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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scos Aug 10. 2020

우리 딸들은 노력을 안 해

TV에 지겹게 나오는 트로트 프로를 보며 아빠가 말했다. by.청새치

"쟤네들은 저기 나오려고 얼마나 노력했을 거야- 우리 딸들은 노력을 안 해~"


티비를 보는 둥 마는 둥 소파에 기대서 휴대폰을 하고 있던 나의 귀에 별안간 이런 말이 꽂혔다.
배신감과, 서운함이 내 두개골을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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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응원해주질 못할망정, 왜 티비에 나오는 연예인이랑 비교를 하고 있지? 나는 친구네 아빠가, 티비나오는 아저씨가 사장님이고 건물주여도 아빠랑 비교하지 않는데? 아니 그리고 꼭 특별한 사람이 되어야 '노력'한 사람인 건가? 나는 성공할 줄 몰라서 내 가치를 몰라주는 직장에서 아등바등 살고 있나? 아빠는 내가 ‘여자한테는 최고인’ 공무원이 되지 않아서 조바심 나나? 내가 안정적인 직장을 갖지 못해서 결혼 못하고 애 못 낳을까 봐 걱정되나? 그럴 거면 대학은 왜 보냈지? 그럴 거면 왜 나를 낳아서 이 삶을 지탱하게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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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볼 일 없는 직장 다니면서 일상을 굴리느라고 한 그간의 모든 노력들이 부정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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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충분히 노력하고 있었다. 내가 싫어하는 일들 - 아침 일찍 일어나서 머리를 감는 , 회사에 가서 내가 입고  옷과 눈썹 모양과 머리에 대한 평가를 듣는 , 잠시도 쉬지 않는 상사의 TMI 대꾸하는 ,  와중에 질문해오는 후임과   답답이들에 대답하는 , 화장실에서, 탕비실에서 만난 동료에게 안부를 물어야 하고 대답해야 하는 , 점심 메뉴를 제안하는 , 결국은 상사들이 먹고 싶은  먹게 되는 , 먹고 싶지 않은 디저트를 대접받는 , 그리고 대접받았으니 언젠가는 먹고 싶지 않은 디저트에 돈을 내야 하는 ... 어휴



이런 생각들이 한꺼번에 밀려들면서 댐이 터지듯 눈물이 쏟아졌다. 아빠는 너무 당황해서 그냥 한 말이라고 사랑하는 딸한테 어떻게 그러냐고 (이미 그랬지만!) 힘들면 언제든지 회사를 그만두라고 말했다.
맞아, 언젠가 내가 회사 일로 힘들어할 때, 아빠가 똑같은 말을 했었다. 힘들면 회사를 그만둬라, 아빠가 먹여 살릴 수 있다, (=그만두고 공무원 준비해라)


이렇게 바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뽀뽀해주는 아빠를 가진 주제에, 서운하다며 화를 낸 게 되려 미안해졌다.
그런데... 내가 노력이랍시고 한 5년간 방에 처박혀있어도 아빠는 나한테 좋은 아빠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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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웃긴 건 아무도 나한테 이 회사에서 버티라고, 멈추지 말라고 강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퇴사를 두려워한다. 그 이유를 알고 있다. 결정하지 못한 진로 때문이다.

누구는 5살 때부터 트로트를 듣고 자라 간간이 티브이에 나와 상을 타다가 오디션 프로로 '화려한 조명이 나를 감싸는' 삶을 살게 된다. 근데 왜 29살인 나는 아직도 진로를 결정하지 못한 걸까?

잠시 생각해보자.


1.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았다. 이것도 좋아 보이고 저것도 좋아 보여서
2. 하고 싶은 일을 해봤으나 재능이 없어서 포기했다.
3. 최초나 최고가 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4. 돈을 많이 벌고 싶지만 머리 아픈 일, 몸이 힘든 일은 하고 싶지 않다.

5. 준비가 필요한 일에 시간 낭비만 하다 실패해 40대부터 아르바이트만 하고 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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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지난주에 나는 한 사회복지사 친구에게, (언제나 그랬듯이) 나의 커리어에 대한 불안감을 쏟아내며 다른 일을 하고 싶고,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했다.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하는 우리 집 9급 공무원보다 돈도 배로 많이 벌고 오랫동안 할 수 있는 '사짜 직업'을 갖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는 내가 대학생 때 미리 커리어를 정하지 않고 놀았던 것에 비해 내가 지금 얻은 직장이 너무 쉽게 얻어졌고, 일도 평탄하여 아쉬움이 남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사실은 나조차도 내가 노력을 안 한다고 생각해왔던 거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빠의 말에 눈물이 터졌던 이유는... '찔려서' 였던 것 같다.
사실은 나도 뭔가 해내고 싶어요.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어 가계와 사회에 보탬이 되고 싶어요. 우리 딸은 뭔가 할 것 같다는 기대를 충족하고 싶어요. 용돈으로 몇 백씩 턱턱 갖다 주고 집도 사주고 싶어요. 그런데 나는 비리비리한 직장에 몸담으면서 쓸데없는 노력을 하며 힘들다고 투정 부리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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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나를 위로했다. "내가 볼 때 너는 정말로 노력하고 있어, 웃긴 말로 '한국사 10일의 전사'를 한다고 벼락공부를 하고, 유튜브를 하고 싶다고 하는 친구들은 많지만, 진짜로 자격증을 따내고, 유튜브를 지속하는 건 너밖에 없거든"


수많은 사람들이 워홀을 떠나고 대학에 새로 들어가는 29살,
나 말고도 진로를 정하지 못한 -젊지도 늙지도 않은- 것들이 진짜로 마지막 도전을 하는 나이다.
아니 나한테는 이제 도전이 아니라 결정을 해야 하는 때인 것이다.


진짜로 진짜로 이제는 그만 고민하고 진짜로 노력을 하고 싶다. 내가 마지못해 이어나가는 일상과 피하지 못해서 만나는 사람들이 아닌, 하고 싶은 일을 최선을 다하면서 하고 좋은 사람들과 일하며 퇴근 후에 맥주를 마시는, 불안감에 하는 공부가 아니라 취미생활을 마음 놓고 즐기고 싶다.


진짜 노력을 어디에 하면 좋을까?



- 맨날 고민하는 청새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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