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입술을 깨물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십 년 가까이 살아온 오래된 집에서 천장만은 여전히 생활감 없이 순결하므로 나는 내 방에서거나 거실에 있을 때도 자주 그곳에 눈길을 주곤 했다.
진원은 요한에 대해 속시원히 말해주지 않았다.
직접 겪으며 알아가라고는 했지만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진원의 부모님, 특히 어머님이 요한에 대한 말씀을 꺼리는 듯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진원이 요한에 대해 말하자 매우 불편한 기색이셨다.
그에 대해 진원은 사춘기에 들면서 요한과 부모님 사이가 다소 소원해졌다고만 말했다. 양쪽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 요한은 어렸고 외로웠으니 자신은 요한이 안되었다고, 그때부터 요한을 더욱 형제처럼 여기게 된 것 같다고 계속된 나의 추궁에 못 이겨 덧붙였다.
그 순간 진원에게 요한이, 피를 나눈 귀여운 늦둥이 여동생은 물론이고 부모님보다도 소중한 존재일 수 있음을 나는 직감했었다. 그 직감에는 알 수 없는 불안감도 섞여 있었지만 나는 좀처럼 보기 힘든 진원의 착잡한 표정을 보고 더는 캐묻지 않았었다.
그렇게 말로만 듣던 요한을 보게 된 것은 마침내 우리가 결혼을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서로 결혼할 여자만 소개하기로 약속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웃지 못할 사연이 있었다.
제대하고 좀 지나서, 그때 여자친구랑 요한이랑 셋이 만난 적이 있어. 근데 바로 그날밤에 요한이한테 연락이 왔어. 여자친구가 자기한테 대시했다고. 거절하니까 그럼 한 번만 자자고 하더래. 그쪽으로 상당히 적극적인 여자이긴 했는데… 그래서 요한이가 결혼할 여자 아니면 소개하지 말자고 한 거야. 뭐 나를 두고 그럴 여자라면 잘 거르게 된 거니까 난 오히려 고마웠지.
요한을 만나기 직전 진원이 해준 이야기였다.
그렇게 얘기하면서 자기도 반하면 안 돼, 하고 웃으며 말했던 것이었다. 그때 나는 사람을 어떻게 보고 하는 말이냐고 짐짓 화를 냈고 진원은 바로 사과했었다. 그러면서도 그만큼 그가 잘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하지만 나를 믿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농담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나 이전의 여자친구들 중에서는 결혼까지 생각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아예 요한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차라리 요한의 존재조차 알지 못한 그녀들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마침 그때 진원의 메시지가 왔다.
- 몸은 좀 어때? 요한이가 우리 셋 다시 보자고 하는데.
지난번 처음 만난 자리는 연주의 등장으로 난리가 났던 데다가 다시 만나서도 술 한 잔 못하고 헤어졌으니 꼭 제대로 자리를 만들어야겠다는 것이 요한의 강력한 주장이라고 진원은 이어진 통화에서 들뜬 목소리로 전했다. 나는 일정을 살펴보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번에도 요한은 술자리를 원한다고 했지만 나는 되도록 그와의 술자리는 피하고 싶었다.
어두운 밤이 아니라 밝은 낮에 만나고 술이 아니라 밥을 먹어야 요한의 도발이 조금은 덜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적어도 저번처럼 진원이 취하거나 잠들어서 요한과 단 둘이만 있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이미 한 번 겪었으므로, 설령 요한이 또 태클을 걸어오더라도 나 역시 좀 더 여유 있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은 어떻게 거절하더라도, 요한이 싫다고 하면 모를까 어차피 또 만들어질 자리였으므로 나는 피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돌아오는 일요일 낮으로 약속을 잡았다.
