우리 딸도 지금 배 속에 아기 있는데 안 그래? 남자들은 이런 걸 모를 거야."
여자는 고개를 돌려 다시 천장을 바라봤다.
"난 안 그럴지도 몰라. 이 뱃속의 태아가 사내아이인지 계집아이인지 그런 것보다 그 술주정뱅이 놈 새끼라는 생각밖에 안 들어."
여자의 어머니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창밖을 보던 시선을 여자에게 돌리며 말없이 안아 주었다. 어머니에게 안기면 펑펑 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여자는 울지 않았다. 건조하게 말라비틀어진 죽은 나무처럼 여자의 마음은 이미 생기를 잃은 지 오래였다.
고향집에 며칠 더 머물면서 여자는 진통을 겪었다. 이미 배는 만삭이었고 진통이 오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였다. 여자의 어머니는 급하게 산파를 하는 할머니를 불렀다. 솜씨 좋아 보이는 할머니는 여자의 진통이 이상한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진통이 오면 소리를 지르라는 할머니의 말에도 여자는 눈을 부릅뜨고 입술을 깨물기만 했다. 정오에 시작된 진통이 자정이 다 되어서 끝났다.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할머니는 고추야 하고 말했지만 그 집에서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할머니는 찝찝한지 연신 가래를 끌끌거리다가 품삯을 받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여자의 입술은 피가 맺혀 흥건했고 손목과 손등은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갓난아이는 숨 넘어갈 듯 울어 젖혔다. 하지만 여자는 담요에 감싼 제 아들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날 밤, 마을은 갓난아이 울음소리로 요란했다. 마을 사람들은 축복이라도 내린 사내아이가 태아난 줄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