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부터 나의 마음은 이미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버스에서 첫 번째로 하차하자마자 나는 진원의 집을 향해 뛰었다. 그것도 모자라 맨꼭대기 층에 멈춰 있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못하고 계단으로 뛰어올라갔다. 그렇게 하고 있는 내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어리석은 인물이 된 듯 느껴졌다.
아무리 서둘러도 기계보다 빨리 계단을 오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텐데도 기어코 계단을 뛰어오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 식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닥치고 보니 나 역시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내 남자의 집은 7층이었으므로 크게 힘든 정도가 아니라는 점이 다행이었다.
거칠어진 숨을 진정시키며 나는 조심스럽게 카드키를 진원의 현관문 키패드에 댔다. 미리 깨 있었다면 모르지만 나의 방문으로 그의 단잠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나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현관문을 여닫으려 노력했다. 문이 다시 잠기는 소리가 난 뒤 나는 잠시 현관에 그대로 서서 진원의 기척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주방과 싱크대를 등지고 TV를 향해 놓인 소파가 보였다. 모두 비어 있었지만 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들리더니 곧 내가 사준 잠옷차림의 진원이 나왔다.
시은아!
내가 들어오는 소리를 전혀 못 들었는지 진원은 깜짝 놀라했다. 나는 그대로 그에게 안겼다.
무슨 일 있어? 연락도 없이…
진원의 따뜻한 목소리에 나는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동시에 조금 전 집앞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르며 다시금 공포감이 밀려왔다. 나는 더욱 힘주어 진원을 껴안았다.
아니야. 그냥… 보고 싶어서.
정말?
아까 전화하고 나서… 참을 수가 없어서…
목소리가 떨려나왔지만 진원은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알았어도 그저 자신을 향한 마음 때문이라고만 여겼을 것이다. 그는 나를 안은 팔에 힘을 주더니 내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어제오늘 너무 영광인걸. 고마워.
진원이 다정히 말하고는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올렸다. 나는 눈을 떠서 진원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순간 진원의 눈동자에 당혹감이 어렸다.
눈이 빨갛잖아. 운 거야?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지만 진원은 집요했다.
무슨 일 있었던 거지. 그렇지?
내가 요한의 일을 말하면 과연 어떻게 될까. 말하는 것이 옳을지 몰랐다. 그러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아직 그 후폭풍을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나는 다시 진원의 품에 안겼다.
아니야. 그냥… 무서운 꿈을 꿨어. 혼자 있기 무서워져서.
무슨 꿈?
너무 무서워서 말하기도 싫어.
그래서 아까 전화한 거야?
응.
진원이 한 손은 나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냥 말하지. 내가 바로 갔을 텐데.
괜찮아질 줄 알았지…
나는 진원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눈을 내리깔고 대답했다.
진원이 내 머리를 쓰다듬던 손으로 내 턱을 살짝 들어올려 입을 맞추었다. 언제나처럼 부드럽고 정중한 키스였다. 진원은 다시금 나와 눈 마주치고 내 이마에, 두 눈덩이에, 양볼에 차례로 정성스레 입맞추었다. 나는 그가 다시금 키스해주길 바랐으나 그는 마치 우는 아이 달래듯 다시 나를 안더니 등을 쓸어주는 것이었다.
이젠 괜찮아. 괜찮고 말고…
어릴 적 함께 방을 썼던 할머니가 해주었던 것처럼 진원은 나를 토닥여주었다.
다시 눈물이 났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품만큼이나 진원의 품은 포근했다. 나는 요한으로 인한 긴장감과 두려움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진원은 언제나 내가 믿고 기댈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진원에게 이성으로서의 매력이 없었다면 그와 사귀지 않았겠지만 그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결혼을 마음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이미 충분히 좋은 남자였지만 앞으로 살아가며 좋은 남편이자 훌륭한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 없었다면, 겁이 많아 까탈스러운 내가 감히 행복한 결혼생활을 꿈꾸지는 못했을 것이다.
내가 그토록 믿고 의지하는 내 약혼자의, 형제 같은 절친 때문에 악몽 같은 일을 겪은 것은 유감이지만, 어디까지나 요한은 옥에티 같은 존재일 뿐이다… 장미에 돋친 가시 같은 존재일 뿐이다. 가시는 결코 꽃잎에 닿지 못한다. 꽃은 벌과 나비의 것이다. 마찬가지로 진원은, 요한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다.
그래, 나의 것.
