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리에 멈춰섰다.
나는 고개를 돌려 요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조명이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고 내 얼굴 역시 그에게 제대로 보이지 않을 수 있었지만, 나는 최대한 그를 노려보았다. 그가 조금이라도 움찔하길 바랐지만, 그의 잘생긴 얼굴은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어 보였다. 나는 그것 역시 당황스러웠다.
진원이, 사랑하느냐구요?
그가 다시 물었다.
무례하시네요, 라고 말하려다가 나는 입술을 앙다물고 참았다. 대신 다시 한 번 그를 노려보고 나서 발걸음을 옮겼다.
몇 발자국 지나지 않아 나는 남자 화장실에서 나오는 진원과 마주쳤다.
괜찮아?
나의 연인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정히 나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나는 내 남자의 절친이라는 남자가 내게 준 불편함과 당황스러움을 사라지게 만드는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끼며 진원에게 기댔다. 빨리 자리로 돌아가 앉고 싶었다. 그러나 돌아가면 다시 그와 마주해야 한다는 것은 싫었다.
그가 우리 뒤를 따라 곧 돌아올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화장실이라도 간 모양이었다.
자기, 나에 대해 뭐라고 얘기했어?
그가 최대한 늦게 돌아오기를 기대하며 나는 진원에게 물었다. 아닌 척하려고 했지만 말에 날이 선 것 같아 진원에게 미안했지만 입밖에 내기는 쑥스러웠다.
응? 글쎄, 별로 말한 거 없는데…? 내 사람이고 내 여자라고. 결혼할 거니까 형수님 잘 모시라고. 다른 거야 앞으로 차차 서로 알게 되면 되는 거고. 나도 녀석에 대해 자기한테 뭐 자세히 얘기한 건 없지 않았나?
맞다. 나 역시 그에 대해 들은 것은 많지 않았다.
부모님끼리 친분이 있었고 어렸을 때부터 한 동네에서 자랐다는 것, 요한의 부모님에게 좋지 않은 사정이 생겨서 요한은 열 살 무렵부터 한동안 진원네 가족과 함께 살았다는 것, 그래서 성인이 되어서도 동반입대할 정도로 친구라기보다는 형제에 가까울 정도로 각별한 사이라는 것 정도였다.
왜. 무슨 일 있었어?
진원이 또다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진원의 새까만 머리칼만큼이나 까맣고 또렷한,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아이같이 순수한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3년 전 처음 만났을 때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수줍어하고 설레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던 모습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오히려 그때보다 더 깊어진 애정을 듬뿍 담은 눈길로.
나는 마음이 풀어졌다. 철딱서니 없는 (사촌)시동생 정도로 생각하면 별문제 없지 않겠는가.
진원에게는 열 살이나 터울이 나는 어린 여동생이 있다. 서울의 명문여대생인 진원의 누이는 유복하고 교양 넘치는 가정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그 나이대 여자아이들이 그렇듯 티 없이 맑아 보였다. 늘 갖고 팠던 언니가 생겨서 너무 좋다며 활짝 웃는 얼굴이 아이와도 같았다. 그 웃음이 오빠와 빼닮았어서, 나는 처음 만나는 예비 손아래 시누이에게 느낄 법한 묘한 긴장감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었다.
으응, 아니야. 일은 무슨.
나는 고개를 저으며 이마로 살짝 내려온 진원의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리고 웃어 보였다.
진원도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진원은 늘 나의 작은 손길 하나에도 커다란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뻐한다. 나는 그럴 때의 진원이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역시 제대로 말한 적은 없지만.
때마침 요한이 자리로 돌아왔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뻔뻔한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진원을 생각하면 참아야 했다.
전화가 와서.
자리에 앉으며 요한이 내뱉듯 말했다.
그래, 말 나온 김에 너 전화기 좀 꺼놔. 아님 무음으로 해놓든지. 형수님 처음 뵙는 자리에서 실례할 일 만들지 말고.
진원은 다시 내 어깨를 감싸안으며 그에게 핀잔을 주었다.
나는 처음과는 달리 진원에게 내 어깨를 안았다고 눈치를 주지 않았다. 오히려 네가 뭘 어쩔 건데, 하는 당당한 얼굴로 요한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마치 내 눈을 피하는 것처럼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너무 대놓고 그러는 거 아니야? 그렇게 안 해도 네가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알아. 외로운 사람 앞에서 너무하네.
외롭다니 만나는 사람 있잖아. 그새 헤어진 거야, 또?
그런 사이는 아니야. 어쨌든, 방금 전화로. 너무 귀찮게 해서.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두 사람의 태도를 보아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언제까지 그럴 거야. 이제 슬슬 정착 좀 하지 그래. 아직도 이십대인 줄 아냐.
아이고, 영감님. 잔소리는 그만하시고 주문이나 하시죠.
요한이 만지작거리던 메뉴판을 우리 쪽으로 쓱 밀었다.
여기 칵테일 괜찮아요.
그가 말했다.
그래. 이 녀석이 추천한 거면 먹을 만할 거야. 뭐 마실래, 시은아?
나는 메뉴를 보았지만 딱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내가 추천해줘요?
나는 괜한 오기가 났다.
아, 오늘은 별로…
나는 말끝을 흐리며 진원에게 고개를 돌리고 말을 이어갔다.
자기 맥주 마실 거지?
나야 그렇지.
나도 오늘은 자기랑 같은 거 마실래.
웬일이야? 맥주 배부르다고 별로 안 좋아하잖아. 자기 생각해서 여기 온 거였는데.
그러게. 나도 모르겠어. 나도 처음 여기 올 때만 해도 칵테일 마실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그렇네. 왜. 안돼?
