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by 이상현

남자는 버스터미널 벤치에 한 시간 넘도록 앉아 있었다. 주머니에 반으로 접힌 종이를 꺼내서 읽어보기도 수차례였다. 여자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말했다면 남자는 지금 버스터미널 벤치에 앉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남자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얼굴. 단 한 번 불러본 적 없는 이름. 지금에서 왜 찾아가려 하는지 남자도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남자가 다시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걷기 시작했다. 담배를 한 대 물고, 또 한 대 물며 걸었다. 이십 분쯤 걸었을까. 마을 입구가 나왔다. 드문 드문 떨어진 집이 보였다. 가끔 마주친 마을 사람은 남자를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태양빛이 뜨겁게 멀리 퍼졌고 가끔 마을 똥개가 짖어댔다. 남자는 어렵지 않게 종이에 써진 주소를 찾을 수 있었다. 한눈에 다른 집과 구별이 되었다. 문패는 반으로 쪼개져 있었고, 대문은 구멍이 뚫려 녹슨 채 열려 있었다. 마당은 잡동사니가 가득했다. 대부분 폐자재와 술병이었다. 남자가 한 발 한 발 디디며 안을 살폈다. 사람이 여기서 살 수 있을까. 남자가 한 발 더 디디며 안을 살피자 인기척이 느껴졌다. 주정뱅이가 방 안에서 쉰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요? 누가 왔어?"

"안에...... 안에 누구...... 계세요?"

"누구야? 누가 허락 없이 이 집에 들어온 거야?"

남자는 우물쭈물 서서 대답하지 못했다. 곧이어 목발을 의지한 채 마당으로 나온 주정뱅이는 퀭한 눈동자와 움푹 파인 볼과 불그스레한 피부 그리고 술 냄새가 진동했다. 주정뱅이는 남자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알고도 찾아온 거야?"

주정뱅이가 미친 듯이 웃었다. 남자는 후회가 몰려왔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기분이었다.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상자. 이야기의 마침표는 없고 시작만 있는 상자 같았다. 남자가 절망적인 표정으로 주정뱅이를 쳐다봤다. 이러려고 찾아온 게 아닌데. 갑자기 주정뱅이가 오른쪽 목발을 들고 남자를 향해 마구잡이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퍽, 퍽. 몇 대 맞던 남자가 왜 맞아야 하는지, 왜 때리는지 이유를 알아야 했다.

"왜 그러세요? 그만하세요?"

"그만하라고? 버르장머리 없는 것들. 니들이 사람이냐?"

주정뱅이가 휘두른 목발이 남자의 머리를 가격했다. 퍽. 남자가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미간과 구레나룻에 붉은 피가 주르륵 흐르기 시작했다. 주정뱅이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니들 같은 새끼들은 다 죽어야 해."

주정뱅이가 다시 목발을 휘두르려고 높게 추켜올렸다. 남자가 안감힘을 쓰며 일어나 팔을 들어 주정뱅이의 가슴팍을 밀쳤다.

"씨발. 그만하라고."

주정뱅이가 뒤로 벌러덩 나자빠졌다. 픽. 넘어지면서 무언가에 박히는 소리가 났다. 둔중한 소리가 아니었다. 주정뱅이가 일어나지 않았다. 남자는 미간에 흐른 피로 얼굴이 끈적끈적했다. 세상이 온통 붉었다. 주정뱅이도 붉었고 하늘도 붉게 빛났다.


남자는 살인죄로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주정뱅이가 넘어지면서 폐가구에 박힌 못에 머리를 다쳐 발견했을 때는 이미 사망해 있었다. 남자의 친부였고 친부의 살인죄로 성립이 되면서 형량은 무거웠다. 여자는 남자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단지. 손수건과 몇 번의 영치금을 넣어주었다.


*

남자가 밤하늘에 유일하게 빛나는 노란 달을 바라봤다. 갓난아이적 산꼭대기에서 벌어진 일을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달빛은 칠흑 같은 어둠은 걷어내지만 추위는 가져가지 않았다. 땀이 마르자 체온이 급격히 떨어져 추위가 몰려왔다. 남자는 시체를 마주 보고 앉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어디에도 가야 할 곳이 없어 선택한 죽음일까. 시체를 보다 상념에 빠진 남자는 돌아가고 싶었다. 머물렀던 곳으로. 남자는 고향이라 부르는 장소로 돌아갈 자유를 잃었고, 함께 지내던 사람들을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 돌아갈 곳이 없는 남자에게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가 허락되지는 않았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착각으로 끝났다. 교도소를 나와도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한밤 중, 오갈 데 없는 남자에게 숲은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남자의 시선이 차가운 바람만큼 시리고 서글펐다. 남자는 편히 쉬고 싶었다. 슬며시 잠이 몰려와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반쯤 감긴 눈으로 남자는 빨랫줄이 감긴 죽은 여자의 목을 보았다. 남자는 뻣뻣하게 굳어가는 몸에 힘을 주어 엎드려 여자에게 다가갔다. 손수건을 손에 움켜쥔 채. 갑자기 남자를 기다렸다는 듯 여자가 미소를 지으며 남자에게 술을 권했다. 그 장소는 그 어느 곳 보다도 자유로웠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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