나는 진원의 품을 빠져나와 마치 전제군주와도 같은 위풍당당한 기세로 그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키스했다. 내가 먼저 키스하는 일이 드문 데다 이와 같이 맹렬히 달려든 적은 없었으므로 진원이 살짝 당황한 것 같았지만 나는 모르는 척했다. 이내 진원의 팔이 나를 끌어안고 대응해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오랜만에 열렬하게 키스했다. 그리고 시종일관 내가 더 적극적이었다. 진원과는 물론이고 그 이전의 어떤 남자와의 키스를 통틀어서도. 어쩌면 앞으로도 다시 없을.
몸이 달아오른 진원이 나를 안아올렸기 때문에 우리의 키스는 중단되었다.
…해도 돼?
진원이 거칠어진 호흡으로 속삭였다. 나는 대답 대신 그의 목을 끌어안고 키스했다.
그는 나를 안아올린 채로 침대로 갔다. 불과 몇 걸음을 이동하는 그 짧은 순간에도 우리는 서로의 타액을 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침대에 눕혀지자마자 다시 내 입안으로 파고드는 진원의 뜨거운 입술과 혀를 그 어느 때보다 기쁜 마음으로 듬뿍 받아들였다.
진원이 격렬한 키스 후 평소처럼 상의를 벗으려 할 때 나는 평소와 달리 상체를 일으켜 그의 탈의를 도왔다. 그러면서 그의 탄탄한 등과 가슴을 어루만지며 그에게 입맞추었다. 진원이 또 멈칫거렸다. 나는 모른 척하고 그의 하의에 손을 댔다. 그때 그가 아, 샤워… 라고 말했다.
우리는 늘 관계 전후로 샤워를 빼먹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나의 수칙이었고 진원은 다소 불만스러워하기는 했지만 위생문제였으므로 이내 수긍했었다. 진원은 아마 전날 자기 전에나 씻었을 것이고 이미 내가 좋아하는 비누향은 희미했다. 그러나 오히려 자신의 체취가 더 나를 자극했다는 것을 그는 몰랐을 것이다.
괜찮아.
나의 숨결 역시 이미 그만큼이나 흐트러져 있었다. 그건 아마 진원도 알아챘을 것이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나를 눕히며 입술이 아닌 목덜미에 입을 맞추기 시작한 것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크고 단단한 손은 옷 사이를 비집고 내 맨살을 훑고 있었다.
내 신음소리가 평소보다 격렬해서 진원의 손길이 평소보다 성급해진 것인지, 그의 손길이 예전보다 거칠어서 내 신음이 예전보다 요란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순식간에 우리 사이에는 말 그대로 실오라기 하나 남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에도 진원이 내 온몸을 만지고 빨고 핥는 것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은 것은 평소와 달랐다. 그것이 조금도 신경쓰이거나 서운하지 않을 정도로 진원의 몸짓과 숨결은 충분히 뜨거웠고, 나 역시 열락에 들떠가고 있었다.
진원이 피임기구를 착용하는 짧은 시간에 속이 타들어가고 그가 나를 배려하여 천천히 내 안에 들어오는 것조차 신경질이 날 정도로, 나는 발정기에 든 짐승처럼 잔뜩 날서 있었다. 마침내 우리가 하나가 되었을 때, 나는 육체적으로는 물론이고 정신적으로도 일종의 포만감을 느꼈다. 갑자기 식욕이 솟구쳐 자극적인 음식을 폭식할 때보다 만족스럽고 짜릿했다.
내가 받아들인 내 몸의 주인이 어서 빨리 남성으로서의 본능을 앞세우길 나는 기대했다. 그러나 내 다정다감한 상대는 그 사이 배려 넘치는 연인으로 돌아와 여느 때처럼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나는 눈을 떠 그를 바라보았다.
사랑해…
마치 짧은 전희 속에서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을 사죄라도 하듯, 평소보다 더 애틋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나는 눈을 감았다. 보통 때 같으면 진원이 두세 번 같은 말을 하고 나서야 겨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나도… 정도로만 수줍게 대답했겠지만, 지금의 나는 이상하게도 전혀 수줍지 않았다. 그렇다고 소리를 내어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눈을 떠서 진원의 쌍꺼풀이 없어도 시원하게 뻗은 두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부드럽고 그윽했다. 나는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고 그의 잘생긴 이마와 오뚝한 콧날에 차례로 입맞추었다. 이어 그의 입술을 덮쳤다. 진원이 나를 끌어안으며 마침내 내가 기다리던 움직임을 시작했고 나 역시 최대한 그를 깊이 받아들이고자 하는 본능에 순응했다.
