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낯선 여자

by 지구인



야!


낯선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우리 자리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요한의 앞에 멈춰 섰으므로 여자는 그의 손님임이 분명해 보였다.


누구 맘대로 끝내? 끝내도 내가 끝내!


요한이 방금 전 전화로 끝냈다고 말했던, 그를 귀찮게 한다는 여자친구 아니면 썸녀인 모양이었다.


요한이 통화하고 자리에 돌아온 것이 몇 분 되지도 않는 것 같은데 여자는 어떻게 나타난 것일까.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진원과 나까지 있는 자리에 그렇게 쳐들어와 소리를 지른 것으로 봐서는 보통 성격은 아님이 확실해 보였다.


여자는 길게 펌을 한 머리를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리고 진한 화장에 위아래로 노출이 심한 옷차림이었다. 진품 여부를 알 수는 없었지만 여자가 몸에 두른 액세서리들은 명품 로고를 단 채 몹시 반짝거렸다. 좀 전까지도 클럽에서 놀다 온 것 같은, 나 좀 봐주세요, 하는 그런 화려하기 짝이 없는 모양새였다.


하…


요한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크게 놀라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잔뜩 짜증이 난 표정으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도 옷차림에 맞춰 높은 굽의 신발을 신었을 여자의 키는 일어선 남자의 턱에 겨우 닿을락 말락했다. 여자는 고개를 들어 요한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네가 이러니까 더는 만나기 싫다는 거야. 몇 번을 말해?


요한이 여자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화가 나서인지 목소리 톤이 높아져 있었다. 화를 가라앉히려는 듯 그가 한숨을 다시 내쉬고 말했다.


지금이라도 얌전히 돌아가면 봐줄 테니 제발 좀 가라…


요한이 지친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지만 여자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봐주긴 뭘 봐줘? 내가 순순히 물러날 것 같냐 이 새끼야?!


여자가 악을 쓰며 요한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나는 놀라 양손으로 입을 막았고 진원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여자를 말렸다. 이미 술집 안 사람들이 모두 우리 자리에 시선을 보내고 있었고, 아마도 우리 자리를 살피고 있었을 남자점원 두 명이 달려왔다.


그러나 상황은 쉽게 진압되지 않았다.


악에 바친 여자는 힘이 셌다. 양팔이 붙잡히자 발버둥을 쳤고 머리는 박치기하듯 세게 흔들어 대는 바람에 겁먹은 점원을 물러서게 하고 잠시 자유의 몸이 되기까지 했다. 격렬한 몸싸움 속에서 탁자 위에 놓여있던 맥주병들은 쓰러지고 내가 마시던 맥주잔은 바닥에 떨어져 깨져버렸다. 나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이미 엎질러진 술병에 옷이 젖어버린 뒤였다. 순식간에 차가운 물기가 맨살에 스며들었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처음에 달려온 남자점원 두 명이 여자의 양팔과 머리를 붙잡고, 서빙하던 여자점원 두 명까지 합세해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의 맨다리를 붙들고 나서야 마침내 여자는 진압되었다. 여자는 점원들에게 들려나가다시피 해서 가게 밖으로 쫓겨났다.


진원과 나, 그리고 요한 우리 셋은 넋이 나간 듯 할 말을 잃고 서로를 그저 바라만 보았다. 엉망이 되어버린 자리에 다시 앉기도, 그렇다고 이 난리를 쳐놓고 다른 장소로 옮기기도 애매했다.


죄송합니다만,


또 다른 남자점원 한 명이 우리 자리로 다가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이만 자리를… 장소를 옮겨주셔야겠습니다. 아까 그 여자분이 가게 앞에서 버티고 계셔서… 경찰 불러야 할 것 같은데 그러면 일이 커져서요.


아아, 네. 죄송합니다. 알겠습니다.


