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친구로 등록되지 않은 사용자

by 지구인



당장 달려가고 싶었다.


진원이 늘 나를 챙겨주었듯이, 오늘은 내가 챙겨줘야 할 것 같았다. 요한을 보기 싫은 마음보다 진원을 보고 싶은 마음이 훨씬 크다는 것을 진원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깨달았다.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가 조명을 켜고 화장대의 거울을 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성들여 꾸민, 평소의 모습보다 훨씬 예쁜 모습의 내가 있었다. 그러나 이미 한잠 자고 난 탓에 머리는 다소 헝클어졌고 옷매무새도 흐트러졌다.


진원 씨 잘 챙겨주고 있어요. 곧 출발할게요.


나는 전화기를 화장대에 올려놓고 귀걸이를 빼고 목걸이를 풀었다. 공들여 드라이했었던 머리칼을 뒤통수로 모아 질끈 묶고 나서는 거추장스러운 블라우스와 치렁치렁한 치마를 벗었다. 하체를 압박하던 스타킹과 속바지도 벗어던졌다.


그리고 평소 즐겨입는 캐주얼한 티셔츠와 품이 넉넉한 청바지로 갈아입었다. 얼굴이 무거워 메이크업도 지우고 싶었지만 가는 길이 급했다. 마지막으로 서랍장에서 양말을 꺼내 빠르게 신었다. 그리고 현관에서 운동화를 구겨신으며 집밖으로 뛰어나갔다.


토요일밤의 이 시간이면 동네로 들어오는 택시가 있을 것이다. 다행히 예상이 맞아떨어져 굳이 택시 앱을 이용하지 않고도 바로 차를 탈 수 있었다.


나는 친구로 등록되지 않은 사용자, 란 이름으로 요한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요한이에요, 란 말과 함께 장소 링크가 찍혀 있었다. 나는 가야 할 곳만 확인하고 답하지 않았다. 확인했다는 이모지도 남기지 않았다. 나는 택시기사에게 행선지를 말했을 뿐이었다.


차가 출발하자마자 어디쯤이에요? 란 메시지가 또 왔다. 진원이 취해버려 심심해졌는지 전화기만 들여다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할 수 없이 이제 막 택시 탔고 20분쯤 걸려요, 라고 답을 보냈다. 이어 진원씨 정신 좀 차렸나요? 라고 메시지를 남겼다.


요한은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잠든 것 같은 진원의 모습을 사진찍어 보냈다. 보아하니 술집에서는 나온 것 같았다. 진원의 어깨 너머로 바깥풍경이 보였다. 요한이 새로운 주소를 다시 찍어 보냈다. 확인해보니 굳이 기사에게 말할 필요 없을 정도로 술집에서 지척거리에 있는 편의점이었다.


길은 막히지 않았다. 자정이 가까워 오는 시간이었으므로 주택가에서 유흥가로 나가는 차량은 많지 않았다. 택시는 빠르게 달렸다. 그런데도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진원은 괜찮을까. 숙취해소제라도 마시고 나서 잠든 것일까. 무슨 술을 그렇게 마셨을까. 편하고 기분 좋아야 마음껏 마시는 사람이니 그래도 즐거운 자리였겠지. 그건 다행이야. 뭐라고 하지 말자. 근데 필름 끊기면 어떡하지. 그건 안 좋은 거라던데.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가는 동안에도 요한은 계속해서 메시지를 보냈다. 심심하면서도 귀찮은 것인지 글자도 아닌 움직이는 이모티콘들만 찍어댔다. 내가 어이없어하며 전화기를 보는둥마는둥하는데, 그 정신없는 이모티콘들 사이에 한 문장이 눈에 띄었다.


- 진원이 얼마나 사랑해요?


세 번째 물음이었다.


