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뜻밖의 방문 (1)

by 지구인




요한이 다시금 자리를 비우자 나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가 아무 대응이 없었던 것이 나를 더 긴장하게 만들었던 탓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진원을 보았다. 잠든 진원의 고개가 아무렇게나 꺾여져 있었다.


가족을 제외하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두 사람을 마침내 서로 만나게 해준다고, 셋이 함께 만나서 다같이 친해지고, 나중에는 요한의 아내 될 여자까지 같이 잘 지내는 게 꿈이라고 했는데. 그건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아… 나는 진원의 고개를 내 한쪽 어깨에 받치며 중얼거렸다.


다시 밤바람이 불었다.


이번에는 담배 냄새도 같이 불어왔다. 요한은 아까처럼 우리 쪽에 시선을 두고 흡연하고 있었다. 진원이 깨어나면 어떻게 할지를 다시 생각하려 할 때 진원의 한 팔이 내 어깨 위로 올라오며 내 목과 얼굴을 감쌌다. 그는 그렇게 나를 안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죽겠다…


진원은 좀처럼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체력이 좋았고 참을성도 강했으며, 무엇보다 나를 걱정시키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절로 나오는 말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내 목에 두른 진원의 팔을 토닥였다.


얼른 가서 쉬어. 술은 더 마시지 말고.


진원이 나를 안은 손을 풀고 기지개를 크게 켰다.


술은 아까 깼어. 오랜만에 소맥으로 달렸더니 갑자기 확 취하더라고. 이젠 괜찮아.


확실히 진원의 발음 상태가 평소처럼 돌아와 있었다. 목과 어깨를 움직여 굳은 몸을 푸는 모습도 평소와 다름없었다. 나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래도 덕분에 이렇게 자기 다시 보고, 좋은데.


나도 좋아.


으응? 이야, 앞으로 더 많이 취해야겠네. 우리 시은이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나올지 보게. 아, 이젠 그냥 남친 아니라 예비 남편이라고 좀 더 대접해주는 건가?


진원이 웃으며 말했다.


천진한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나는 조금 슬퍼졌다. 형제 같은 절친이 자신과 결혼을 약속한 여자를 달가워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꿈에라도 생각해본 적 없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래서 요한과 내가 짧지만 날선 대면을 했다는 것을 결코 말할 수 없기에, 앞으로도 그저 요한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핑계를 대어 그와의 자리를 최대한 피해보려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을 것이기에 슬펐다. 그러나 이미 여러 번 다짐했듯, 형을 몹시 따르는 어린 아우의 투정이라 생각하면, 진원을 위해 그 정도는 노력해봐야 할 것이다.


그럴지도. 근데 자주 그러면 나 바가지 긁을 거야.


네에, 알겠습니다~


진원이 경례까지 붙이며 장난스레 대답했다. 그때 요한이 자리로 돌아왔다.


그만 가자.


음… 먼저 가 있어. 시은이 바래다주고 갈게.


술맛 다 떨어졌다. 주인도 없는 집에서 혼자서 뭐해.


그럼 같이 갈래?


누가 안 좋아할 거 같은데.


요한이 나에게 시선도 주지 않으면서 또다시 나를 도발했다. 나는 요한에게 눈을 고정시킨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야 영광이죠. 이렇게 미인인 분이 에스코트해주시면. 근데 가까이는 오지 마세요. 제가 너무 비교되네요.


나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명랑하게 말했다. 진원이 웃으며 따라 일어났다.


미인? 크크, 뭐 미남미녀 모두 미인이긴 하니까. 저 얼굴은 미인 맞지.


왜 모델이나 연예인 안 했어요?


그런 데 관심없어. 거기다 지독한 집돌이. 아, 그건 자기랑 비슷하네. 그거랑 만화 좋아하는 거. 아, 그건 우리 셋 다겠네. 다음엔 만화카페서 볼까.


역시나 진원은 셋이 다 함께 즐겁게 지내기를 바라는 것이 분명했다. 날이 좋을 때는 캠핑이나 낚시, 여름에는 물놀이를 하자고 하고 겨울에는 스키를 타자고 하겠지.


아 정말? 재밌겠다.


나는 여전히 목소리를 높여 신이 난 척했다. 요한이 마치 내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피식 웃는 것을 나는 못 본 척했다.


주소가 어떻게 돼요?


요한이 내게 물었다. 예상치 못한 물음이었다.


에스코트, 할 거면 확실히 해드려야지.


그래라. XXX로 365. XX동.


다시금 두 남자의 작당이 시작된 것 같았다. 하지만 아까처럼 셋이 방 잡고 술 먹자는 것도 아니니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고맙습니다.


나는 일부러 고개까지 숙이며 인사했다. 요한은 뭘요, 라고 대답하며 의자에 앉았다. 나도 서 있기 어정쩡해서 자리에 앉으려는데 진원은 걸음을 옮겨 우리의 자리를 벗어났다.


화장실. 빨리 갔다올게.


급했는지 진원은 빠르게 어딘가로 뛰어갔다. 내가 쫓아갈 새도 없었다. 그저 진원의 말마따나 빨리 돌아오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화장실 어딘지 알려줘요?


요한이 전화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괜찮아요.


나 역시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미안해요.


그가 말했다.


내가 심했어요.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좋은 사람인 진원이 아끼는 만큼 그에게도 좋은 점들이 있을 것이다.


오늘만 해도 술집에서 내 가방을 챙겨준다거나, 말하지 않았는데 내가 추울까 봐 신경써준다거나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다만 처연한 미모 때문은 아닌, 무언가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느낌이 그에게는 분명 있었다. 그것이 나를 긴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대신 나는 나 스스로의 다짐을 말했다.


