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자몽티와 아메리카노
퇴사한 지 이제 곧 90여 일
나는 매주 금요일 퇴사한 회사의 자회사로 출근한다. 참 알다가도 모르는 세상의 이치들. 그래도, 내가 그렇게 일을 못하는 사람은 아니었나 보다, (자회사 팀장님께서 프리랜서 제안을 하셨으니...) 프리랜서 신분이라 오전 10시에서 오후 5시까지 약속한 업무 시간에, 팀장님께서 부탁하신 업무를 완료하고, 퇴사한 회사에서 나와 가장 깊게 교류한 팀장님과 잠시 만나 티타임을 가졌다.
2021년 재무적으로 그리고 사업적으로 여러 가지로 어려웠던 나의 직전 회사. 환경이 안 좋으면 뜻도 보도 못한 상황이 자연스럽게 펼쳐진다. 아무렇지 않게, 서슴없이, 작은 말로 서로서로를 상쳐주고 활키게 된다. 우리 모두 불안정하고 연약한 영혼이라서 그렇다. 식물들도, 영양분이 없으면, 가장 약하거나, 필요 없다고 판단되는 잎들을 먼저 잘라낸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불안정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과 본래 연약한 사람들이 모여 운영되는 조직이라도 우주의 방정식을 비켜나가지는 않는다. 절대.
나와 부대표님 사이의 갈등의 골이 깊어져, 나 스스로 한계치를 느끼고 있었을 때, 부대표님은 이성을 잃고, 모든 직원이 있는 공용 공간에서 참았던 화를 다 쏟아내며 내게 뭐라고 소리, 소리를 질렀다. 분명 뭐라고 말했는데, 그 말은 기억나지 않고, 그 순간의 기억만 가위로 싹둑 잘라낸 것처럼, 내게는 인간적 모멸감이라는 감정만 남긴 채 아무런 기억이 없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인간적인 모멸감
아직 결혼 같은 것은 안 해 봤지만, 행복해지기 위해 결혼이라는 것을 선택한 남자와 여자가 이혼하는 이유는. 성격 차이도 아니고, 농담처럼 거론되는 성적 취향 차이도 아니다. 이혼의 결정적인 이유는 '존중받지 못하다."라는 무시당함의 감정이다. 그것 말고는 딱히 없다. 퇴사라는 자동차의 키가 작동하는 원리도 이혼 사유와 유사하다.
회사의 대부분의 구성원이 있었던, 그 공용 공간에서 엔진이 고장 나 미친 뜻 날뛰는 기관차처럼 울긋불긋하며 검은색과 붉은색처럼 보이는 탁한 연기를 머금은 감정을 담아 내게 소리. 소리 질렀을 때, 내 마음의 유리벽은 와장창 깨졌다. 그리고 나는 그날 부대표님이 내뿜었던 폭음을 모두 삼켜버렸다. 그래서 그럴까? 도무지, 도대체,... "내가 그날 들었던 말들이 무엇이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찐 팀장님과의 티타임 중>
팀장님 : 샤샤, 작년 하반기. 샤샤가 경험한 건 정말 세게 지나간 거예요. 우리 모두 샤샤가 그렇게 퇴사한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렇게 역량 많은 친구를... 두 분 모두 잡지 않았다는 게...
나 : 네, 알아요! (애써 웃음) 그런데, 팀장님! 그때 저는 앞으로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는 상태였어요, 대표님과 마지막 티타임을 가졌을 때, 대표님은... 벼랑 끝에 계셨... 구요. 작년에는 우리 모두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웠어요.
팀장님 : 상처는 흉터로 남아요. 어느 정도 회복된 거 같아요?
나 : 70%. (웃으면서 70%라고 말했지만, 실제로 회복은 70%보다 더 아래일 것이다.) 팀장님, 저 부대표님이 저한테 소리 질렀던, 그날이 사실은 기억이 잘 안 나요? 뭐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뭐라고 말했는지? 전혀 기억이 안 나요! 그 장면만 검은색 어떤 것으로 남아있어요. 누가 가위로 싹둑 잘라낸 것처럼. (아니, 나는 애써, 부대표님과 관련된 모든 기억을 지워나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존재 자체를 지워주리.)
그날.
부대표님의 '회사 천장을 뚫는 언성 대잔치' 사건 다음 날, 나와 가장 깊이 교류한 팀장님의 권유로 연차를 쓰고 집 밖을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심지어 침대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ps. 찐 팀장님과의 티타임 중>
나 : 팀장님 가끔, 그날. 부대표님이 소리 질렀던 시공간으로 갈 때가 있어요. 아무 기억도 없는 검은색 도화지 같은 끔찍이도 모멸적인 기억의 한가운데로 갈 때면, 저는 재빠르게 뒷걸음 치면서... 대표님과 입사 직전 가졌던 티타임 기억을 꺼내보곤 해요.
대표님 뒤로 보이는 회사 풍경을 배경 삼아 요리조리 뜯어보면서, 이 회사를 이끄는 사람의 비전과 기대와 바람과 향기, 이 회사의 비전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우리가 함께 보게 될 변화, 그리고 인류의 확장은 어떤 모습일까? 등 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그리고 이 회사를, 그리고 이 사람(대표님)을 선택하고 가는 것이 맞을까? 에 대한 산술계산을 하고 있었던... 호기심 많은 눈을 바쁘게 굴리고 있었던 그때로...
나는 회사 카페테리아의 간판 메뉴인 '꿀자몽 티'를 먹고 있었고, 대표님은 '아메리카노'를 먹고 있었다.
나 : 팀장님. 저 다음 주에 면접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