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bar)의 여자

by 이상현


남자는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길을 걸었다. 한참을 걸어도 거리에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앞에서 무언가가 남자를 잡아 이끌었다. 남자는 의아했다. 좀 전에 숲 속이었는데. 단발머리 여자 시체도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숲을 벗어나 여유로움에 일단 한숨 돌렸다. 추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가 작은 빛 한 점을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그리 멀어 보이지 않은 곳에 작은 빛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빛이 있으니 곧 시내가 나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남자는 그 작은 빛을 이정표 삼아 걸었다. 가까이 가서 본 빛은 작은 목조 건물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옆에 자리 잡은 목조 건물은 특별한 설명 없이 바(bar)라는 간판만 덩그러니 외관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주변에 다른 건물들은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문 앞에 서서 잠시 망설이다 문을 슬며시 밀고 내부를 염탐하듯 흘겨보았다. 하얀 실루엣이 일렁거릴 뿐 뚜렷이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문에 기대며 안을 보려다 몸의 중심을 잃고 문을 밀어버리고 말았다. 무게를 견디지 못한 문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반쯤 열렸다. 남자는 그 소리에 죄를 지은 사람처럼 흠칫 놀라면서도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직사각형 내부는 알코올이 곰팡이와 섞인 것처럼 쾨쾨한 냄새가 허공에 떠다녔고 흐릿한 조명 속에 갖가지 와인과 위스키가 선반마다 놓여 있었다.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가로로 길게 놓인 테이블 안쪽에서는 마치 남자를 기다렸다는 듯 둥근 얼굴에 단발머리를 한 여자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여자는 창백한 표정이었고 어딘가 음산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어서 오세요."

남자는 엉거주춤 서서 여자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죠?"

"보시다시피 여기는 바(bar)입니다. 갖가지 술이 준비되어 있는 곳이죠. 한잔하시겠습니까?"

평소 누군가 권하는 술을 마다하지 않는 남자였다. 여자가 서 있는 테이블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은 남자가 주눅이 든 채 선반에 진열된 갖가지 술병을 흘끗 살피며 물었다.

"술....... 한 잔 마십시다. 여기에는 뭐가 있죠?"

"오늘 가게 첫 손님이시니 제가 먼저 한 잔 내어드리죠. 위스키가 괜찮으실까요?"

남자의 표정에 화색이 돌았다.

"술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잘 마십니다."

여자는 몸을 돌려 선반에 있던 위스키 가운데 하나를 집어 능숙하게 잔에 따라 남자의 앞에 놓았다.

"일단, 스트레이트로 한잔하시죠."

남자가 잔을 들어 여자에게 고개를 슬쩍 끄덕이고 그대로 입에 가져갔다.

"괜찮군요. 이 술, 한 잔 더 마실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술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자가 잔에 술을 따라 남자 앞에 다시 놓았다. 기분이 한결 풀린 남자가 잔을 들어 빙글빙글 돌리며 여자에게 물었다.

"여기는 어딘데, 이런 술집만 있는 거요? 이 근처 걷다 보니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는 거 같은데."

여자는 대답하는 대신 남자를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질문이 어려운가? 아니면, 내가 촌놈처럼 보이나 보네."

남자가 미간을 찡그리더니 빙글빙글 돌리던 술잔을 그대로 입으로 가져갔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뜨거운 기운이 몸 안의 모든 세포를 두드려 깨운 듯 위스키 두 잔에 남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남자가 빈 잔을 들어 눈앞으로 가져갔다.

"내가 술을 좀 마시는 편인데, 이 술은 좀 독하네. 이 술은 이름이 뭐요?"

"손님이 마신 위스키는 로열살루트라고 합니다. 영국 해군에서 귀빈을 맞았을 때 용포를 울려서 환영의 뜻을 표했죠. 국왕의 경우는 21발의 예포를 쏘게 되는데, 이것을 로열살루트라고 합니다."

"아, 그럼 내가 귀빈이고 곧 국왕이 되는 셈이군요."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시원스럽게 웃었다.

"국왕은 한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로서 최고 권력자입니다. 시민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죠. 국왕은 아무나 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한 잔 더하시겠습니까?"

이제 여자는 웃지 않았다. 건조하고 딱딱하게 말했다.

"재밌자고 한 말이요.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라 한 잔 더 마시는 것도 괜찮겠군."

남자는 여자가 따라주는 술을 마시며 물었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주변에 다른 건물들이 보이지는 않고, 술집 뒤로 숲으로 가는 길이 나오는 거 같은데, 어디로 가야 시내로 갈 수 있죠?"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이 건물 뒤로 보이는 숲을 가로질러 나가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을 겁니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어요? 그럼 내가 지금 어디서 왔는지도 알 수 있겠네. 어디서 왔다고 생각해요?"

"손님이 온 길은 하나입니다. 이제 그 길로 다시는 되돌아갈 순 없죠. 숲을 가로지르는 길이 손님에게 주어진 길입니다."

남자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거 참, 모를 소리 하네. 싱거운 소리 할 거면 그만합시다. 술 한 잔 더 마셔도 되겠죠?"

"술을 마시는 건 손님의 자유입니다. 저는 그저 잔에 술을 채울 뿐이죠."

여자는 술병을 들어 남자 앞에 놓인 잔을 채웠다. 남자는 잔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짓다가 말했다.

"술을 마실 자유라...... 오늘부터 나는 어디로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죠. 아주 자유로운 몸이 됐습니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입니다.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하지만, 그 책임을 기만한 죄는 실로 무겁죠. 사람들은 보통 죗값을 치르면 된다고 말하곤 하죠. 죄가 무엇인지 생각해 봤나요?"

남자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잔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지금 나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요? 거참, 세상의 이치를 깨우치신 분이 여기 계셨는데 몰라보고 술만 마시는 실례를 했네."

"죗값을 치른다고 죄가 가지는 본질이 사라질까요? 죄는 죄로써 남아 있는 겁니다. 여기 이 상처처럼 말이죠."

여자는 하얀 와이셔츠의 칼라를 접고 목에 둘렀던 손수건을 풀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여자의 목에는 가로로 길게 검은 선이 그어져 있었는데, 여자의 하얀 피부가 검은 선 때문에 더욱더 도드라져 보였다. 여자의 목을 보는 남자의 초점이 흐려지고 있었다. 빈 술잔 너머 보이는 여자의 표정이 순간 슬퍼 보였지만, 음침한 분위기의 조명 탓인지 술기운이 오른 탓인지 알 수 없었다. 남자가 술잔을 내려놓고 여자의 목을 쓰다듬을 듯 손을 천천히 뻗으며 말했다.

"그 목의 상처는 어떻게 생기게 된 거요......? 흉터로 남기 전에 치료할 수 있을 거예요. 오래된 상처 같지는 않은데. 그나저나 그 목, 많이 아팠겠군."

"흉터를 지운다고 상처받은 마음마저 쉽게 치유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때로는 흉터를 흉터로써 남기고 싶어 하기도 하죠. 상처가 곪아 덧나기도 하겠지만 잊고 싶지 않거나 잊을 수 없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여자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지만 남자는 알아채지 못했다.

"도통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군."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중얼거렸다. 여자는 무표정하게 남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세상을 돌고 도는 법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다른 장소에서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겁니다. 손님이 우연히 이곳을 발견했듯이 말이죠. 오늘 술값은 받지 않겠습니다. 자유롭게 술을 마시다 가시면 됩니다."

여자는 테이블 위에 놓인 손수건을 집어 들고 선반 위에 놓인 술병이 반사하는 조명 밖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그리고 남자는 반쯤 감긴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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