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면 떠나려던 여자는 계절이 한 바퀴 돌도록 떠나지 못했다. 한 해가 지나고 또 한 해가 지났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일상들. 매일 아침 보는 풍경마저 매 순간 새로웠다. 하지만 늘 봄이 오면 떠나려던 여자였다. 사내는 여자를 붙잡았다. 결국 여자는 언젠가는 떠나려고 챙겨두었던 짐 가방을 도로 풀어냈다. 여자는 이게 맞나 싶으면서도 사내가 보여주는 태도를 보면서 조금 더 머물러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내는 처음 집에서 보았던 누워만 있는 사내가 아니었다. 이상적인 남편의 모습. 여자는 사내를 볼 때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에 놀랐다. 주정뱅이 남편과 비교되는 모습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사내에게 끌리는 마음은 여자도 어쩔 수 없었다.
남자는 사내를 아버지처럼 따라다녔다. 지애비의 말투로 사내를 찾는 아이. 남자가 자라서 지애비처럼 될까. 여자는 알 수 없는 기시감에 낯빛이 어두워지곤 했다. 그때마다 사내는 여자에게 다가와 말없이 다독여주었다. 여자와 사내는 서로의 사정은 묻지 않았다. 한 집에 지내며 암묵적인 불문율 같은 것이었다. 여자와 사내는 알고 있었다. 지나간 일을 다시 이야기해 봤자 상처받은 마음만 곪아버린다는 사실을. 하지만 남자는 사내를 찾아 궁금한 점을 묻고는 했다. 하루는 남자가 사내를 찾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저씨, 아저씨는 왜 이 집에 혼자 있었어요? 수염도 기르고 머리도 길었잖아요."
사내는 아무 말 없이 남자에게 미소만 지어 보였다. 남자가 다시 한번 떼쓰면서 물으면 사내는 짐짓 심각한 어조로 여태껏 네 엄마를 기다렸다고 대답했다. 사내의 말에 남자는 심각해져 눈이 휘둥그레지고는 했다.
"엄마를 얼마나 기다린 거예요? 우리 엄마가 그렇게 좋아요?"
"......"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장난처럼 툭 던진 말인데 남자는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고개를 갸웃하던 남자가 득달같이 엄마가 있는 마당으로 달려 나갔다.
"엄마, 아저씨가 엄마를 여태껏 기다리고 있었어."
여자는 남자가 무슨 소리를 하나 싶었지만, 사내의 이야기가 나오자 급히 말을 돌렸다.
"아저씨 자꾸 귀찮게 하면 안 돼."
"아저씨가 이 집에 혼자 있었던 이유가 엄마 기다린 거래요. 엄마를 엄청 좋아한대."
여자는 남자의 말에 얼굴에 홍조가 올랐다. 남자가 제멋대로 한 말임을 알면서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엄마, 엄마 얼굴이 빨개졌어. 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야?"
사내는 엄마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집안으로 득달같이 달려들어갔다. 곧이어 사내는 남자와 같이 마당으로 나왔다.
"아저씨. 엄마가 아픈 거 같아요. 얼굴이 갑자기 빨개져서 아무 말도 못 해요. 아저씨가 치료해 주세요."
남자의 말에 사내의 얼굴도 붉게 물들어갔다. 남자는 여자를 올려다 보고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여자와 사내는 서로 눈을 마주 쳐다보지 못하고 얼굴만 붉어져갔다. 하늘에는 노을이 붉게 물들어 지평선 끝에서 파르르 떨고 있었다.
"아저씨. 아저씨도 아파요? 아저씨도 얼굴이 빨개요."
남자의 말에 사내가 지그시 미소 지으며 여자를 쳐다봤다. 여자도 고개를 들고 사내를 보며 미소 지었다. 남자는 여자와 사내가 아프다고 마당을 이리저리 뛰었다. 여자와 사내가 서있는 공간의 그 시간은 허물수 없는 성처럼 견고해지고 있었다. 그날 저녁부터, 그날 밤 여자와 사내는 같은 방을 사용했다.
계절이 또 한 번 지나 세상은 푸른빛으로 가득했다. 여자는 임신 석 달 차였다. 사내와 함께 보내는 평온한 나날들. 아버지를 찾지 않는 남자는 사내를 아버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 사람은 가족이 되어 있었다. 여자는 사내의 아이를 배속에 가지고 알았다. 특별한 일 없는 일상이 특별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하지만 남자가 커갈수록 주정뱅이를 닮아가는 행동과 말투의 기시감은 여자도 어쩔 수 없었다. 주정뱅이가 어렸으면 저랬을까. 여자는 불안했다. 누군가 모르는 낯선 이가 집에 찾아올 때면 돌아가지 못하고,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에서 사람을 보내지는 않았을까 하는 불안감. 기억을 옥죄는 고통은 남자로부터 파생되어 여자의 머릿속을 흔들어 놓고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