오랜만이었고 내가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이었기 때문이었는지 진원의 움직임이 금방 격렬해졌다. 이상하게도 그것이 나를 더 만족시키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진원의 흐름에 맞춰 몸을 움직였기 때문에 진원은 더욱 타올랐고 나 역시 그랬다.
짧지만 강렬한 정사가 끝나고 우리는 그대로 껴안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땀에 젖은 진원의 몸이 끈적였지만 싫지 않았다.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몸이었다. 나는 한 손으로 그의 뒷목에서부터 군살 없는 등을 거쳐 탄탄한 엉덩이까지 몸의 굴곡을 따라갔다. 내 손길이 그의 허벅지에 닿았을 때 진원이 내 손을 붙잡았다.
왜에…
내가 투정하듯 말했으나 진원은 붙잡은 내 손을 천장을 향해 누워 있던 내 얼굴 옆에 놓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걱정되려고 해. 자기 같지 않잖아.
좋았던 거 아니야?
당연히 좋았지. 신나서 나 혼자 달렸잖아. 미안해.
바보, 뭐가 미안해. 나도 좋았는데. 싫었음 말했지.
그런 거 같긴 했는데…
할 거 다 해놓고 뒤늦게 쑥스러워하는 것은 늘 내 몫이었다. 그런데 반대쪽이 훨씬 재미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미안하면 얼른 씻고 와요. 우리 결혼하기로 하고 처음이니까 이대로는 좀 아쉽지 않아?
아 그렇구나. 생각도 못했네.
진원이 벌떡 일어나 그대로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의 지극히 건강한 남성다운 뒤태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모습이 개구쟁이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결코 내가 포기할 수 없는. 포기하지 않을. 그 어떤 협박에도.
진원에 이어 내가 간단히 씻고 나왔을 때 그는 욕실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알몸의 그는 샤워타월 하나만 두른 나를 번쩍 들어안아 침대로 갔다. 나는 놀라는 바람에 나온 외마디 감탄사 외에는 싫다거나 안된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자신감을 얻은 진원은 박력이 넘쳤다.
우리는 서로를 안고 또 안았다. 설령 그대로 숨이 멈추더라도 조금의 아쉬움도 남지 않을 만큼 뜨겁게, 열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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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오후, 예정일이 며칠 남았는데 피가 비쳤다.
진원과 함께 느지막이 일어나 브런치를 먹으러 나갔을 때였다. 원래는 식사 후 그동안 진원이 바쁜 탓에 보기를 미루었던 개봉 영화를 함께 관람하고 저녁까지 먹을 예정이었으나 내 몸상태의 변화로 인해 모두 취소되었다. 진원은 곰살맞게도 제철 생과일이 가득 올려진 생크림케이크를 비롯한 달달한 먹을거리들과 함께 나를 우리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진원과 함께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계단실 쪽을 눈에 담지 않으려 애썼지만, 전날 같은 곳에서 일어난 일을, 정확하게는 당시 느꼈던 공포감의 재생을 막을 수는 없었다. 요한이 내 목을 잡았을 때의 느낌이 갑자기 생생해서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도착했을 때 들리는 소리가 나를 현실로 돌아오게 해주었다.
많이 안 좋아?
엘리베이터 안 거울에 비친 나를 보며 진원이 물었다. 내가 보기에도 귀신이라도 본 듯 새파랗게 질린 표정이었다.
아… 조금. 쉬면 괜찮을 거야.
나랑 있으면 마음껏 못 쉰다니… 아까도 말했지만 섭섭해. 결혼할 사이인데.
…결혼하면 싫어도 같이 있어야 한다잖아. 나중엔 오늘을 그리워하게 될지도 몰라.
그건 자기 얘기지요.
큰소리는.
진원의 말에 핀잔을 주기는 했지만, 아마도 그의 말이 맞을 것이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진원은 늘 내 곁에 있어줄 것이다. 나 역시 최대한 그러고자 노력하겠다는 마음이지만, 그런 결심이 없었다면 감히 진원의 끈질긴 청혼을 마침내 수락하지는 않았겠지만, 그가 내게 해주는 것만큼 그를 지키고 돌볼 자신은 솔직히 없었다.
진원이 나의 법적이자 실질적인 보호자로서 더없이 잘 해낼 것을 이미 믿고 있지만, 내가 그의 보호자의 역할을 해야 할 때 내가 잘 해낼 수 있을지는 나 스스로도 믿을 수 없었다. 그저 내가 시험에 드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그리고 진원이 이런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눈치채지 못하기를 나는 간곡히 바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