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처음 본 날을 나는 잊지 못한다.
“숨이 턱 막혔다” 라든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따위의 진부한 표현을 쓰지 않고 그 순간의 느낌을 묘사할 수 있을까. 그가 술집 입구에 나타나 형체만 겨우 보일 정도로 어두운 실내를 뚫고 들어와 마침내 우리 자리 앞에 와 선 그 순간, 다른 모든 것은 사라졌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그 사람만 보였다.
심지어는 그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움직이는 입술만 보였다. 남자의 입술을 집중해 보았던 건 그때가 태어나 처음이었다.
시은아.
진원이 내 팔을 붙잡고 살짝 흔들지 않았다면 나는 현실로 돌아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
내 옆에 서있는 진원이 나와 결혼을 약속한 남자이고 내 앞에 마주 선 그는 진원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사실을 나는 그제야 다시 깨달았다.
아, 안녕하세요.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안시은입니다.
목소리가 떨려 나오는 것 같았지만 나는 최대한 아닌 척하려 애썼다.
앉자.
진원이 내 어깨를 감싸고 자리에 앉히며 말했다.
나는 진원의 친구를 보지 않으려 시선을 돌렸지만 그 와중에도 그의 나를 뚫어질 듯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설레서임이 분명한 내 심장의 고동을 나는 느꼈다.
그의 하얗고 투명한 피부는 수염자국도 잘 보이지 않을 만큼 매끄러웠고 얼굴 선은 여백을 찾기 어렵게 날렵했다. 갈색에 가까운 풍성한 머리칼은 억세지 않고 부드러워 보였고 역시 까맣다기보다는 담갈색에 가까운 눈동자가 신비로웠다. 반면 도톰하면서 붉은 입술은 고혹적이었다.
팔다리가 길고 몸은 말랐지만 곧게 뻗은 어깨가 큰 키와 함께 그의 남성적 매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다.
그는 어디에 있어도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내가 본 남자들 중 ‘아름답다’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나는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그를 만나기 전에는 전혀 느껴보지 못한 감정들이 마구잡이로 펼쳐지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내 이런 감정 상태를 두 남자가 눈치챌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나의 연인인 진원보다도 그의 절친이 전혀 모르기를,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소원했다.
어때, 우리 시은이 이쁘지?
진원이 내 어깨를 감싸안으며 말했다.
으레 하는 진원의 버릇이고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아니 오히려 기분 좋은 쪽에 가까웠던 진원의 손길이 갑자기 부담스러웠다. 나는 조심스레 어깨를 비틀었다.
왜?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아. 미안해.
진원은 바로 수긍하고 손을 풀었다.
미안. 정말 친한 친구라 깜박했네. 방금 본 건 모른 척해줘.
…꼼짝도 못하는구나?
예상외로 저음의 목소리였다.
분명 그가 우리 자리에 오며 인사를 했는데 아까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었다. 새삼스러워 바라보니 물을 삼키느라 움직이는 그의 울대뼈가 보였다. 워낙 얼굴이나 몸의 선이 매끄러운 사람이라 더 도드라져 보이는 것 같았다.
물잔을 탁자에 내려놓는 그의 손에 나의 시선이 따라갔다. 길고 하얀 손가락이 섬세해 보였다. 무의식적으로 그의 몸짓 하나하나를 눈에 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물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리고 급하게 마시다가 사레가 들고 말았다.
시은아!
진원이 냅킨을 내 입에 대주었지만, 내 기침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나는 당황스럽고 창피했다. 당장 일어나 자리를 피하고도 싶었지만 기침이 워낙 심해서 그도 쉽지 않았다. 나는 한참을 콜록거려야만 했다.
1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 왜 하필 이때 이 자리에서, 하필 그 사람 앞에서 일어나는지. 나는 태어나 처음 느끼는 복잡하고도 불편한 감정에 이어, 그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이런 식으로 드러내고야 마는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진원에게 미안하고 그 사람에게 창피했다. 진원에게 미안한 것보다 그 친구에게 창피한 것이 더 싫었다. 그리고 그런 내가 너무도 싫었다.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서 더욱 기침이 멎을 줄 몰랐던 것 같다.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기침이 멈추지 않는 입을 가린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원이 벌떡 일어나 나를 부축했다. 나는 진원에게 몸을 기대어 화장실로 향했다.
다행히 가게 안에 여성 전용 화장실이 마련되어있었고 마침 비어있었다. 화장실 안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순간적으로 구토감을 느끼고 변기에 몸을 기울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기침만 나올 뿐 내가 먹은 것을 굳이 내 눈으로 재확인하지는 않아도 되었다. 오늘 약속 시간에 맞추느라 늦게 먹은 점심은 거의 소화되었을 시간이었기도 했다.
괜찮아?
화장실 문 밖에서 진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괜찮아.
나는 콜록거리며 대답했다.
아직 기침이 완전히 멈추지는 않았지만 잦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팽, 하고 코를 풀었다. 아까 구토할 뻔했을 때는 눈물까지 찔끔 나왔으므로, 콧물에 눈물에 내 얼굴은 엉망이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모처럼 정성 들인 화장을 고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화장품은 내 손에 들려있지 않았다. 급히 움직이느라 가방을 챙겨들고 오지 못한 것이다. 진원은 다정한 사람이지만 세심한 남자는 아니었다. 우리가 앉았던 자리에 남겨져있을 내 가방을 챙겨오라고 말해야 할 참이었다.
