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말을 섞고 있어. 얼른 가라니까! 시은 씨 옷도 젖었잖아.
더 이상 두고보지 못하겠던지 요한이 우리 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리고 말해두는데, 사귄 거 아니야. 몇 번 만났는데 얘가 여친이라고 하고 다니는 거야. 미치겠다… 여긴 또 어떻게 알고 쫓아온 거야?
다 방법이 있지!
연주가 휴대폰을 흔들어 보였다. 요한 몰래 위치추적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너 이러는 거 스토킹이야. 불법인 거 몰라?
오빠가 자꾸 나 피하니까 그렇지. 그냥 순순히 만나주면 내가 왜 이래?
난 어린애 싫다니까. 동생 같아서 그동안 봐준 건데 더는 못하겠다.
내가 왜 어린애야? 나도 성인인데!
뭐 해, 빨리 택시 불러! 아니면 차라리 큰 길가로 나가. 그게 더 빠를 거야.
요한이 연주의 말을 무시하고 진원에게 말했다.
어, 어… 그래.
요한의 호통에 진원이 다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여기서 인사할게요. 다음에 봐요. 먼저 간다.
요한이 우리에게서 돌아서서 발걸음을 옮겼다. 진원과 내가 미처 인사를 할 틈도 없었다.
오빠!
연주가 황급히 요한을 쫓아갔다.
연주가 요한의 팔을 잡았으나 그는 뿌리쳤고 연주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걸어갔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빠르게 걸어가는 요한을 놓치지 않으려 연주는 종종걸음으로 뛰다시피 쫓아갔다. 예상대로 연주는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있었는데도 잘만 뛰었다.
그들은 어둑어둑해진 밤하늘과 대비되는 불 밝은 유흥가의 붐비는 사람들 속으로 사라져 갔다.
괜찮을까?
…일단 자긴 집에 가자. 일부러 자리 피한 거 같다.
내 물음에 대한 답을 하는 대신 진원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휴대폰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운 좋게도 택시가 바로 잡혔다.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진원의 얼굴을 살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습관처럼 입꼬리를 올렸지만 요한 걱정에 초조해하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나 혼자 갈게. 자기는 그 사람 챙겨줘.
내가 진원의 팔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
자기 절친 만난다고 모처럼 꾸민다고 꾸민 것부터, 아까 그 난리까지… 너무 피곤하다. 나 그냥 편하게 차에서 눈 감고 쉬고 싶어. 자기 어차피 다시 이쪽으로 돌아올 거잖아. 뭐 하러 왔다갔다 돈 쓰고 시간 버리고… 그러지 마.
그래도…
내 말대로 해줘, 응?
곤란해하는 진원의 얼굴에 나는 살포시 오른손을 얹었다. 진원이 자신의 볼에 닿은 내 손등을 한 손으로 감싸더니 이내 다른 손까지 합세해 내 손을 앞뒤로 포개어 잡았다. 그의 손이 언제나처럼 따뜻했다.
알았어. 고마워.
진원이 두 손을 풀어 나를 천천히 안았다. 나는 그대로 그의 품에 안겼다.
신경쓰게 해서 미안해. 요한이 녀석 상황을 제대로 체크했어야 했는데… 다 내 잘못이야.
아니, 이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소동 자체는 진원의 잘못이 아니었다.
진원의 잘못이 있다면 요한을 친구로 두고, 그것도 가장 친한 친구를 넘어 형제처럼 여긴다는 점 그 자체일 것이다. 향기 나는 꽃에 벌과 나비가 날아들 듯, 아니 타는 줄 모르고 불길에 뛰어드는 나방들과 같이, 요한의 서늘한 미모에 여자들이 눈멀고 귀먹어 달려드는 모양새였다. 그의 아름다움은 개인의 취향을 넘어서는 수준이었고, 불길할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는 불안함과 죄책감을 느꼈다. 나는 팔을 뻗어 진원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요한으로 인한 모든 부적절한 감정을 떨쳐버리고자 그 어느 때보다도 힘을 주어 껴안았다. 진원이 나를 안은 채로 내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가 나를 안은 채로 내 머리칼에 조용히 입을 맞추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남자.
그는 이토록이나 내게 부드럽고 다정했다. 불과 나보다 한 살밖에 많았지만 진원은 터울 많이 나는 큰오빠처럼 믿음직스러운 사람이었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셔서 그의 냄새를 맡았다. 따로 향수를 쓰지 않는 그에게서는 단순하고 깔끔한 비누향이 풍겼다. 나는 그 냄새가 좋았다.
그러는 동안 택시가 왔고 나는 못내 미안해하는 진원의 극진한 배웅을 받으며 차에 올랐다. 우리는 차가 출발하기 직전까지도 차창 사이로 눈빛을 나누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마침내 손 흔드는 진원을 뒤로 하고 택시가 넓지 않은 골목길을 헤쳐나가기 시작했을 때, 나이 지긋한 택시기사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아유, 남자친구가… 남자친구 맞죠? 아주 잘생기고 멋지네요. 아가씨를 공주님 모시듯 하고, 좋겠어요.
네에… 감사합니다.
나는 두 눈을 감으며 읊조리듯 말했다.
기사는 내 반응이 시원치 않다고 느꼈는지, 아니면 내가 눈을 감는 것을 백미러로 보았기 때문인지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나는 왠지 울컥했다. 감은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니, 이유를 알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나는 목구멍이 후끈해지는 것을 참으며 집으로 향했다.
******
집에 도착하자마자 진원에게 잘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낸 뒤 나는 그대로 거실 소파에 쓰러졌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너무 피곤했다. 옷을 갈아입지도, 씻지도 않은 채 나는 잠이 들어버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잠결에 휴대폰 진동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눈을 뜨지도, 감지도 않은 어정쩡한 상태로 손을 뻗어 휴대폰을 찾았다. 십중팔구 진원일 것이었으므로, 나는 휴대폰 화면을 보지도 않은 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 잤어요?
