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동백아가씨 (1)

by 지구인



요한이 일하는 칵테일바의 사장님은 사십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거칠게 난 턱수염과 건장한 체구의 소유자였다.


선이 가는 편인 요한은 물론이고 날렵한 체구의 진원을 압도하는 체격이었다. 아기자기한 칵테일 잔보다는 두꺼운 웍이나 커다란 식칼이 좀 더 어울려 보일 정도였다.


파마를 한 단발 정도의 머리칼을 뒤로 모아 묶고 흰 셔츠의 소매를 걷은 채 카운터를 열심히 닦고 있던 그는 우리의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요한의 뒤에 나타난 진원을 보고 반색했다.


어어… 이게 누구야!


그가 두꺼운 검은 뿔테 안경 속의 가늘고 작은 눈을 커다랗게 만들며 카운터 밖으로 나왔다. 그가 내민 크고 투박한 손을 두 손으로 공손히 잡으며 진원은 고개를 숙였다.


너무 오랜만이죠. 연락 못 드려 죄송합니다.


아냐아냐… 바쁘면 다 그런 거지 뭐. 이렇게 갑자기 보니 더 반갑네!


목소리도 우렁찬 사장님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진원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의 눈길이 내게 닿았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형님, 제 여자친구… 결혼하기로 한 사람입니다.


진원이 한 팔로 나를 감싸며 나를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안시은이라고 합니다.


아아, 반가워요. 이태숩니다. 드디어 보네요. 결혼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자자, 어서 앉아요. 편한 데로.


사장님은 가게 안쪽의 부스 석을 가리켰으나 진원은 나를 보고 말했다.


일단은 바에 앉았다가 형님 바빠지시거나 하면 옮기는 건 어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하지 않겠어?


사장님이 원래 자리로 돌아가며 말했으나 진원은 웃어 보였다. 진원과 내가 자리잡았으나 요한은 함께 앉지 않고 사장님 쪽으로 갔다.


이야~ 선남선녀가 나란히 앉아 있으니 보기 좋은걸. 오랜만에 눈호강하네. 뭐 줄까? 뭐를 좋아하시나?


제가 할게요.


요한이 카운터 안쪽 다양한 종류의 술병들이 진열된 벽으로 이동하며 말했다. 그는 겉옷을 벗고 허리에 검은색 앞치마를 두른 뒤 손을 씻었다.


최근에 만들어낸 거 있어. …맛있을 거야.


요한은 우리 쪽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어어, 그래. 맛있어. 달콤씁쓸하고, 가볍지 않아. 진원이도 맛 좀 봐. 그리고 시은 씨? 여성분 입맛이 특히 중요해요. 정확한 평가 부탁해요.


네. 근데 제가 잘 몰라서…


괜찮아요, 괜찮아. 다들 잘 몰라요. 나도 아직 잘 모르겠는걸. 자기 입맛에 맞으면 좋고, 아니면 아닌 거죠. 솔직하게 말해줘요.


사장님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잘 모르지만 녀석이 만드는 건 다 맛있긴 하더라고. 재주가 있어.


그럼그럼. 아무리 얼굴이 저래도 술집에서 술맛이 없어서야 되나. 여자들한테 끌려왔다가 나중엔 혼자 오는 남자 손님들도 있어요. 다 요한이 솜씨지. 내가 신세를 엄청 지고 있어요. 요한이에 진원이까지 와주면 금방 건물 세울 수 있을 텐데, 아쉬워 죽겠어.


사장님이 가게 이름을 ‘바 프린스’로 바꾸어야겠다고 했다던 썰렁한 농담이 생각났다. 사장님의 희망사항은 희망으로만 끝나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진원을 다른 여자들과 조금이라도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요한만으로도 이미 벅찼다.


에이, 형님. 저는 운동이나 좀 하지 몸 쓰는 건 영 소질 없다니까요. 음식도, 라면이나 끓일 줄 알지.


공부만 하느라 안 써서 그렇다니까. 머리가 좋은데 뭔들 못하겠어?


사람마다 타고난 재주가 있잖아요. 미적 감각이나 손재주가, 요한이가 워낙 좋은 거죠.


그래그래, 나는 사람 보는 눈을 타고났고 말이지! 물론 처음에는 겉가죽만 보고 밥값은 하겠다 싶어 그런 거였지만.