시간과 장소도 내가 정했다. 최근에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알게 된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주류라고는 기껏해야 와인이 전부인 곳이었다. 요한은 어떨지 모르지만 진원은 와인을 즐기지 않아 취할 정도로 마시지 않았다. 더구나 일요일이므로 다음날 출근을 생각한다면 더욱. 식사한 뒤에는 근처 카페로 가 커피나 차를 마실 것이고, 그러면 어느새 요한이 출근할 시간이 될 것이므로 나로서는 완벽한 계획이었다.
요한은 흰 티에 청바지를 입고 나온 지난번과 달리 세미 정장 차림으로 나타났다. 두 번째 만남이라 캐주얼하게 입고 나온 내가 약간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말쑥한 차림인 데다 밝은 빛 아래에서 본 요한의 미모는 더욱 빛을 발해서 그에 대한 나의 경계심이 무뎌질 정도였다.
지난번 술집에서처럼 사람들, 아니 여자들이 수군대며 그를 힐끔거렸다. 진원도 이목구비가 뚜렷하였으나 피부는 어두운 축에 속했다. 반면 요한은 하얀 탓으로 멀리서도 더욱 눈에 띄는 미모였다. 술담배를 즐긴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고운 피부라니. 새삼 그의 미모가 감탄스러운 것을 티내지 않기 위해 나는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굳이 다시 보자고 한 것인지, 요한의 태도를 보면 더욱 알기가 어려웠다.
무표정하다 못해 주눅든 것 같은 표정, 진원이 묻는 말에나 겨우 대꾸할 뿐 굳게 다문 입. 나를 무섭게 위협했던 사람과 동일인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원래도 소식하는 편이었다지만 요한은 식사도 먹는둥마는둥하며 물과 음료만 들이켰고 그 탓인지 자리를 자주 비웠다. 그리고 나갔다 하면 돌아오는 데 시간이 걸렸다.
자기가 이해 좀 해줘.
요한이 세 번째로 나갔을 때 진원이 내게 속삭였다.
집돌이에 야행성이다 보니 긴장해서 그래. 더구나 이런 데는 거의 와본 적 없고.
생긴 것만 보면 매일같이 5성급 호텔 레스토랑에서 우아하게 칼질을 즐길 것 같은데 의외였다.
…데이트는 밤에만 하나 봐?
그럴… 걸?
하기야 낮에 돌아다니면 영 귀찮을 일들이 생길 법했다. 그리고 웬만한 미모와 배짱을 갖춘 여자가 아니고서는 그와 함께 있어 주목받는 것을 견디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요한 자신이 술집에서 일하니 굳이 여자를 찾아다녀야 할 필요도 없을 테고. 진원이 낮과 같고 태양 같은 남자라면, 요한은 밤과 같고 달이나 별에 가까운 사람인 것이다.
요한 역시 불편해한다니 나로서도 편치 않은 자리에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한 시간을 겨우 채우고 식당을 나왔다. 오후 2시 정도였다.
요한이 너무 불편해했기 때문에 일단 식당을 나왔지만, 이제 어디를 가야 할지 정해야 했다. 식당에서 두 시간, 아니 못해도 한 시간 반은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완전히 계산착오였다. 내가 친구들과 만났을 때는 무려 두 시간 반이나 있었는데 말이다. 그것도 브레이크타임에 걸려 겨우 일어났었다.
과연 카페에서는 얼마나 있을 수 있을까.
요한이 계속 저렇게 삐걱거리는 로봇 같은 상태라면, 진원이 이야기를 주도하는 것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나서기도 애매했다. 마음 같아서야 어렸을 때 함께 자랐을 때 어땠는지 자세히 묻고 싶긴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요한이 진원의 부모님과 어색해진 이유를 알고 싶었다. 무슨 사연이길래 십 년 가까이 한 집에서 살았다면서 진원의 가족과 만났을 때 요한은 단 한 번도 그 자리에 없었을까.
