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세 번째 질문

by 지구인



그럼 당연하지. 결혼도 안 했는데 그런 수발을 어떻게 시키냐. 아니아니, 결혼하면 더 소중한 마눌님이 되는 건데 감히 어떻게. 앞으로도 주욱, 너 시킬 건데?


진원이 부정확한 발음과 일정치 않은 목소리 톤이지만 요한에게 지지 않고 대꾸했다.


뭐 큰일이라고. 그 정돈 나도 할 수 있어.


고작 딸기우유를 사다 빨대를 꽂아 건네주는 일이라면, 굳이 연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원수 같은 사이만 아니라면 충분히 해줄 수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정말 뻗어버리기라도 해서 힘겹게 뒹굴려 가며 옷을 벗겨주어야 한다거나, 아무 데나 토해놓거나 실수로 일을 보아서 치워야 한다거나 하는 일을 진원이 저지를 거라 생각하기는 쉽지 않았다.


다만 앞으로 몇 번은 진원이 마음 놓고 취하는 모습을 직접 봐야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취중진담이라고, 만취했을 때의 진원에게도 내가 모르는 모습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도 술이 셌다면 진작에 볼 수 있었을 텐데. 순간 요한이 조금은 부러웠다.


딸기우유 사다주려고 옷까지 갈아입고 왔어요? 뭐 업고 달려도 되겠네.


요한이 놀리듯 말했다.


어, 정말이네.


진원이 그제야 알아차린 듯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눈빛으로 나를 위아래로 보았다.


특별한 날 아니면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어서 진원은 은근히 내가 아까처럼 꾸미길 바라는 눈치였다. 먼저 그렇게 해 달라고 한 적은 없었지만 내가 말도 없이 그렇게 하고 나타나면, 특히 치마를 입고 힐을 신으면 좋아하는 모습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다녀야 하는 처지에 매일같이 그런 차림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 진원이 전에 사귀었던 여자친구들과는 달리, 나란 여자는 원래부터도 화장이나 머리손질에는 재주도 관심도 없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데는, 평소처럼 입술이나 바르고 편한 바지에 로퍼를 신고 있던 나를 처음 본 자리에서 반했다는 진원의 말에도 불구하고, 꽤 시간이 걸렸었다.


원래 자기로 돌아왔네.


아직 공들여 한 눈화장 등은 남아 있었을 테지만 평소에도 눈썰미가 좋은 편은 아닌 진원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앞에서 감히 대놓고 아쉬워하는 것으로 보아 정신줄을 꽤 놓은 상태라는 것도 나는 다시 한 번 느꼈다.


그래서, 싫어?


으응? 처음 만났을 때도 이랬는데 뭐. 그래도 난 첫눈에 반했다니까요, 안시은 씨!


진원이 술기운 때문인지 뜨끔해서인지 내게 입술을 들이댔다. 내가 막기도 전에 요한이 진원이 앉은 의자에 발길질을 했다. 진원이 의자 채로 들썩거렸다.


야, 둘만 있을 때 해라 응? 눈꼴시려 죽겠네.


에이, 눈치없이 끼어들긴! 생각이 있으면 저어쪽으로 좀 가 있어라!


그니까 난 빠져준댔잖아. 괜히 못 가게 붙잡아놓고는.


그러나 요한은 몸을 움직이지는 않았다. 이제 와서 혼자 갈 생각은 없는 듯했다. 남은 음료를 빈 빨대소리가 나도록 마시고 난 그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아, 오늘밤은 정말 시원한데. 미세먼지도 없고.


요한의 말대로였다.


어제까지 며칠 동안 장마도 아닌데 비가 꽤 내렸었다. 더구나 주말에 날씨가 맑은 것도 오랜만이었다. 피크닉을 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차라리 요한을 낮에 보았더라면 야외자리가 있는 곳에서 느긋하게 식사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밥보다는 술을 좋아하고, 그렇다고 안주를 챙겨먹는 타입도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마른 편이었다. 축구나 농구 등 격렬한 운동을 좋아해 군살이 없는 진원에 비해서도 몸이 가늘었다. 그러나 어깨너비는 둘이 비슷해 보였다. 그래서 결코 왜소해 보이지는 않는, 사람들이 말하는 ‘축복 받은 체형’이었다.


그만 가자.


틈만 나면 요한의 외모 품평을 하기 바쁜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 아니 혐오감을 떨치기 위해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어어, 조금만 더 있자. 아직 차 타기는 좀 그래.


진원이 조금 전보다 훨씬 정상에 가까워진 발음으로 말했다. 딸기우유와 밤바람 덕분에 술기운이 많이 가신 모양이었다.


나는 일어선 채로 고민했다.


조금 더 있으면 요한 없이 진원과 둘만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집 앞까지 요한과 함께 가기는 싫었다. 아니면 아예 요한을 떼어놓고 진원의 오피스텔로 가버릴까.


나를 보내고 나서 진원과 요한 둘이서 진원의 집으로 가 편하게 술을 마시고 자기로 한 계획은 오늘 만남 전에 이미 들었다. 그러나 내가 진원과 있겠다고 하면 요한은 물러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외박할 준비는 전혀 안 되어있었지만 요한을 조금이라도 덜 보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아니면 시은아, 요한이랑 셋이 한 잔 더 하면 안 될까? 그랬으면 좋겠는데에.


시간이 애매하네. 네 집으로 가든지, 아님 방을 잡는 게 나을 거 같은데.


그런가?


뭐가 그런가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 남자 둘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작당을 하고 있는 것인가. 까마귀 노는 데 백조야 놀지 말라더니, 요한과 함께 있을 때의 진원은 평소와 달랐다. 신중하고 반듯하며 부드러운 모습 대신 들뜨고 짓궂은, 철딱서니 없는 것이 밉상맞은 절친과 닮아 있었다.