아니, 술집에서는 그저 사랑하느냐고 물었었다. 이번에는 얼마나, 가 붙었으니 달라진 질문이었다. 내가 진원을 사랑한다는 것은 인정한다는 뜻일까. 무엇이 그의 질문을 달라지게 했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술 취해서 보고 싶다고 투정하는 남자친구를, 제대로 챙길 수 있을지 없을지도 확실치 않은 상태에서 굳이 밤택시를 타고 달려가고 있는 것 때문에? 하지만 이 정도는 사랑이 아니라 썸이어도 가능한 일 아닐까? 아니면 그저 눈에 콩깍지가 씐 상태이거나, 아예 술 취한 상대를 어떻게 해보려는 엉큼한 생각을 품었더라도. 아마 남자들이 더 많이 그러긴 하겠지만, 아까 본 연주라면 그렇게 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끈덕진 아이를 어떻게 떼어놓고 진원과 술이나 마시고 있었던 걸까.


이런 생각들로 잠시 차창 밖을 바라보다가 다시 전화기를 보니 작성자가 메시지를 지워버린 후였다. 그리고 그 삭제된 메시지의 위아래로 어지러운 이모티콘만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쉴새없이 움직이는 정신없는 이모티콘들이, 요한의 알 수 없는 심경을 반영하는 듯했다.


택시가 술집이 있는 거리로 진입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편의점 데크자리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진원이 보였다. 진원의 얼굴은 바닥을 향해 있었지만 옆에 그의 친구가 음료수를 마시고 있어서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택시에서 내려 진원에게로 뛰어갔다.


자기야!


내가 바로 앞에서 불렀음에도 진원은 반응이 없었다. 떨궈진 고개가 그대로였다. 나는 진원의 얼굴을 두 손으로 들어올렸다. 진원은 으응, 하고 신음했지만 감은 눈을 뜨지는 않았다. 그에게서 술냄새와 기름냄새가 풍겼다.


야, 정신 좀 차려봐. 목 메이게 부르던 여친님 오셨어.


옆에서 요한이 진원을 살짝 흔들며 말했다. 그래도 별 반응이 없었다.


이렇게 되도록 뭐 했어요?


나는 진원의 얼굴을 양손으로 받친 채 요한에게 쏘아붙였다.


내가 마시게 한 거 아니에요. 지가 좋다고 마신 거지. 그동안 일도 바빴고 몇 달만이라면서.


요한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더 기다려봐요. 대충 깰 때 됐어요.


그는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편의점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이미 두세 명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진원의 고개를 내 어깨에 기대게 하고 반대쪽 손으로 진원의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진원의 숨결에서 술내음이 풍겼지만 이상하게도 싫지 않았다. 살랑 불어오는 밤바람이 불쾌한 냄새를 쓸어가는 것 같았다.


내 시야에 담배를 피우는 요한이 들어왔다.


그 역시 진원과 내가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굳이 우리를 볼 필요는 없을 텐데 그는 굳이 우리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는 내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나는 다시 진원의 얼굴로 눈길을 돌렸다. 다행스럽게도, 진원의 얼굴에서 괴로움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평온해 보였다.


나는 진원의 곧고 굵은 머리칼을, 자유로운 오른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다 검지손가락을 진원의 오른쪽 눈썹에 살짝 대었다. 숱이 많지만 가지런하게 잘 뻗은 진원의 눈썹을 결을 따라 천천히 그렸다. 그리고 그의 감은 눈두덩과 길지는 않지만 역시 곧게 뻗은 진한 속눈썹을 차례로 만졌다.


진원이 내 무릎을 베고 누우면 언제인가부터 장난삼아 하게 된 짓이었고 진원은 좋아하면서도 간지러움을 참느라 힘들어했다. 양눈과 코를 거쳐 입술까지 내 손길을 참아야 내가 상으로 입을 맞추어 주었기 때문에 진원은 최선을 다해 간지러움을 참으려고 했다. 마침내 입술까지 참아낼 수 있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었다.


내 손길이 진원의 오뚝한 콧대에 닿았을 때 그의 몸이 움찔했다. 그의 얼굴을 매만지던 내 손가락이 갈 곳을 잃고 공중에 떠 있을 때 진원이 나를 끌어안으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괜찮아?


진원의 품에 안긴 채 나는 물었다. 대답 대신 진원은 더욱 힘을 주어 나를 안았다.


