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뜻밖의 방문 (2)

by 지구인




띠링.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그 앞에 기다리고 있던 요한이 내 팔을 잡아채어 계단실로 끌고 갔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반항은커녕 소리를 낼 수조차 없었다. 나는 벽 한 구석에 요한에게 붙잡혀 세워졌다.


헤어져.


그의 입김에서 희미하게 술냄새가 풍겼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의 몸에서 은은한 장미향이 맡아졌다. 장미향과 내가 알 수 없는 종류의 주향이 섞여 복잡미묘한 향이 그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어지러웠다.


헤어지라고. 너한테 줄 수 없어.


예상한 그대로였다. 요한이 나, 아니 진원의 여자를 질투하는 것. 진원을 빼앗긴다 여긴다는 것.


…어제 얘기했잖아요. 친구 뺏기는 것 같아서 그렇다고.


나는 모자에 의지해 요한의 얼굴을 피하며 죄인처럼 대답했다. 내 시선은 요한의 허리께쯤에 닿아 있었다.


이건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예요. 요한 씨도 결혼하면…


아니야!


요한이 발을 구르며 주먹을 꽉 쥐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흥분한 그가 또다시 폭력을 쓸까 봐 놀랍고 무서웠다.


그런 게 아니야.


그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내가 가진 전부야. 내가 원하는 유일한 사람이야. 누구도 나보다 더 진원일 사랑할 수는 없어…


그는 흐느끼듯 말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의 눈빛과 표정을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요한을 보았다.


그의 눈가는 어느새 붉어져 있었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내 눈과 마주치자 그는 거칠게 손바닥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무슨… 뜻이에요?


나는 등골을 타고 번져오는 불길함을 떨치려 애썼다.


무슨 뜻이냐고!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순간 요한의 한 손이 내 목을 잡았다.


헤어져. 넌 안 돼. 허락 못해.


그가 무섭게 지껄였다.


그대로 나머지 한 손까지 내 목을 조르면 나는 죽는다… 나는 두려워 눈을 감았다. 온몸이 뻣뻣이 굳어갔다.


그러나 요한은 무슨 생각인지 나를 놓더니, 잠시 후 도망치듯 가버렸다. 그의 달려나가는 발소리가 멀어진 다음에야 나는 눈을 떴고 순간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행히 오가는 사람이 없어 다시 몸에 힘이 들어갈 때까지 나는 그곳에서 한숨 돌리며 머물 수 있었다. 그러나 공동현관이 여닫는 소리가 날 때마다 나는 혹시 요한이 돌아왔을까 봐 소름이 끼쳤다. 그래서 바닥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일어서기까지는 힘이 들었지만 막상 일어나고 나니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마침내 계단실에서 탈출했지만 나는 집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혹시라도 요한이 쳐들어올까 봐, 아니면 우리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무서웠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건물 밖으로 나갔다.


바깥공기를 쐬며 심호흡을 하자 비로소 요동치던 심장이 차차 제 박동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는 듯했으나 아직 안심할 수는 없었다. 요한이 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나는 조심히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그는 보이지 않았다.


요한은 그렇게 나의 평화로운 휴일 오후를 들쑤셔놓고 귀신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생각나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나는 공동현관 앞 계단 한 구석에 앉아 진원에게 전화했다. 아직도 손이 떨렸다.


한참만에 진원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응, 자기야.


진원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따뜻함, 익숙함, 그리고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안정감… 진원이 내게 무한히 주는 긍정적인 감정들이었다.


나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울 것 같은 내 상태를 숨기려고 했다.


몸은 좀 어때?


- 괜찮아. 실컷 자고 있는데 뭐.


진원은 늘 괜찮다고 한다. 싫다는 말을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다.


진원에게는 모든 것이 괜찮거나 좋았다. 힘들고 어렵다고 생각하면 정말 더 그렇게 돼버리는 것 같다며, 시련은 이겨낼 수 있을 만큼만 주어지는 것이라며 장로님 아들 티를 냈다. 그러나 세상에는 시련을 이겨내기는커녕 그것에 압도되어 끝내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물론 진원은 그런 것을 모를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에게 많은 것이 주어진 것을 감사해하며 주변에 많이 베풀고자 하는 좋은 사람이었다.


나도 잘 쉬고 있어. …요한 씨 아직 있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진원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안 보이네. 아, 시간이… 출근했나 봐.


진원의 목소리는 약간 잠겨 있었지만 그 외에 평소와 다른 점은 느껴지지 않았다.


요한은 말없이 사라지고 진원은 그러려니 하다가도, 또 굳이 시간을 내어 함께 보내는 것이 둘의 사이인 것이다. 아직 나는 진원과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요한은 마치 쌍둥이와도 같은 절친을 뺏기는 것 같아 내게 적대적이었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진원에게는 이미 요한이 있었고 나는 앞으로도 그와 내 남자를 나누어야 할 것이다. 물론 진원과 내가 결혼하고 아이까지 생기면 요한의 우선순위는 점점 더 뒤로 밀릴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은 아직도 조금은 먼 이야기였다. 요한도 그것을 알기에 내게 떼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방금 전 일이 없었다면 나는 그렇게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의 진원에 대한 애정은 도가 지나쳤다. 그것은 우정이나 우애의 탈을 쓴 독점욕이었다. 나와는 달리 요한은 진원을 타인과 나눌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요한은, 적어도 내게는 위험요소임이 확실했다.


- 이제 좀 살겠네. 녀석이 잘 챙겨주는데 그만큼 잔소리도 많아서. 어머니보다 심하다니까.