나 그만 갈래.


나는 가방을 챙겨들고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그러나 진원에게 팔을 붙들렸다.


가지 마. 잘못했어.


진원이 앉은 채로 나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가지 마, 응?


진원이 내 등에 얼굴을 묻은 채 말했다.


나는 진원에게 붙들린 채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리를 보던 요한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곧 시선을 탁자 위로 돌리며 자신과 진원의 다 마신 우유팩을 챙겨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좀 봐줘요. 시은 씨 너무 좋아해서 그런 거니까.


요한은 우유팩을 버리려는 듯 편의점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알았으니 이거 놔.


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말하려 애썼다. 진원의 손이 풀리자 나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자기 오늘 이상한 거 알아? 취해서만은 아니야. 아까 술집에서부터 이상했어. 내가 아는 자기가 아닌 것 같다고.


진원은 고개를 떨군 채 대답이 없었다. 나는 혹시라도 요한이 돌아와 엿들을까 봐 진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 사람… 장요한 씨 때문이잖아. 나 불편해.


이렇게 빨리 요한이 싫다는 말을 진원에게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불편하다, 정도는 말해두어야 앞으로 그를 마주칠 일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진원이 내가 불편한 상황을 일부러 만들지는 않을 테니까. 진원이 화들짝 놀라며 어쩔 줄 몰라하거나 서운해할 줄 알았는데,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자기야.


진원을 살짝 흔들었으나 그의 얼굴은 계속 바닥을 향해 있었다. 좀 더 세게 흔들자 진원이 으응, 하며 몸을 틀어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대었다. 두 눈이 감겨 있었다. 그 사이 또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난감했다.


더 마시긴 다 틀렸네.


요한이 또 무엇을 사왔는지 손에 든 비닐봉지가 묵직해 보였다.


그 역시 진원을 흔들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술은 거의 깨어가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일 때문에 그동안 부족했던 잠이 요한과의 술자리를 빌어 한꺼번에 몰려온 모양이었다. 잠에 곯아떨어진 진원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저런 자세로 오래는 못 잘 테니 좀만 있어봐요.


요한이 비닐에서 음료를 꺼내 내 앞에 놓았다. 따뜻한 꿀물 음료였다.


마시든가, 아님 안고 있어요. 옷, 추울 수도 있겠는데.


과연 급히 나오다 보니 평소 챙겨입던 카디건을 미처 챙기지 못한 상태였다. 아직까지는 괜찮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제법 쌀쌀해질 법한 날씨였다.


나는 음료가 든 유리병을 양손으로 감싸안았다. 방금 사와서 따뜻하다 못해 약간 뜨거웠다. 가시 돋친 말은 툭툭 내뱉으면서 송곳 같은 눈썰미로 챙겨줄 것은 챙겨주는 남자. 정말이지 알 수 없는 속을 지닌 이 아름다운 남자가 내 남자의 형제 같은 친구였다. 가시가 제거되지 않고 그대로 돋친, 향내 짙은 장미 같은 남자가 바로 그였다.


왜 대답 안 해요?


요한이 입을 열었다.


내가 물어본 거, 아까 화장실 앞에서. 두 번이나 물었는데.


세 번이죠.


내가 음료수병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세 번째는 좀 다르긴 했지만.


…그럼 이제 네 번째라 치고, 대답해 봐요.


대체 왜 그러는 건데요? 그게 왜 궁금하죠?


자신 없으니까.


갑자기 요한이 쏘아붙이듯 말했다.


진원이만큼 사랑한단 자신 없으니까. 그러니까 답하지 못하는 거지. 아냐?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옆자리의 진원을 보았다. 아직은 곤히 잠든 것 같았다. 나는 잠든 진원의 무방비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쪽은 그냥 내가 싫은 거예요. 이 사람이 나한테 아까워서 트집 잡고 싶은 거죠. 결혼한다니까 친구 뺏기는 것 같아서 서운하기도 할 테고.


나는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말한 뒤 다시 요한을 보았다.


하지만 진정한 친구라면 친구의 행복을 빌어줘야겠죠. 나를 인정하고 존중하세요. 더는 선 넘지 말아요.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는 않았다.


나의 예비 시부모님과 예비 시누이는 모두 좋은 분들이고 속으로야 어쨌든 겉으로는 나를 두 팔 벌려 반겨주셨다. 절친 하나가 그렇지 않다고 해서 속 좁게 굴고 싶지는 않았다.


요한과 나는 그냥 진원을 소중히 여기고 소중히 여김을 받는 사람들이라는 유일한 공통점에 기대어 그 공통분모인 진원이 서운하지 않을 정도로만, 최소한의 할 도리와 예의만 지키면 될 것이었다. 설마 진원의 절친이라는 사람이, 10년 가까이 한 식구로 지내기까지 했다는데 앞으로도 계속 유치하게 굴어서 진원을 약혼녀와 절친 사이에서 곤란하게 만들지는 않겠지.


무엇보다 시간이 흐르면, 또 요한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나아가 반려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그래, 연주 같은 여자애만 안 만나면. 좋은 여자를 만나야 할 텐데. 나는 순식간에 어린 시동생을 걱정하는 후덕한 형수 같은 마음으로 요한에게 측은지심까지 느꼈다.


요한은 내 경고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순순히 내 말에 수긍하고 사과라도 할 것이었다면 애초에 그렇게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또 다른 공격이나 반격도 하지 않은 것을 나는 다행으로 여겼다.


요한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도 하였으나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편의점을 드나드는 사람들, 거리를 오고가는 사람들과 차량이 만들어내는 소음들만이 우리의 귀를 채웠다.


이윽고 그는 다시 담배를 피우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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