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오세요.
사장님이 반사적으로 출입구 쪽을 보며 인사했다.
작고 가녀린 체구의, 화장기 없고 수수한 차림의 여자 한 명이 들어왔다. 여자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어, 안녕하세요… 혼자세요? 근데 신분증을…
사장님, 저예요.
누구…?
우리 모두의 시선이 여자에게 쏠렸다.
연주요. 서연주요.
에엥? 연주라고?
전에 봤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화려한 치장을 걷어낸 연주는 이제는 대충 봐도 어려 보였다.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잘 어울렸다. 지난번과 같은 것이 있다면 고가의 크로스백뿐이었다. 머리도 가발이었는지 잘랐는지, 지난번과 달리 가슴 정도까지만 내려오는 생머리였다.
어어, 맞네.
사장님이 연주 쪽으로 다가가 얼굴을 들여다보고는 말했다.
요한 오빠, 안녕하세요.
연주가 요한에게 인사했다. 연주는 지난번과 달리 목소리가 낮고 톤이 일정했다. 차분하다 못해 무감정하게 들릴 정도였다. 그러나 요한은 팔짱을 낀 채 연주를 보기만 했다.
아… 또 보네요. 오빠랑 언니.
연주는 별로 놀라지도 않고 진원과 나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그때 그 연주 씨라고요?
네. 안녕하세요, 오빠.
연주와의 강렬했던 첫 만남이 물이 차오르듯 눈앞에 떠올랐다. 진원도 마찬가지였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걱정 마세요. 지난번 같은 일은 없을 테니까.
연주가 여전히 로봇처럼 말했다.
오빠.
연주가 요한을 보았다. 그제야 요한이 입을 열었다.
그래, 결심했어?
네.
…내가 말한 대로.
네.
정말이지?
네.
여러 번 다짐을 받고 난 후에야 요한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래, 잘 왔어. 친구 데리고 오라니까.
친구 없어요.
뭐 앞으로 사귀면 되지?
사장님이 끼어들었다.
그런 거 필요 없어요. 그냥 좋아하는 사람 만나서 연애하고 사랑하고 결혼할 거예요.
그래. 꼭 그러길 빌게.
요한이 평온히 말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연주 요한이 포기한 거야?
사장님이 놀라 물었다. 나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나랑 약속한 게 있어요. 오빠동생으로 지내기로 했어요.
그래그래, 잘했네. 아직 어린 나이에 또래 남자친구 사귀어야지. 나이에 맞게. 다 늙은 아저씨 만나서 뭐 할 거야?
오빠 아저씨 아니에요.
감정이 약간 실리긴 했지만 여전히 무뚝뚝한 말투였다.
연주에 비하면 아저씨지. 남잔 군대 갔다오면 아저씨야. 잘 생각했어. 잘 됐네.
잠깐 옆에 앉게 해줄래?
요한이 진원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혼자 있어도 돼요.
연주는 다른 자리로 가려고 했다.
그래요. 여기 같이 앉아요.
진원이 일어나 자리를 권했다. 연주는 잠시 망설이다가 내 옆에 앉았다.
우리 곧 갈 거니까 부담갖지 말아요.
왜 벌써 가요?
어, 내일 출근해야 되니 가서 쉬어야지. 연주는… 연주 씨는 어떻게 돼요? 학생이에요? 아니면…
아무것도 안 하기는 좀 그래서 학원에 등록은 했는데.
무슨 학원?
검정고시요. 고등학교 자퇴했거든요. 애들이 따돌려서. 돈으로도 안 되는 게 있더라구요.
순간 정적이 흘렀다. 요한만이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작업대로 이동해 어질러진 것들을 치웠다.
갑작스러운 사연 소개로 상대방을 당황시키는 것은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연주도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것만큼은 요한과 닮아 있었다. 요한의 말대로 둘은 연인보다는 오누이가 더 어울려 보였다.
어어, 그래 뭐 아직 어린데 이제부터 차근차근 하면 되지. 검정고시 따고 대학도 가고. 가서 MT도 가고 미팅도 하고 캠퍼스 커플도 하고. 앞으로 재미나게 살면 된다구!
사장님이 목소리를 더욱 크게 높여 말했다. 가게 안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런 거 관심 없어요.
