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의 아이를 가진 아홉 달은 여자 인생의 황금기였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상념에 빠져 현실과 과거의 굴레를 비교해 보는 여자였다. 쓴웃음이 허탈한 웃음으로 변해가고, 그만큼 여자의 배는 점점 둥그렇게 불러갔다. 평화로운 시간은 무의미한 거처럼 보이지만, 하나같이 소중한 일상으로 남겨졌다. 조금씩 미래를 꿈꿔보는 여자의 얼굴에 홍조가 올랐다. 왜 살아야 했는지, 죽지 못해 살았던 지옥 같은 날들. 박복한 년의 팔자가 이래도 될까. 상념은 언제나 여자에게 답을 주지 못했다. 곧이어 남자와 사내가 연이어 집으로 들어와 여자를 찾았기 때문이다. 여자는 세상 행복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씻고 저녁 먹을 준비해요."
아홉 달은 눈 감고 눈을 뜨니 지나가 있었다. 만삭이 된 여자. 남자를 가졌을 때처럼 산통이 심하지 않았다. 산파를 부르지도 않았다. 여자는 예정일이 되어서 사내와 병원을 찾았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아이를 낳았다. 사내아이였다. 남자를 낳았을 때는 거들떠도 보지 않던 여자가 둘째에게는 눈을 떼지 못했다. 유리창 너머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옆에 서있는 남자는 작은 갓난아이를 보고 물었다.
"저 작은 갓난아이가 내 동생이에요?"
"응. 동생이지. 남동생이야."
사내는 갓난아이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말했다.
"저렇게 작은데, 어디서 생겨서 나타난 거야?"
"응? 둘째는 엄마가. 어떻게 했더라. 엄마가. 가슴으로 낳았어."
사내가 횡설수설 둘러댔다.
"그럼 나는? 나도 가슴으로 낳은 거예요?"
"그럼 가슴으로 낳았지."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간호사가 나왔다. 산모와 아이의 면회가 잠깐 가능하다고 말하고 간호사는 유유히 사라졌다. 사내는 남자를 데리고 황급히 병실로 들어갔다. 침대에 여자와 갓난아이가 나란히 누워있었다. 여자가 핏기 없는 얼굴로 해맑게 웃었다.
"당신 닮은 아이가 태어났어요."
"고마워요. 고생했어요......."
사내가 여자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남자는 갓난아이의 얼굴을 이리저리 보다가 말했다.
"아이 얼굴이 쭈굴쭈굴하기만 한데. 엄마, 엄마. 그럼 난 누구 닮았어?"
정적이 흘렀다. 여자와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병실의 소독약 냄새만 강렬히 코끝을 자극하고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돌아가는 소리만 공허하게 울렸다. 사내는 고개를 갸웃했다.
"엄마, 난 누구 닮았냐니까?"
"넌 엄마 아들이잖아. 그럼......"
사내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갑자기 남자가 말을 이어서 했다.
"난 엄마 아들인데. 그럼 아빠는 닮았어? 아저씨 말고 아빠 닮았어?"
집을 떠나온 후, 처음으로 남자가 아버지를 찾는 순간이었다.
남자는 소리를 내지르듯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빠 닮았어? 닮았냐고? 갓난아이는 아저씨 닮았다면서 난 누구 닮았는지 말을 왜 못 해줘?"
남자의 고성에 갓난아이가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갓난아이를 달래고 사내는 남자를 달래야 했다. 여자가 미간에 익숙한 주름을 잡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악다구니를 쓰는 남자의 모습에서 주정뱅이의 모습을 봐서일까. 하지만 여자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곧이어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와 상황은 마무리되었다.
며칠 뒤, 여자는 갓난아이와 병원에서 퇴원했다. 여자는 갓난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아무도 없는 집안을 둘러보았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와는 다르게 사람의 손길이 묻어있는 기구들과 가구를 손끝으로 만져보았다. 익숙한 물건들이 손끝에 주는 여운에 여자는 살아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언제까지 이럴 수 있을까. 여자가 상념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때 막 잠이 들었던 갓난아이가 귀가 먹도록 울어 젖혔다. 여자가 서둘러 갓난아이를 눕힌 방으로 달려갔다. 남자는 방에서 갓난아이를 엉성한 포즈로 안고 있었다. 양 팔로 갓난아이의 등과 허리만 받치고 머리는 뒤로 젖힌 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갓난아이를 도로 받아 안으며 말했다.
"언제 왔어? 아이를 놀라게 하면 어떻게 하니?"
"그게 아니라, 한 번 안아 보고 싶어서요. 울리려고 그랬던 거는 아니에요."
여자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남자를 쳐다봤다. 여자는 목구멍까지 나왔던 말을 도로 삼키고 숨을 깊게 들이 내쉬었다. 마침 갓난아이가 다시 잠들기 시작했다. 여자는 남자를 쳐다보며 턱끝으로 방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방에 가있어. 이따가 부르면 밥 먹으러 나와."
"네......"
남자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방에서 나왔다. 남자는 갓난아이인 동생 탓을 하고 싶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온 남자가 누워서 창너머 하늘을 보았다. 구름이 보이고 움직이고 사라지더니, 조금씩 하늘은 노랗고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저녁 먹으러 나오라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두세 번 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눈을 감고 있던 남자는 잠에 빠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