진원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콩나물국밥을 직접 끓여서 먹이는 사람이 바로 요한이었다. 함께 보낸 시간의 두께를 따져도 내가 진원에게 해준 것보다 그가 진원에게 해준 것이 더 많았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내가 진원과 함께 살기 전까지는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분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근데 밖이야? 소리가 들려.


응. 잠깐 나왔어. 편의점 가려고.


- 응. 나는 며칠은 안 가도 되겠어. 요한이가 먹을 거 잔뜩 사다놨어.


그가 눈썰미가 좋고 생각도 못한 배려를 보여주는 사람이라는 것은 짧은 만남에서도 알 수 있었다.


반감이 있는 나에게조차 챙겨줄 것은 꼼꼼하게도 챙겨주는 자신에 비해, 약혼녀인 나는 피곤해하는 진원을 내버려둔 채 혼자 맘 편히 쉬고 있던 것이 갑자기 참을 수 없을 만큼 못마땅했던 것일까. 그렇다치더라도 그것이 연락도 없이 내 집 앞으로 달려와 위협할 만큼 큰일일까. 무엇이 그를 폭발시킨 것인지 지금의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는 진원과는 너무도 다른 유형의 사람이었다. 나는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확실한 것은 그가 불안정하다는 것뿐이었다. 적어도 진원과 나 사이에서의 그의 모습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다면 진원이 나에게 아무런 경고도 없이 소개했을까. 요한의 널뛰는 태도를 진원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맞을 것이다. 하기야 연주에 대해서도 진원은 아는 게 거의 없었던 것 같았다.


어쩌면 진원은 요한에 대해 아는 것이 생각보다 적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 시은아?


진원의 목소리에 나는 생각의 흐름을 놓쳤다.


응.


- 미안한데 나 또 졸리다… 이따 전화해도 될까?


졸음이 가득 찬 목소리였다.


그래. 어서 자.


나는 통화종료 버튼을 누르고 전화기를 손에 든 채로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진원에게 잘못 말했다. 아니, 지금 잘 때가 아니야. 자기 친구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말했어야 했다.


나는 다시 통화버튼을 누르려다 말았다. 바쁘거나 급한 일이 없는데 진원이 먼저 전화를 끊자고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모처럼 푹 쉬고 있는 그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을 가라앉히지는 못했으므로 나는 좀 더 바깥바람을 쐬기로 했다. 천천히 동네 한 바퀴를 산책하고 나면 괜찮아질 것 같았다. 드물게 하늘이 높고 푸르렀고 초록의 나뭇잎들이 햇살에 반짝였다.


나는 천천히 집 근처에 있는 작은 공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날씨 좋은 휴일 오후였으므로 거리에는 꽤 사람들이 많았다. 공원의 사람들은 거의 커플 아니면 가족 단위였다. 혼자인 사람은 반려견을 산책시키거나 운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멍하니 사람들에게 시선을 두고 아무 생각 없이 걸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자전거가 나타나 아슬아슬하게 나를 피해서 지나갔다. 나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넓지 않은 곳에 사람도 많은데 속력을 줄이지 않은 자전거 운전자의 잘못이 컸지만 나 역시 너무 무방비했다.


순간 다시 진원이 떠올랐다.


그와 함께 있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길가에 바짝 붙어 걷도록 진원이 나를 이끌었을 테니까. 설령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해도 진원은 나를 보호했을 것이다. 내 옆에 그가 없는 것이 갑자기 견딜 수 없어졌다.


나는 집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뛰어갔다. 진원에게 다녀올 결심이었다. 진원이 잠에서 깨어 나를 안을 수 있다면 더 좋고, 곤하게 잠들어 깰 수 없다면 그저 그의 곁에 잠깐 머물다 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급한 마음에 빠르게 샤워를 하고 머리를 대충 말린 후 위아래 한 세트로 속옷을 맞춰 입었지만 겉옷은 전날 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로션 위에 선블록만 재빨리 펴 바르고 나는 운동화를 신고 급히 집을 나섰다.


내가 아는 진원은 나의 깜짝방문을 뛸 듯이 기뻐할 것이 틀림없었지만, 만에 하나 그렇지 않다 해도 별로 상관없었다. 전날 밤 진원이 말했듯 이제는 그저 연인을 넘어 결혼할 상대였다. 나는 미래의 아내로서 미래의 남편이 보고 싶어 찾아가는 것이다.


진원의 집에서 함께 밤을 보낸 것이 한두 번도 아니고 출입카드를 받아놓은 지도 이미 1년이 넘었다. 더구나 진원은 결혼을 약속한 이상 하루빨리 살림을 합치고 싶어 했으나 내가 부모님을 방패막이 삼아 거절해 오던 참이었다. 당연히 보수적인 내 부모님이 허락할 확률은 극히 희박했다. 그의 오피스텔이 넓고 쾌적한 편이긴 해도 원룸형인 점도 불편했다. 같은 이유로 나는 애초에 진원이 아니더라도 남자친구와 호텔이나 모텔에 가는 것도 꺼리는 편이었다.


버스 정류장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외출하기에는 다소 늦은 시간대였다. 버스 안도 붐비지 않았다.


진원에 대한 그리움과 그의 반응에 대한 기대, 그리고 처음 저지르는 일종의 일탈에서 오는 설렘과 약간의 긴장감을 나는 동시에 느꼈다. 나는 차창 쪽 자리에 앉아 창밖 풍경이 1초라도 빨리 내 시야에서 뒤로 멀어져 가기를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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