가방 안 필요해? 여기 있어.
뜻밖이었다.
나는 바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진원이 내 가방을 들어 보이며 씩 웃었다.
요한이가 챙겨주더라고.
아…
나는 감탄인지 실망인지 모를 신음을 내뱉었다.
요한. 장요한.
한 번만 들어도 잊기 힘든 종류의 그의 이름은 이미 진원에게 수없이 들어왔었다.
같은 남자가 봐도 잘생겼다고, 여자들이 가만 놔두지 않는 녀석이라고, 진원이 장난 삼아 시은이 너까지 반하면 안 돼~ 하기까지 했던. 진원은 허세나 과장이 거의 없이 진솔하게 말하는 사람이었지만 긴가민가할 정도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데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막상 실물을 보고 나니 진원의 말들이 모두 이해되고도 남을 정도의 미모를 지닌 사람임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잘난 외모의 남자마저 사진이 실물을 제대로 담지 못한다는 것도 확인했다. 진원의 전화기에서 본 사진에서도 분명 그는 흔치 않은 미남자였지만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었다. 그보다 선이 굵고 남성적인 외모의 진원이 내게는 훨씬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요한의 큰 키 - 아니 막상 마주서니 내가 힐을 신어서인지 그렇게까지 크지 않은 것도 같았지만 - 와 작은 얼굴이 만들어낸 신체의 황금비율이나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은은하게 풍겨오던 장미향, 무엇보다 어지간한 여자들보다도 어여쁜 얼굴이 무색한 낮은 목소리의 뜻밖의 어울림은 사진은커녕 영상조차 다 담아내지 못할 수준으로 매혹적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내 남자친구가 미처 못 챙긴 내 가방을 챙겨준 것을 보면, 여자들이 그의 눈부신 외모에만 반한 것은 아님도 분명했다. 저 남자 대체 뭘까… 내가 말을 섞어본 남자 중에는 없는 종류의.
기침은 멈췄네. 천천히 나와.
진원의 말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화장실 문을 닫았다. 그리고 문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세면대 앞에 서서 벽에 붙은 원형거울을 바라보았다.
나는 거울 하단부에 파랗게 빛나는 조명 버튼을 눌러 벽거울 가장자리에 들어온 백열전구색 조명에 자세히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다행히 생각보다 화장은 많이 지워지지 않았다. 새하얗게 질린 낯빛과 핏기를 잃은 입술은 화장을 고치면 가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눈 화장은 공들여 했던 덕분인지 마스카라도 아이라인도 멀쩡해 보였다.
그러나 거울 속에 비친 내 눈동자가 불안정했다.
화장으로도 가릴 수 없는 눈빛이 마구잡이로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 흔들리는 것은 내 마음일 것이다.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이미 흔들린 마음. 걷잡을 수 없이 뛰어대는 심장.
과연 나는 화장을 고치듯 마음도 고쳐서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해야 할 때 말하고 웃어야 할 때 웃을 수 있을까. 그렇게 나의 정혼자와 그의 절친과 보내기로 약속한 시간들을 버텨낼 수 있을까.
나는 두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길게 내뱉었다. 그렇게 세 번을 반복했다. 그리고 눈을 떴다. 심호흡 덕분인지 심박수가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눈에 힘을 주어 거울 속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노려보았다. 정신 차려, 안시은. 싸구려 로맨스 소설 같잖아. 그냥, 그냥 잘생겨서, 생각보다 너무 잘생겨서 그런 것뿐이야. 여자들이 가만 놔두지 않는다잖아. 나도 여자니까, 눈이 있으니까, 자연스러운 반응일 뿐이야. 익숙해지면 괜찮아질 거야. 내가 좋아하는 타입도 아닌데 뭘. 괜찮아. 괜찮을 거야.
머릿속으로 되뇌며 나는 빠르게 얼굴을 매만졌다. 팩트를 덧바르고 립글로스를 입술에 발랐다. 그다음 머리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다시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켠 뒤 나는 씩씩하게 화장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나는 멈춰섰다.
진원이 아닌 그가, 진원의 친구 요한이 문 앞에 서있었다.
잠깐, 화장실 갔어요. 나한테 부탁해서.
…네.
나는 요한의 얼굴을 피해 바닥으로 시선을 돌리며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아 보이네요.
네. 감사합니다.
그 순간 우리 또래 여자 둘이 팔짱을 끼고 떠들며 화장실 앞 통로로 들어왔다. 남자가 서있었으므로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남자의 얼굴을 보고 더 놀라는 것 같았다. 여자들은 남자와 나를 번갈아 힐끗거리며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들은 나를 보고 부러워하는 것도 같았고 무시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중 한 여자는 삐죽거리며 다른 여자에게 귓속말을 했고 말을 들은 여자는 소리 내어 웃었다.
찰나의 시간이었으므로 그 모든 것은 내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방금 전 화장실에서 화장을 고치며 흐트러진 정신을 다잡았다고 생각한 것이 내 착각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 등에 힘을 주어 최대한 몸을 똑바로 세웠다. 그리고 한 걸음을 내디뎠다. 벽에 기대어 선 요한의 앞을 막 지나치려는 참이었다.
진원이, 사랑해요?
그의 물음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