사장님의 표정이 무언가 요한과의 인연에 사연이 있어 보였다.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이어질 말을 기다렸으나 요한이 오묘한 붉은 빛깔의 술이 담긴 유리잔 두 개를 가지고 돌아왔다. 요한은 말없이 나와 진원 앞에 코스터를 깐 다음 술잔을 놓아주었다. 손놀림이 능숙했고 얼굴에는 자신감이 어렸다. 그의 색다른 모습이었다.


술 이름은 뭐야?


진원이 물었다.


동백아가씨.


요한이 수줍게 대답했다.


그가 스스로 만들어냈다는 칵테일인 것도 신기했고, 그래서 술 이름이 카밀리아도 아닌 옛 노래 제목과 같은 동백아가씨라는 것이 의외였고, 무엇보다 사장님 말처럼 달콤씁쓸하면서 끝맛이 혀끝에 오래 남는 것이 놀라웠다. 그래서 가볍지 않다고 한 것일까.


오, 맛있는데. 지난번 거랑 또 다르네. 어때, 자기야?


음, 좋아. 많이들 좋아할 것 같아.


진심이었다.


진원과 사장님의 칭찬은 헛말이 아닌 것 같았다. 요한에게 애정은커녕 반감이 있고 술을 잘 모르고 좋아하는 편도 아닌 나로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눈썰미가 좋고 섬세한 면이 있는 데다 손재주까지 좋다니.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태도만 아니라면 친구로 지내고 싶을 정도로 매력이 넘치는 남자인 것은 확실했다.


내 칭찬에 요한은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그러나 여전히 내게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또 보자고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가 유독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모습은 나쁘지 않았다. 전에 만났을 때도 이렇게 했다면 좋았을걸. 아니 그날 우리집 앞에 와서 나를 불러내지만 않았어도…


괜히 하는 말은 아니죠? 진원이 친구라고 눈치보지 말고요. 아첨하고 그럴 얼굴은 아니긴 한데. 요즘 아가씨들 답지 않게 단정한 얼굴이에요. 역시 진원이가 안목이 있네.


하하, 그럼요. 제가 얼마나 쫓아다녔는데요.


진원의 말은 과장이었다.


물론 진원이 먼저 데이트하자고 했고 정식으로 사귀자고 고백했고 청혼도 했다. 진원은 첫눈에 내게 반했고 결혼할 여자라고 느꼈다고 여러 번 말했다. 그러나 첫 만남에서 나 역시 그에게 강한 호감을 느꼈으므로 우리의 연애는 순조롭게 시작되었었다. 더구나 본격적으로 사귀게 되면서는 오히려 내가 바쁜 그의 일정과 동선에 맞추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진원의 말은 반 정도만 맞는다.


그러나 진원은 늘 자신이 나를 일방적으로 쫓아다닌 것처럼, 내가 매우 콧대 높게 굴었던 것처럼 사람들 앞에서 말하곤 했다. 그리고 나의 부모님께는 물론이고 자신의 부모님께도 자신이 내게 목 매는 것처럼 강조해서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진취적이지 못한 나로서는 이런 진원의 태도가 내심 기분 좋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동성의 친구들이나 지인들은 진원의 이런 태도를 부러워하고 때로는 질투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슬픔은 나누면 동정을 얻지만 기쁨을 나누면 질시를 받는다.


그래서 나는 나의 이런 행복한 고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배부른 소리일 테니까. 그러니 아마도 요한과의 일 역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그야말로 옥에티 같은 존재일 테니까.


그래, 날은 잡았나?


사장님이 진원과 나를 번갈아보며 물었다.


아직 상견례 전이에요. 빠르면 올가을? 아니면 내년 봄 정도 아닐까 해요.


가을? 얼마 안 남았잖아?


다음 달에 신혼집으로 제가 먼저 들어가거든요. 다른 거야 준비할 거 뭐 어려운 게 있나요. 신혼여행 정도가 문제죠.


그래, 아무리 바쁘더라도 신혼여행은 좋은 데로 꼭 가. 두 번 다시 없으니까. 신부 면사포도 좋은 걸로 씌워주고. 한 살이라도 젊고 예쁠 때 사진도 많이 남겨놓으라고. 늙으면 사진 찍기도 싫어지거든.