연주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럼 연주가 관심 있는 건 뭔데?
없어요. 이제 오빠,
연주가 작업대 쪽의 요한을 향해 잠깐 일어서며 말했다.
그냥 오빠로 생각하기로 했다고 그거 말하려고 온 거예요. 이따가는 사람 많아질 거 같아서 좀 일찍 온 건데…
그래, 잘했어.
요한이 흰 타올로 손의 물기를 닦으며 카운터로 돌아와 연주 앞에 섰다.
약속대로 네가 좋아하는 거 만들어 줄게. 먹고 싶은 거 있어?
요한의 말투에서 자상함이 느껴졌다.
오빠 스페셜 메뉴요.
그래. 새로 만들었는데… 기다려봐.
요한은 작업대로 돌아갔다.
언니오빠는 사귄 지 얼마나 됐어요?
연주가 물었다.
3년 정도.
연주의 옆자리에는 내가 앉았으므로 내가 대답했다.
결혼할 거예요?
네.
둘이 잘 어울려요. 지난번에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고마워요.
연주의 말투는 툭툭 내던지듯 했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일종의 수줍음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또 종소리가 울리고 젊은 남녀 커플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사장님과 요한이 동시에 말했다.
아직 근무시간이 아니었는데도 요한은 열심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이었다. 남녀는 안을 둘러보고 안쪽 자리 부스 석에 앉았다. 사장님은 메뉴를 들고 그들에게로 갔다. 그 사이 요한의 제조가 끝났다.
동백아가씨야.
동백아가씨? 무슨 칵테일 이름이 그래.
내가 만든 거니까. 난 영어 못해서.
뭔지 모르지만 촌스러. 사람 이름이에요?
동백꽃 몰라? 빨갛고 동그랗고…
꽃? 장미도 아니고 튤립 뭐 이런 것도 아니고 왜 하필 그거예요. 그리고 아가씨는 또 뭐야? 무슨 뜻으로 그렇게 지었어요?
엄마가 좋아한 노래 제목이야.
그의 입에서 엄마 이야기가 나왔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런 꽃 있다는 것도 난 처음 듣는데.
나 역시 노래를 들어본 적은 있지만 요새 가수들이 리메이크한 것을 들어서 알기만 할 뿐 원곡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다만 우리 부모님 세대에게도 옛날 노래인 것만 알았다. 슬프고 애달픈. 요새 정서로는 청승에 가까울.
엄마가 그 노랠 좋아하는 건 사실 엄마가 아니라 엄마의 엄마가 좋아해서 그런 거라더라.
무슨 노랜데요?
너도 들으면 알 수도 있어. 유명한 노래야. 나중에 찾아서 들어봐.
요한이 진원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말했다.
봐봐. 커플이잖아. 그것도 이렇게 이른 시간에. 여자들만 있는 거 아니라고.
여자가 오자고 해서 왔겠지.
진원이 웃으며 대꾸했다. 또 둘의 티격태격이 시작될 모양이었다.
나 잠깐 화장실 좀.
내가 일어서자 진원이 따라 일어서려 했으나 요한이 나섰다.
괜찮다면 내가 알려줘도 될까? 잠깐 나갔다 와야 돼서.
다시 담배를 피울 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나는 잠깐 진원과 눈을 마주치고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많이 놀랐죠. 어디 다치거나… 아픈 데는 없어요?
가게 출입구를 벗어나자마자 요한이 물었다.
오늘 만나고 요한이 처음으로 내게 건넨 말이었다. 역시 내게 할 말이 있어서 오늘 보자고 한 것 같았다.
정식으로 사과할게요. 그날 내가… 그 전에 무슨 일이 좀 있었는데… 갑자기 나도 억제가 안 돼서 선을 넘었어요. 정말 미안해요. 혹시 원하면 진원이 앞에서 정식으로 다시 한 번 사과할게요. 그런데 시은 씨 생각이 어떨지 몰라서… 진원이한테, 진원이가 알까 봐 이런다고는 생각하지 마요.
요한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일은 저질렀고 수습은 해야겠고 누구에게나 쉽지는 않을 일일 것이다.
나는 크게 숨을 쉬었다.
아니에요. 사과했으니 됐어요. 좋은 일도 아니고…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다시는 그런 일 없어요. 약속해요.
