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복한 여자

by 이상현

여자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심정이었다. 남편이라는 작자의 술주정을 받아내다 사내아이와 함께 도망치던 밤이 부질없는 기억으로 남아 머릿속에 맴돌았다. 여자는 망설이고 있었다. 눈앞의 집에 괴수 같은 괴인이 있다. 또 다른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고 체념하려는 찰나 여자의 손을 뿌리친 남자가 춥다며 다시 집을 향해 뛰어 들어갔다. 잠시 눈에 초점을 잃은 여자가 남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입을 꾹 다물고 남자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괴인은 현관에서 정면에 보이는 벽에 기대어 여전히 웅크린 채 누워있었다. 집은 생각보다 넓었다. 현관 바로 우측에는 이층으로 이어지는 나무계단이 놓여 있었다. 나무계단 옆으로는 좁은 복도가 이어졌다. 여자는 이 방 저 방 오가며 남자를 찾다가 이층으로 연결되는 나무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삐걱삐걱. 나무계단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먼지가 우수수 날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래층보다 좁은 이층 방은 다락을 방으로 개조해 사용한 듯 보였다. 방에 놓여 있는 가구들은 거의 온전한 모양 그대로였다. 남자는 그 방에 있었다. 그날 밤은 그 방에서 남자와 보내기로 여자는 결심했다. 창문을 열어 방안을 환기시키고 천장에 걸린 거미줄을 제거했다. 장롱에는 이불이 빼곡히 개어져 있었다. 여자는 아래층을 슬며시 보았다. 괴인은 여자와 남자의 존재를 신경 쓰지 않는 듯 모로 웅크리고 누워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여자는 깊은 잠에 빠졌다. 남자를 재우고 누워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잠이 든 여자는 꿈을 꿨다. 수풀이 우거진 숲을 한참 걷던 여자가 어느 마을에 도착했다. 풍경이 눈에 익은 여자가 마을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낯익은 집과 산과 들이 보였다. 심지어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마저 친근하게 느껴졌다. 여기는 어딜까.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은 여자는 미소마저 지으며 걸었다. 하지만 한참을 걸어도 마을 사람들을 마주칠 수 없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던 그때였다. 여자 앞으로 꼬마아이가 담벼락에서 툭 튀어나와 남편 잡아먹는 여자가 나타났다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제야 여자는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몰래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자는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고 달려도 마을 입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뒤에서는 귀신 들린 여자가 도망간다며 수군거렸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갑자기 금이 가더니 둥그렇게 갈라지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여자는 더 이상 이 상황을 견딜 수 없었다. 비명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자각도 하지 못한 악몽이었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다. 태양이 하늘 높이 떠 있었고 어디선가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여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돌려 옆에서 자고 있는 남자를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아버지를 찾지 않는 아이...... 아이의 이목구비는 커갈수록 남편의 실루엣을 닮아가고 있었다. 여자는 주정뱅이의 이목구비를 닮은 남자를 바라보며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구분할 수 없어 현기증을 느끼고 말았다. 하지만 남자는 잠꼬대까지 하며 칭얼거리고 있었다.

괴인은 괴수가 아니었다. 괴인은 그저 장발에 수염이 덥수룩한 사람이었다. 온종일 어두컴컴하고 곰팡내 나는 집에서 웅크리고 누워있었다. 괴인은 여자와 남자를 신경 쓰지 않았다. 여자와 남자가 괴수를 눈앞에 두고 집안을 왔다 갔다 해도 괴인은 잠깐 고개만 슬그머니 들어 올려 무심히 쳐다보다 다시 누워버렸다. 여자는 괴인이 말을 못 하는 벙어리로 생각했다. 어두컴컴한 곳에서 겉모습만 보면 무시시한 괴수 같지만 한없이 약한 존재로 세상에 버려진 남자. 여자는 자신이 무슨 망상을 하나 싶으면서도 하루하루 이층 다락방에서 괴인의 존재가 신경 쓰였다. 하지만 봄이 오면 이 집에서 떠날 계획을 준비하고 있는 여자였다.

어김없이 아침 해가 밝아 왔다. 남자는 이불을 잡고 일어나지 않고 여자는 그런 남자를 깨우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작고 평범한 일상을 겪으면서 여자는 조금씩 평온한 마음이 일었다. 여자가 이불을 잡아당겨 남자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남자는 숨 넘어갈 듯 웃으며 그대로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달려갔다. 삐거덕, 삐거덕. 남자가 요란하게 계단을 뛰어내려 가자 계단에서 먼지가 일었다. 삐거덕, 삐거덕, 끼리릭, 끼리릭, 쾅. 남자의 발걸음에 맞춰 일던 먼지가 순식간에 아래층을 뒤덮었다.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이층 난간에서 여자가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아래층을 내려보았다. 여자는 갓난아이를 안고 한밤중 산에 오르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여자의 한쪽 입꼬리는 실룩이며 웃지만, 눈에는 눈물이 가득 맺혀 양볼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의 이름을 부르지도 못하고 고개만 숙인 채 울었다.

'세상 박복한 년이 맞구나......' 여자의 중얼거림이 끝나기 전에 무너진 계단 옆에서 남자가 울음이 가득 찬 목소리로 여자를 불렀다.

"엄마. 엄마......"

남자의 목소리가 여자는 아득히 멀게만 들렸다.

"엄마. 엄마, 여기 아저씨, 나무 사이에 깔렸어요."

정신을 차린 여자가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 남자가 무너진 나무 계단 옆에서 쭈그리고 앉아 울상을 짓고 있었다. 여자가 장롱에서 이불을 전부 꺼내 아래층으로 던졌다.

"엄마가 내려갈게. 이불을 부러진 나무 위에 펼쳐놔."

여자가 이불을 타고 미끄러지듯이 내려왔다. 남자는 거의 다치지 않았다. 무릎과 팔꿈치에 상처가 조금 나 있었다. 여자는 안도하면서도 의아했다. 남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너는 왜 다치지 않았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남자가 한쪽 구석에 쓰러져 있는 괴인을 손을 들어 가리켰다.

"엄마, 저기. 저 아저씨가 나 구해줬어."

"뭐라고?"

여자가 고개를 황급히 돌려 바라본 곳에는 괴인이 나무 파편들에 깔려 엎어져 있었다. 여자는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왜, 왜, 나 같은 박복한 년한테. 왜.' 여자는 무너진 나무 계단을 하나씩 하나씩

치워가며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어떤 감동보다는 순탄치 못한 여자의 삶에 대한 처절함이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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