진원이 점원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바로 답했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여기 계속 있어봤자 우리끼리도 서로 어색하고 다른 손님들의 구경거리만 될 것이 분명했다. 이미 아까의 소동이 여러 사람들에게 영상으로 찍혔을 테고 누군가는 인터넷에 올릴지도 몰랐다. 더구나 여자가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있다니, 우리가 자리를 피하는 것이 가게 안 모든 사람들에게 최선일 것이다.


우리는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가게 출입구 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다른 손님들이 우리를 흘깃거리고 수군거리는 것이 보였다. 아까 화장실 앞에서 봤었던 젊은 여자들도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손을 올려 얼굴을 가리며 최대한 빨리 걸으려 애썼지만, 창피함으로 얼굴이 후끈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진원이 당혹스러움과 민망함과 싸우며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는 동안, 요한과 나는 옆에서 기다렸다.


미안해요.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는지 요한이 내게 말했다. 들릴락 말락하게 작은 목소리였다.


나는 말없이 그를 보았다. 요한의 얼굴에 긁힌 자국이 몇 군데 보였다. 아까 여자가 마구잡이로 휘두른 주먹에 다친 모양이었다.


안 아파요? 상처 났어요, 얼굴…


아… 다른 데도 많이 맞았어요.


요한이 쓰게 웃었다.


아름다운 얼굴은 피가 맺히고 찌푸린 표정이어도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요한은 자신의 존재로써 증명해 보이고 있었다. 내 지적에 새삼 아픔이 느껴졌는지 질끈 두 눈을 감을 때 그의 길고도 풍성한 속눈썹이 사르르 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리고 순간 나의 몸도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목덜미에서 시작된 찌릿한 감각이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졌다. 안돼.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눈을 감고 그 감각을 떨쳐버리려고 애썼다.


가자, 시은아.


소름이 돋은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그 느낌을 떨치게 만든 것은 진원의 손길이었다.


나는 마치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진원의 팔을 붙잡고 발걸음을 옮겼다. 요한은 말없이 우리 뒤를 따랐다. 어두운 조명 탓으로 마치 터널에 갇힌 듯해서, 나는 빨리 그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계단을 올라가 술집 입구에 가까워지자 그 여자와 남자점원들이 승강이를 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는 여자가 점원들에게 막혀서 원하는 대로 못하자 악을 써대는 것 같았다.


자꾸 이러시면 경찰 부릅니다!


불러! 오늘 장사 접고 싶으면 부르라니까?!


여자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했다. 여전히 기운이 넘치는 모양이었다.


여자와 다시 마주치는 것이 두려웠다. 또 어떤 패악을 부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정말 미안한데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내가 다음에 제대로 대접할게. 미안해요, 시은 씨.


뒤에 따라오던 요한이 진원과 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말이 안 통하는 거 같던데 괜찮겠어? 정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냐?


진원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날을 잘못 잡아 그렇지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었을 거야. 도움 필요하면 얘기할게.


아무래도 불안하다. 같이 만나자.


괜찮다니까. 시은 씨 많이 놀란 것 같은데 어서 바래다줘.


아…


진원이 곤란하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진원이야말로 이 사태에 놀란 것이 분명했다.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고 술도 마실 작정이었으므로 우리는 택시로 이곳에 왔다. 돌아갈 때도 택시를 이용할 예정이었다. 그러니 사실 나 혼자 돌아가도 상관없었다. 진원의 얼굴로 보아 함께 차를 타더라도 요한을 걱정하느라 안절부절못할 것을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 시은이 바래다주고 바로 올게.


진원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택시 앱을 켜는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도 여자의 악쓰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일단 나가요. 나가서 해.


나는 진원의 팔을 붙잡고 재촉했다.


그 사이 요한은 밖으로 뛰어나갔다.


오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원과 나는 그 소리에 빨리 걸음을 옮겼다. 요한과 여자가 보였다.


오빠아~!