에이, 형님이 뭘 늙었다고 그러세요. 백세시대에.


내 나이 돼 봐. 눈도 침침하고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고… 남자들도 갱년기가 있다더만. 그나마 요한이가 같이 살아줘서 고독사 걱정은 안 해도 되니 다행이지. 그래도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요한이도 얼른 좋은 여자 만나야지.


저는 사장님이랑 계속 살 거라니까요. 말했잖아요.


요한이 끼어들었다.


됐어, 이 사람아. 남자 둘이 늙어서까지 그러고 있어봐야 홀애비 냄새만 진동하지. 앞으로 3년, 정히 안 되면 5년 안에는 나가. 안 나가면 내쫓는다. 시은 씨 주변에 시은 씨 같은 참한 아가씨 없어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나는 당황했다. 칵테일을 넘기고 있는 중이었다면 또 사레가 들릴 뻔했다.


요한이 외모 말고 속을 봐줄 수 있는, 심성 착한 여자요. 진원이가 얘기했는지 모르겠지만 놈이 생긴 건 저래 기생오라비 같아 보여도 의외로 성실한 데가 있어요. 내가 못나서 월급은 많이 주지 못해도 씀씀이가 적어서 많지는 않지만 꾸준하게 돈도 모으고 있고. 아 내가 요한이 덕에 빚도 어느 정도 끄고 여기 이렇게 지상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니까요. 다른 가게서 와 달라는 것도 다 거절하고 나한테 붙어 있을 만큼 의리도 있는 놈이고. 솔직히 여자관계가 복잡하긴 한데 그건 오는 여자 굳이 안 막아서 그런 거예요. 아직 한창 때고 제 짝을 못 만나 그런 거니까.


사장님, 그만해요. 곤란해하잖아요.


요한이 사장님의 팔까지 붙잡고 말렸다. 나는 아무 말 못하고 있었다.


사장님은 무섭고 무뚝뚝할 것 같은 외모와는 달리 정과 말이 많다 못해 넘쳐흐르는 사람이었다. 진원과도 요한과도 또 다른 타입이었다. 어떻게 셋이 형님아우하는 사이가 된 것인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진원이 술잔 앞에 놓인 내 두 손 위에 한 손을 얹어 두어 번 토닥인 뒤, 웃으며 사장님한테 말했다.


이제 두 번 만났어요. 앞으로 좀 더 친해지면 그래야죠. 그럼요, 요한이 정도면 여자들 줄 서죠.


아니아니, 속을 봐줄 수 있는 여자여야 한다니까. 지금은 뭐 줄 안 서나? 다 영양가 없는 여자들이니까 하는 말이지. 여자만 뒤웅박 팔자가 아니야. 남자도 마찬가지야.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해. 특히나 우리처럼 부모 복 없는 사람들은 처복이라도 있어야 한다구.


그래요. 말 나왔으니 말인데 사장님이야말로 언제까지 수절할 건데요? 사장님 보내기 전에는 나 절대 안 나가요.


수절, 이란 말에 나는 진원을 보았다. 진원은 내 표정을 보고 알아차린 듯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사별하셨어. 10년 전에.


아.


이혼도 아니고 사별이라니. 게다가 10년 넘게 수절중인 순애보…


‘사람은 겉모습만 봐서는 모른다’는 말을 형상화한 사람을 나는 목도하는 중이었다. 홀애비 냄새 운운한 것을 보면 자식 때문에 홀로 있는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내가 혹시 젊은 나이로 죽으면 진원도 저래줄까. 그래줬으면 하는 마음과 하루라도 빨리 슬픔에서 벗어나 행복해지길 원하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아마 사장님의 죽은 아내도 그렇지 않았을까. 나는 조용히 술잔을 홀짝였다.


돌아간 아내 생각이 나서였는지 귀가 아플 정도였던 사장님의 수다가 뚝 끊겼다. 가게 안에는 크지 않게 켜놓은 경쾌한 재즈음악 소리만 들렸다.


혼자 있지 말라고 했는데 내가 말 안 들으니까… 요한이를 보내줬지.


사장님이 혼잣말하듯 말했다.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으이구 주책. 남자는 나이 들면 눈물이 많아져.


그가 안경 밑으로 눈가를 훔치며 중얼거렸다.


그때 출입구에 매달아놓은 종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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