…사과해줘서 고마워요. 앞으로 잘 지내봐요.
요한은 조용히 나를 화장실에 데려다주었다.
화장실은 한 층 내려가야 있었다. 남녀 공용이었지만 깨끗한 편이었다. 그곳에서 나왔을 때 여전히 요한이 있었다. 그새 흡연을 하고 돌아온 것인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분명치 않았다. 나는 잠시 멈칫했다가 먼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우리 함께 보는 자리를 최소한으로 해요.
내 뒤에서 요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게 시은 씨 바라는 거죠? 나 불편하니까…
네. 반가운 얘기네요.
나는 담담히 대답하고 고개를 돌려 요한을 보았다.
근데 오늘 같기만 한다면 괜찮을 거 같아요. 사장님도 좋은 분이고 요한 씨 새로운 모습도 보고… 사실 억지로 온 거였는데 생각보다 좋아요. 오늘처럼만 하면, 진원 씨가 좋아하니까 우리 좀 더 봐도 될 거 같아요. 그 사람 좋아하고 기쁘게 하고 싶은 건 우리 둘이 같잖아요.
…그래요.
요한이 계단을 올라왔다. 우리는 나란히 걸었다. 요한은 내 걸음에 맞춰 천천히 걸었다.
근데 연주 씨는, 대체 뭐라고 했길래 저렇게 180도 달라진 거예요?
시은 씨가 나한테 한 것처럼 차분하게 조곤조곤 얘기했죠.
요한이 피식 웃었다.
물론 협박을 섞었지만… 다행이에요. 말귀 알아들어서. 동생으로는 귀엽죠. 내가 신세진 것도 있고…
아, 그렇게 따로 만들어낼 수 있는 건지 몰랐는데 놀랐어요. 너무 훌륭했어요.
…고마워요.
요한이 다시금 얼굴을 붉혔다.
그에게도 진원처럼 소년같이 천진한 얼굴이 남아 있었다. 그것이 겉보기에는 닮은 구석이 없는 둘을 이어주는 끈 중의 하나인 것일까. 내가 사랑하는 남자와 그가 형제처럼 여기는 남자와의 사연이 다시금 궁금해졌다.
나와 요한이 자리를 비운 짧은 시간 동안에 손님들이 몇 명 더 늘어나 있었다.
가게는 넓지 않았고 화려하지도 않았지만 깔끔했고 사장님은 잘생기지 않았지만 친절했다. 스스로 메뉴를 개발하는 요한만큼은 아니더라도, 사장님도 경력이 오래되었으니 그의 실력 역시 평균 이상일 것이다. 결코 요한의 힘만으로 가게가 굴러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요한과 연주가 전과는 달리 부드러웠고 사장님은 일하는 와중에도 시종일관 유쾌하였으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러는 동안 나는 요한이 만들어준, 그가 개발한 또 다른 메뉴를 한 잔 더 마시고 또 감탄했다. 나는 평소보다 많이 말하고 많이 웃었다.
즐거워해줘서 고마워, 진원이 내 귀에 속삭였을 때 나는 데려와줘서 고마워, 라고 답하고 활짝 웃어 보였다. 진원이 뿌듯해하는 것도 좋았지만 그 시간 자체가 좋았던 것이 훨씬 컸다. 모처럼 무척 즐거웠다. 잔뜩 멋을 낸 젊고 예쁜 여자들이 줄지어 들어오기 시작할 때쯤에야 진원이 말했던 떠날 시간이 다가왔음을 알아챌 정도로.
요한은 능숙하게 손님들을 대했다.
얼굴에 미소는 띠었으나 말이 많지 않았고, 헤프게 웃지도 않았다. 시야가 넓었으며, 움직임은 재빠르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확실히 그의 출근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여자 손님들이 부쩍 늘어났지만, 그의 뛰어난 외모만이 그의 경쟁력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요한이 일을 좋아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이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의 얼굴은 빛이 난다. 적어도 그 순간에 요한의 얼굴에는 그늘이 전혀 없었다. 그는 밤 같고 달이나 별 같기만 한 사람인 줄 알았지만 그에게도 진원처럼 낮 같고 태양 같은 면모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에게서 발견한 의외의 모습들이 모여 나를 혼란시키고 불행하게 만들었음을 알게 된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