…진원 씨 만난 거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난 행운을 당연시 여기는 사람은 아니에요. 많이 부족하지만 노력하고 있어요.


요한이 나를 빤히 보았다.


아까보다 지금이 훨씬 나아요. 어울려요.


요한이 위아래로 나를 눈짓하는 것을 보고서야 옷차림을 뜻한다는 것을 알았다.


맞아요. 이게 편해요.


화장도 평소에 별로 안 하죠? 티나요. 스무 살짜리보다도 못하면 어떡해. 아, 이것도 선 넘는 건가.


간당간당해요.


내가 어금니를 앙 다물며 대답했다. 그는 또 피식 웃었다.


너무 발끈하지 마요. 더 놀리고 싶어지니까.


내가 말문이 막혀 어버버하는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전화기로 눈을 돌렸다.


안 잡히네. 아무래도 직접 나가봐야 될 거 같은데. 안 추워요?


아. 네, 괜찮아요…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옆에 진원의 온기가 없어지니 약간 으슬으슬했지만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요한이 사다준 꿀물 음료는 더 이상 온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 어차피 진원이 올 때까지는 기다려야 했으므로 이번에는 내가 말을 걸었다.


아까는 어떻게 했어요?


요한이 나를 보았다.


아까 그 여자… 연주?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아, 일단은 달래서 돌려보냈죠. 봐서 알겠지만 중2병도 아니고 딱 초딩 수준이에요. 하랑이하고 어쩜 그리 다른지.


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랑은 진원의 여동생 이름이다. 독실한 교인인 진원의 어머니가 장남에게는 감히 지어주지 못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뜻의 이름이라고 했다.


어려서는 같이 지냈다고 들었으니 요한도 하랑을 잘 알 것이다. 하랑은 진원과 요한, 나이 차 많이 나는 두 오빠의 애정을 한몸에 받으며 자랐을 것이다. 세 살 어린 남동생 하나만 있고 왕래가 잦은 친척오빠나 언니도 없는 나로서는 부러운 일이었다. 그나마 하나 있는 동생은 지방에 있었다.


잡혔어?


진원이 뛰어오며 물었다.


아니. 대로변으로 나가봐야 할 거 같은데.


요한이 대답했다.


그래. 나가자.


진원이 내민 손을 잡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셋은 편의점을 벗어나 도심의 골목길을 나란히 걸었다. 공기는 다소 차가웠지만 상쾌했다. 삼일연휴가 시작되는 첫날의 늦은 밤거리가 흥청거렸다.


대로변에서도 택시는 쉽게 잡히지 않았으나 어쨌든 무사히 나는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함께 내리려는 진원을 말리고 차에서 내릴 때 나는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다. 차 안에서도 요한이 혹시 쓸데없는 말을 할까 봐 신경이 곤두서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행히 요한은 별말이 없었고, 덕분에 우여곡절 많았던 하루였지만 마무리는 나쁘지 않음을 나는 감사히 여겼다.


그러나 그 감사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진원은 두 달 넘게 계속된 야근과 휴일근무에 쌓였던 피로가 생각보다 컸던지 다음날 좀처럼 일어나지 못했다. 정오가 다 되어 밥 먹으라는 요한의 성화에 겨우 일어났고 그가 끓여준 콩나물국밥을 먹은 뒤에는 다시 또 잠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요한에게 진원을 맡겨놓고 나는 걱정을 덜고 푹 쉴 수 있었다.


나 역시 하루종일 잠옷차림으로 침대와 거실 소파를 오가며 열심히 뒹굴거렸다. 그동안 참아왔던 군것질과 함께 OTT에서 즐겨보던 드라마의 새로운 시즌을 정주행할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이번 연휴에 엄마는 오랜 조율 끝에 마침내 여고 동창생들과 여행을 갔고, 아버지는 따로 지리산 등반을 떠났으므로 집은 온전히 내 차지였다. 좀처럼 없는 기회였다.


몇 편이나 보았을까. 전화가 울렸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무시했는데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같은 번호였다.


그렇게 세 번 연속 전화가 오고 나서는 메시지가 왔다.


- 잠깐 나와봐요. 할 말 있어요.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요한임이 틀림없었다.


내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데 다시 전화기가 울렸다. 나는 오후 3시가 넘도록 말 한 마디 하지 않아 잠겨 있는 목을 풀고 전화를 받았다.


…무슨 할 말이요?


- 얼굴 보고 해야 할 얘기예요.


그 사람도 알아요? 요한 씨 이러는 거.


- 내가 올라가? 몇 층인지 알아.


낮은 목소리로 내뱉는 반말이 매우 위협적이었다. 나는 등골이 서늘했다. 어젯밤 우리집 주소를 물어오던 요한의 모습이 떠올랐다. 설마 이럴 계획이었단 말인가.


어쩌면 그저 나를 내려오게 하려고 하는 말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정말이든 아니든 어쨌든 지금 그의 기세로 보아서는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 같았고 아마도 크게 말싸움을 해야 할 것 같았으므로 나는 나가기로 했다.


…10분, 아니 5분만 기다려요.


요한은 대답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욕설이 튀어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나는 집앞에 잠깐 나갈 때 입는 트랙슈트로 갈아입고 볼캡을 눌러썼다. 과자를 집어먹고 있었으므로 빠르게 양치질을 했다. 아침 늦게 일어나서 로션만 찍어 발랐던 얼굴에는 립글로스만 대충 칠한 뒤 현관에서 운동화를 신었다.


진원에게도 몇 번 보여준 적 없는 편안한 복장의 내 모습을 요한과 만난 다음날 바로 보여주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단 둘이 만나서.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집앞까지 쫓아온 걸까.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하더니 이건 또 무슨 일인지… 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초 단위로 바뀌는 숫자를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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