시은아.


응.


시은아.


진원이 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사랑해.


진원이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는 두 눈을 감았다.


어쩌면 그 말을 듣기 위해 나는 밤늦게 달려온 것인지 몰랐다. 전화기와 전화기, 그 사이 디지털 변환을 거쳐서 주파수를 타고 전달된 것이 아니라 진원의 입술과 나의 귀가 바로 닿아서 함께 있는 공간 속 같이 숨 쉬는 공기의 떨림을 느끼고 싶었다. 술에 취하면 으레 듣는 고백이었지만 오늘은 왠지 직접 듣고 싶었다.


진원은 평소에는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과 손길을 비롯한 행동거지에서 얼마든지 알 수 있었으므로 나는 별로 불만스럽지 않았다. 천 냥 빚보다 말 한 마디가, 말 한 마디보다 순간의 눈빛이 더 가치 있음을 나는 모르지 않았다. 나 역시 그 달콤하지만 흔하디 흔한 말을 좀처럼 하지 않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술 마신 진원과 통화를 할 때는 잘 대꾸하지 않고 그저 들어주기만 했던 나였지만, 그래서 술 취한 진원이 귀엽게 투정부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 말에 나도 진심을 담아 답해줄 요량이었다. 나도 사랑해. 걱정했어 많이. 그렇게 말하면 진원은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모처럼 내가 용기내어 말할 기회는 요한의 재등장으로 날아가버렸다.


깼냐.


요한이 맞은편 의자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나는 진원의 가슴을 살짝 밀었고 그는 나를 감쌌던 팔을 거두어야 했다.


집에 가? 아님 셋이 어디 가?


집에 가야지. 조금만 더 앉아 있다가, 시은이 바래다주고.


진원이 세수하듯 양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말했다.


난 더 마셔야 돼. 너 혼자 신나서 들이붓고 뻗는 바람에 난 너무 멀쩡하다고. 먼저 가서 마시고 있을 테니까 갔다와.


같이 가야지. 나 아직 덜 깼어. 네가 나랑 시은이 보디가드 해줘야지, 임마.


가지가지한다.


요한이 벌떡 일어서더니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저 사람 갑자기 뭐하는 거야?


아… 짜식. 기다려 봐.


진원이 피식 웃으며 한 팔로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한이 빨대가 꽂힌 딸기우유와 다른 물건이 든 비닐봉지를 들고 돌아왔다. 요한이 진원 앞에 우유팩을 탁,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땡큐!


진원이 좋아하며 우유를 집어들더니 빨대를 입에 가져갔다.


마실래요?


요한이 또 다른 딸기우유 팩을 봉지에서 꺼내 들어보이며 내게 물었다.


신나게 우유를 빨아마시는 진원을 보니 나도 목이 말라오는 것 같아서 나는 손을 뻗어 우유를 건네받으려고 했다. 그러자 요한은 두 번째 우유팩을 탁자에 내려놓고 세 번째 딸기우유를 마저 꺼내더니 두 개의 우유팩을 각각 열어 차례로 빨대를 꽂은 뒤에야 내게 건넸다. 그렇게 세 명의 남녀는 한밤중에 술이 아닌 딸기우유를 마시게 되었다.


술 취하면 꼭 찾아요. 알아요?


몰랐다. 알 수가 없었다. 이러한 모습을 진원은 내게 보인 적이 없었으니까.


진원은 독주를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나와 있을 때는 그나마 도수 낮은 하이볼이나 칵테일, 스파클링와인을 좋아하는 내 취향에 맞춰 기껏해야 맥주나 마시는 정도였다. 흔치 않게 소주나 고량주를 마셔도 식사에 곁들이는 반주 정도이지 술 위주가 아니었다. 술을 마신 뒤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기는 했다. 그러나 딸기우유를 마신 적은 없었다.


나한테는 맨날 사오라고 시키면서 누구한테는 숨겼냐?


요한이 투덜거렸다. 진원이 빨대를 살짝 입에 문 채 씨익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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