진원이 아닌 다른 남자임이 분명한, 저음의 목소리였다.
잠이 달아났다. 나는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부릅뜨며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진원의 전화기로 걸려온 것이 틀림없었다.
- 여보세요?
다시 들으니 요한의 목소리였다.
진원과 함께 있을 테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진원을 통해서 바꿔준 것도 아니고 바로 내게 전화한 것을 보면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 진원이가 취해서 시은 씨만 찾아요. 혹시 와줄 수 있어요? 나… 누군지 알죠?
나는 할 말을 잊어버렸다.
진원이 취했다면 아까의 그 소동은 어떻게든 일단락된 모양이었다. 설마 연주까지 함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술이 세서인지 별로 마시지 않아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요한의 목소리는 멀쩡하게 들렸다. 그리고 내가 아는 진원은 제정신이라면 내게 양해도 구하지 않고 타인이 자신의 전화기로 내게 전화걸게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 타인이 아무리 요한이라도 말이다. 휴대전화 상단에, 아마도 진원이 보냈을 메시지와 부재중전화 알림이 잔뜩 떠있긴 했지만 확인할 여유는 없었다.
시계를 보니 이제 밤 11시였다.
진원과 헤어진 지 겨우 세 시간, 많아봐야 네 시간까지는 안 지났을 것이다. 연주와의 일이 잘 처리되어 마음 편히 술자리를 갖게 되었다고 해도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취하기에는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술을 얼마나 빨리 마신 것일까. 나는 진원이 걱정되는 동시에 처음 겪는 이러한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아마도 전에도 숱하게 많은 술자리를 요한과 함께 했을 진원이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있을 때도 다른 친구들과 있을 때와 다름없이, 내게 혀가 꼬부라진 소리로 평소에는 잘 보여주지 않는 애교를 피우며 달콤하고도 낯간지러운 말들을 했을 뿐 나를 걱정시킨 적은 없었던 진원이었다. 그래서 짐짓 잔소리는 했지만 내가 속으로는 그의 술주정을 은근슬쩍 기대하게 만들었던 진원이었다.
그런데 내게 요한을 소개한 바로 그날 이 모양이었다.
그렇다. 요한이 문제인 것이다. 내 남자에게는 아무 잘못 없었다(사실은 그렇게 믿고 싶은 것뿐이었겠지만).
거기가 어딘데요.
나는 요한에 대한 반감을 억누르며 최대한 차분하게 말하려 애썼다.
- 아까 우리 만났던 근처예요. 장소 메시지로 보낼게요. 내 폰으로 보낼 테니까 번호 저장해둬요.
요한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별일 아닌 것처럼, 마치 몇 시간 전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와도 막역한 사이인 것처럼 아무런 스스럼없이 지껄였다. 나는 그것이 더욱 못마땅했다.
둘만 있나요?
- 네.
혼자서… 요한 씨가 혼자서는 감당 못할 정도로 취했나요? 그리고 그렇게 취했으면 이제 그만 집에 가야 할 텐데 제가 간다고 무슨 도움이 될지…
- 내일 일요일이고 진원이랑 같이 있으면 좋잖아요? 어차피 처음도 아닐 텐데.
나는 얼굴에 급작스럽게 솟구치는 열감을 느꼈다.
이 남자는 나를 안 지 얼마나 되었다고 죽마고우 사이에서나 할 법한 말을 내게 하고 있는 것인가. 적어도 귀로만 듣는 요한은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멋진 저음의 목소리가 더 이상 멋지게 들리지 않았다.
- 얼굴 빨개진 거 다 보여요.
요한이 흐흐, 장난스럽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통화중인 탓으로 고막에 바로 꽂히는 그의 웃음소리에 나는 얼굴이 더욱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순간 눈 앞에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 걱정 말아요. 진원이는 나한테도 그런저런 얘기 전혀 안 해요. 아주, 아~주 훌륭한 남자니까.
맞는 말이었다. 진원은 내가 아는 가장 멋진 남자였다. 별로 내세울 것 없이 평범하기만 한 나란 여자에게는 과분한, 그래서 내게 주어짐에 늘 감사케 하는 사람이었다.
순간 그런 진원이 몹시 그리워져서, 너무 보고 싶어져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닥에 널브러진 가방을 챙겨들며 갈게요, 라고 말하려는데 요한의 말이 이어 들려왔다.
- 오늘 특히 열심히 꼬드겨봤는데도 절대 안 넘어오네요.
이봐요, 너무 무례하잖아요?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전화기에 소리쳤다.
아까 만난 술집에서부터 해주고 싶었던, 진작에 그에게 했어야 하는 말이었다. 내게는 진원을 사랑하느냐고 취조하듯 묻더니 진원에게는 나와의 성적인 관계를 캐물었다는 얘기 아닌가. 어느 쪽이든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철딱서니 없는 어린 시동생 더하기 짓궃기 짝이 없는 부X친구, 그것이 내가 감당해야 할 요한의 정체임을 다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 올 거예요, 말 거예요?
내 말은 신경쓰지도 않는 듯 요한이 물었다.
그에게 뭐라 더 하고 싶은 욕구와 진원의 상태가 걱정되는 마음 사이에서 나는 잠시 고민했다.
…진원 씨 바꿔줘요.
우선 진원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 지금 통화 못해요.
당장 바꾸라니까요?
- 참…
요한이 헛웃음을 치더니 이윽고 진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시은아, 내가 많이 취했네에~ 우리 시은이 보고 싶다~
지금까지 들어본 것 중에 가장 흐트러진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