우리의 결혼 확정 전이야 진원과 요한의 우정어린(?) 약속 때문에 그랬다쳐도, 이후로도 진원의 가족과 식사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진원의 어머니는 서울에서 나고 자란 분이라 친정의 경조사나 동창회 등을 이유로 자주 상경하셨다. 특히 애지중지하는 귀한 늦둥이 딸내미를 올려보낸 후로는 더욱 그러셨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를 불러내셨던 것이다.
다행히 마마보이이기는커녕 오히려 부모님으로부터 꽤나 독립적인 편인 진원과 그의 착한 누이 하랑은 물론이고 눈치빠른 아버님까지 나서주신 덕분에 세 번 중 한 번 정도로 줄일 수는 있었다. 그렇게 했어도 이미 여러 번 어머님과는, 당연히 단 둘이는 아니었지만 - 그랬다간 아마 기절했을 것이다 - 식사해야만 했다. 하랑까지 가족들 다 모인 적은, 진원의 본가에 인사드리러 갔던 것을 제외하더라도 결혼 약속 이후에는 서울에서만 두 번이었다. 나와 요한이 안면을 트기 전이어서 그랬다고만 하기에는 이상한 일이었다.
가게 들렀다 가는 건 어때.
꿀 먹은 벙어리 같았던 요한이 갑자기 입을 열었기 때문에 내 생각은 멈춰졌다.
형이 물어보시더라고. 궁금하다고. …약혼녀.
요한은 나를 보지 않았다. 진원에게만 눈길을 주었다.
아, 맞아. 그럼, 뵈러 가야지. 청첩장 나오면 따로 인사드려야지. 너한테 덜렁 들려보내는 건 예의가 아니지.
그때는 너무 바쁠 때 아니야? 시간났을 때 먼저 인사드리는 것도 괜찮을 거 같은데.
그런가…?
뭐 맘대로 해. 아마 네가 따로 연락드릴 거라고는 했어.
말 나온 김에 괜찮은 거 같긴 한데… 자긴 어때?
…지금? 이 시간에? 아니면…
아, 토일에는 3시 오픈이야. 그러니 오히려 잘됐네. 지금 가면 여유 있게 있을 수 있겠네. 지금 갔다가 5시, 요한이 출근시간에 맞춰 빠지면 되겠다.
다음에 가면 안 될까… 갑작스럽잖아.
예정에도 없이 새로운 사람과 인사한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더구나 지금의 나는 평소보다 약간 나은 수준의, 그래도 수수한 축에 속하는 차림새였다. 그리고 별로 술을 마시고 싶지도 않았다.
갑자기이긴 한데 나쁘지 않은 거 같아서. 뵌 지도 오래됐고. 자기랑 같이 간 적도 없고 나만 가기도 그래서. 따로 셋이 밥 먹은 게, 반년은 지난 거 같은데?
맞아. 서운해하셔.
진짜 죄송하네… 자기야, 나도 사석에서는 형님이라고 부르는 분이라 자기 먼저 안 봬드리고 식장에서 인사하기는 좀 그래. 요한이 말대로 나중에는 여기저기 인사 다니느라 바쁠 거고. 나도 또 언제 바빠질지 알 수 없고. 안 될까?
도무지 내 계획이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날인 것 같았다. 이런 날은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는 것이 나았다.
…그래, 알았어. 또 시간 내기도 애매하니까 그냥 오늘 가요.
고마워, 자기야.
진원이 내 어깨를 한 팔로 끌어안으며 아이같이 좋아했다. 정말이지 요한과 함께 있을 때의 진원은 너무 즉흥적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 물론 이것 역시 요한의 탓이다.
진원의 차로 이동하는 동안, 앞자리에 나란히 앉아서인지 아니면 어색하기 그지없던 자리를 떠나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간다는 즐거움 때문이었는지 요한은 완전히 입이 트였다. 물론 내게 하는 말은 아니었다. 일부러 나를 피해 진원에게만 말하는 것 같았다. 하기야 나와 눈도 못 마주치고 있었다.
나는 또다시 작은 승리감을 느끼며 우쭐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