안되긴요. 좋을 대로 하세요.
요한이 웃으며 말했다.
칵테일 마시고 싶을 때 내가 일하는 데로 오면 되지. 다음에 와요.
그가 덧붙였다.
그는 홍대 쪽에서도 잘 나가는 칵테일바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일할 때는 워낙 바쁘니 처음부터 그곳에서 만나기는 그렇고 다른 곳에서 보자고 한 것은 그라고 했다. 그리고 그가 추천한 곳이 여기였다. 두 사람에게 만날 장소는 맡겨 놓고 나는 머리 손질과 화장에만 신경 썼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바빴다.
그래. 꽤 유명한 데야, 여자들한테는. 이 녀석 보려고 온 여자들하고 그 여자들한테 어떻게 좀 해 보려고 하는 남자들이 가는 곳이지. 커플은 없을 걸?
왜 그래, 커플도 있어 가끔. 없지는 않아.
야, 나는 바 자리가 그렇게 자리 없는 데는 처음 봤다. 시은아, 원래 창가 자리나 그런 데가 더 인기 많은 거 아니야? 거기서부터 사람들이 앉으려고 하는 거 아니야? 근데 여기는 무슨 바 자리부터 꽉 찬다니까. 뭐 하러 힘들게 바텐더 하냐. 그냥 자리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여자들이 몰려올 텐데.
그렇게 부러우면 너도 하든가. 사장님도 좋아하실 거야. 가게 이름도 ‘바 프린스'로 하자고 하셨잖아. 기억 안 나?
‘바 프린스'라니, 무슨 호스트바야? 하여간 형님은 참.
진원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매우 즐거워 보였다.
나는 새삼스럽게 진원을 보았다.
진원이 이렇게나 말이 많은 사람이었던가? 이렇게나 장난기가 많은 사람이었던가? 진원의 얼굴이 친구 놀리기에 잔뜩 신이 난 십대 청소년 같았다. 고등학교 때 쉬는 시간이면 투닥거리기에 바빴던 남자아이들이 생각났다. 말로 장난치다가 결국 몸싸움으로 번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나의 진원도 그랬을까.
결국 우리 셋은 똑같이 진원이 좋아하는 흑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두 사람은 병으로, 나는 그들만큼 많이 마실 수 없어 잔에 따라서 마셨다.
만나서 반가워요.
요한이 내게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네, 저도 반가워요.
나는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솔직히 그와의 만남이 달갑지 않았다. 불편했다. 다만 진원을 생각해서 견디고 있을 뿐이었다. 앞으로 몇 시간이나 이 불편한 자리를 버텨야 하는 것일까. 진원이 모처럼 들뜬 모습을 생각하면 빨리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나마 기대할 것이라곤 기분 좋은 진원이 술을 빨리 마셔서 취해버리는, 일어날 확률이 희박한 상황일 것이다.
내가 술이 약했으므로 단 둘이 술을 마시는 경우도 많지 않았지만, 진원은 나를 바래다주어야 한다며 결코 많이 마시지 않았다. 내가 더 마시라고 해도 술이 모자라면 집에 가서 마시면 된다며 웃으며 거절하곤 했다. 진원은 원래부터 아주 마음이 편한 자리가 아니면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진원의 다른 친구들과 만났을 때도 진원은 나를 챙기느라 분위기 맞출 정도로만 마셔서 친구들의 야유를 받았다.
그래서 나는 아직까지 술 취한 진원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진원이 술에 취하면 꼭 내게 전화를 걸어 온갖 닭살스러운 고백을 해대기 때문에 진원도 술에 취하긴 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진원은 그러고 나서는 술이 다 깨고 나면 꽤 쑥스러워했다. 자신이 말한 내용을 세세히는 아니어도 대충은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언젠가는 진원의 술주정을 녹음해서 들려준 적이 있었다.
나의 예상대로 진원은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했고 나는 배를 잡고 웃었다. 아마도 진원과 함께 있으면서 가장 크게 웃었던 때였을 것이다. 그러자 진원은 내가 즐거워하면 얼마든지 놀려도 좋다며 예의 그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나에 대한 사랑을 듬뿍 담은 눈빛을 보내어 내가 얼굴을 붉히게 만들었다. 진원은 그런 남자였다.
요한과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어쩌면 오늘 마침내 진원이 술에 취한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생겼다. 친형제 같다는 그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럴 수 있어 보였다. 그러나 평소 나와의 술자리에서의 진원의 태도를 고려한다면, 자신의 절친과 내가 처음 만나는 자리임을 감안할 때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와의 자리를 조금이라도 빨리 피하고 싶은 내 마음이 그러한 기대를 품게 만든 것이겠지.
두 개의 맥주병과 잔을 부딪친 후 나는 술을 들이켰다. 나도 모르게 벌컥벌컥 들이마셔서 단숨에 잔을 비웠다. 한여름에 목이 말라 마실 때도 한 번에 서너 모금 이상 넘기지 못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탁자에 유리잔을 내려놓자마자 나는 올라오는 트림을 숨기기 위해 손으로 입을 막았다.
뭐야, 잘만 드시네.
요한이 웃으며 내 빈 술잔에 맥주를 따랐다.
목말랐어? 이거 물 아니야, 시은아.
진원의 말에 순간 내가 취해버려도 이 자리를 금방 끝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술 마시면 우선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박동이 빨라지며 청력도 떨어지는 데다가, 주량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양을 조금이라도 넘어서면 결국 괴로워하다 구토하고 만다. 실행하기에는 애로사항이 많았다.
내가 두 번째 술잔을 들이켤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 사이, 생각도 못한 일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