여자가 매달리다시피 해서 요한을 부둥켜안고 방방 뛰고 있었다. 진원과 나는 어이가 없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미안해에 오빠~! 아까 너무 화가 나서 그랬어! 잘못했어용! 용서해줘요오~!


여자가 요한을 껴안았던 양손을 풀어 이번에는 싹싹 빌기 시작했다.


요한은 여자를 보려 하지도 않았지만, 여자는 혀 짧은 소리로 온갖 애교를 부리며 그에게 얼굴을 들이대며 열심히 용서를 빌었다. 요한이 여자를 피해 걸음을 옮기려 하자 여자는 다시금 그에게 매달렸다. 요한이 여자를 뿌리치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요한은 여자가 매달린 채로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황당해하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점원들이 이윽고 가게 안으로 돌아갔다. 그중 한 명은 욕을 하며 땅에 침을 뱉었다. 그 직원은 입구 바로 앞에 어정쩡 서있던 진원과 나를 발견하고는 움찔하는 듯하더니 푹 한숨을 쉬고는 씩씩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뭐야, 정말 제정신이 아닌 여자네. 요한이 저 자식은 또 어쩌다가 저런 애랑…


술집 직원들이 계단 아래로 사라지자마자 진원이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얼굴값 한다’는 말은 이럴 때도 쓰일 수 있는 것인지 순간 나는 궁금해졌다.


아직 해가 지지 않고 희미하게나마 하늘을 밝혀주고 있는 때였다. 거기다 가로등 밝은 불빛에 비친 여자의 얼굴이 어두운 가게 안에서보다 잘 보였다. 애교 섞인 표정 때문인지 아까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가게 안에서는 우리 또래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기껏해야 이십대 초반 정도인 것 같았다. 설마 미성년자는 아니겠지? 갑자기 피곤함이 몰려왔다. 빨리 집에 돌아가 침대에 퍼질러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여자가 진원과 나를 발견하고는 요한에게서 벗어나 우리 앞으로 달려왔다. 그러더니 두 손을 얌전히 모으고 배꼽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안녕하세요! 요한이 오빠 여친 서연주입니당! 아까는 실례가 많았습니다아~ 잘 부탁드려용!


여자, 아니 서연주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가까이 보니 짙은 화장에도 가려지지 않는 어린 얼굴이었다.


…몇 살이에요?


나도 모르게 연주에게 물었다.


생일 지난달에 지났어요! 꽉 찬 이십 살 맞아요!


실례지만 신분증 좀 보여줄 수 있어요?


진원도 영 찝찝했던지 합세했다.


연주는 해맑게 웃으며 서로 반대를 바라보며 겹쳐진 두 개의 알파벳 C 모양의 엠블럼이 달린 크로스백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 보여주었다. 가짜가 아니라면 연주의 말 그대로였다. 민증 하단에 서울특별시 서초구청장, 이라고 쓰여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네. 야, 식겁했다 응?


진원이 요한에게 소리쳤다.


정말 죄송했어요! 제가 사과의 의미로 술 한잔 살게요!


야,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릴 하는 거야? 이제 너 안 만난다니까!


연주의 말에 요한이 짜증이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건 그래요. 요한이가 헤어졌다고 하던데, 이렇게 일방적으로 구는 건 곤란해요.


진원이 어린 동생을 타이르듯 말했다.


나이 차이도 많고… 또래 남자를 만나는 게 좋겠어요. 나도 비슷한 나이의 여동생이 있는데, 그 녀석이 열 살이나 많은 남자랑 사귀는 거 싫을 거 같아요.


오빠가 내 오빠 아니잖아요? 그리고 나 친오빠 없어요. 있었어도 내 일에 무슨 상관?


부모님은 계시지 않아요? 좋아하실까요?


우리 엄마아빠는 나한테 꼼짝도 못해요. 내가 원하는 건 다 들어줘요. 내가 어릴 때 죽다 살아났거든요. 아프지만 않으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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