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하얀 달, 검은 그늘 [1부 完]

by 지구인



이제 그만 가야겠네.


진원의 말이 아쉽게 느껴지는 것이 나 스스로도 의외였지만, 나는 드러내지 않았다.


진원과 나는 사장님과 요한이 우리의 작별 인사를 받아줄 수 있는 짬이 생길 때까지 잠시 자리를 옮겨 있었다. 연주는 어차피 혼자 왔으므로 입구 쪽에 가까운 자리로 옮겼다. 진원과 내가 일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자들이 와 앉는 것은 예상대로였다.


잠시 후 사장님과 요한이 카운터로 돌아왔을 때 진원과 나는 그 앞으로 갔다.


이제 그만 저희 갈게요. 손님들 많아지는데 자리 계속 차지하고 있기도 죄송하고.


붙잡고 싶지만 둘 다 내일 일찍 출근하니 보내드려야지. 그래 잘 가. 반가웠어요. 잘 가고 다음에 식사 한 번 합시다. 뭘 좋아하시나.


제가 대접해야죠, 형님.


뭐 누가 사면 어때? 그래도 내가 한참 위이니 내가 사고 싶긴 한데.


정히 원하시면 그렇게 하시고요. 저야 좋죠.


시은 씨 좋아하는 걸로 다음에 꼭 먹자고. 요한이까지 넷이서.


네.


내가 너무 주책이 없었어도 이해해줘요. 진원이 오랜만에 봐서 너무 반가워서 좀 업됐었어요.


아닙니다. 좋은 말씀 많이 들어서 좋았습니다.


좋은 말씀은 뭘… 고마워요.


사장님이 요한을 보았다.


배웅해줄 거지.


네.


요한이 허리에서 앞치마를 풀며 대답했다.


나도 그만 갈래요. 자리도 없고. 어차피 오빠 바쁜데 뭐.


연주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래. 여자애가 혼자서, 일찍일찍 다녀야지. 착하다.


요한이 정말 친오빠라도 된 듯 말했다.


잘 가요. 이제 종종 와줬으면 좋겠는데.


그래 볼게요. 시은이도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진원이 대답하며 나를 보았다.


네, 분위기도 좋고 술도 맛있고 사장님도 좋으시고 다 좋아요. 친구들이랑 오고 싶네요.


그러면 감사하죠. 친구들 꼭 모시고 와요. 내가 서비스 팍팍 드릴 테니까. 잘 가요.


네. 안녕히 계세요.


우리 넷은 함께 가게를 나섰다.


내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진원이 말했다.


형님도 오랜만에 뵙고 너 일하는 것도 오랜만에 보니 좋더라. 자기도 괜찮은 거지. 얼굴 보면 알아.


응, 생각보다 좋았어. 사장님도 멋있는 분이더라.


응. 좋은 분이야. 정이 넘치는 분이고.


건물 입구에 다다랐을 때 진원이 요한에게 말했다.


어서 들어가. 손님들 기다린다. 연락할게.


그래. 잘 가요, 시은 씨.


네, 안녕히 계세요.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요한에게 인사했다.


이토록 편안한 마음으로 그를 보게 될 수 있을 줄을 몰랐다. 그렇게 되더라도 앞으로 한참 걸릴 줄 알았었다.


나는 마치 전투에 임하는 장수처럼 내 마음에 튼튼한 갑옷을 덧씌우고 무거운 창과 방패를 들고 나왔었지만 요한은 맨몸으로 평화협정을 제안해 왔다. 물론 나를 무장시킨 것은 그의 선제공격이었지만 나를 무장해제시킨 것 역시 그의 사과였다. 무엇보다 그가 만들어준 칵테일 두 잔의 공로가 컸다.


연주 씨는 어떻게 가요?


아, 먼저 가세요. 차 곧 올 거예요.


진원의 물음에 연주가 답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그럼 먼저 갈게요.


우리는 건물 근처에 주차해놓은 진원의 차를 향해 움직였다. 요한은 우리가 떠날 때까지 건물 앞에 서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차가 출발했다. 사이드미러로 연주가 그에게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오늘 정말 기분 좋아 보이네.


진원이 운전하며 말했다.


응. 싫어싫어 하면서 자기한테 끌려간 게 미안할 정도로 좋았어.


요한이, 멋있었지?


그러게. 솜씨가 좋아서 놀랐어.


자기가 좋아할 줄 알았지. 뭐든 열심인 사람 좋아하잖아.


응. 나는 그렇지 못하니까.


다른 많은 보통의 사람들처럼 내 삶은 지루하고 심심했다.


평범한 부모에게서 평범하게 태어나 평범하게 자랐다. 별다른 굴곡 없이 평온하게 살아온 것도 운이 좋다면 좋은 것이겠고 배부른 소리겠지만, 특출난 재능도 남다른 열정도 커다란 포부도 없이 산다는 것은 때로 공허하고 허무했다.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다면 격렬한 스포츠를 즐길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게을렀고 몸치였다.


그래서 나는 누워서도 즐길 수 있는 만화와 영화와 드라마들을 좋아했다. 힐링이 아니라 현실의 내게는 부족한 자극을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공포영화나 범죄물, 나아가 막장물을 선호했고 판타지 장르도 즐겨서 진원을 비롯한 남자친구들을 놀라게 하곤 했다.


그러나 아무리 자극적인 것들을 쉴새없이 보고 읽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간접 경험이었다. 그래서 나는 연애를 했다.


어쩌면 상대방 그 자체보다는 연애라는 경험이 주는 설렘 자체와 일대일의 관계라는 특이성을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나의 연애는 오래 가지는 못했다.


생각해보면 다 괜찮은 남자들이었고 나를 많이 좋아해주었다. 내가 먼저 고백한 적도, 이별을 고한 적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먼저 다가왔고 먼저 떠났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붙잡지 않았다. 떠나는 그들이 남은 나보다 힘들어 보였던 것은 내 알량한 자존심의 투영이었을까.


집에 돌아와 숨죽여 운 적은 나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다시 많고많은 볼거리들로 돌아가면, 그것들로 내 머릿속을 채우고 나면, 더는 슬픔이나 외로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어쩌면 너무도 차가운 사람인지 몰랐다.


그래서 진원과는 오히려 별탈없이 지냈는지 모르겠다.


그는 나와는 달리 연애 말고도 하는 일이 많고 매사에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자주 못 만난다고 투정하는 법이 없는 내게 고마워했고, 그의 바쁜 일정과 동선에 맞춰주는 내게 감격했다. 자주 만나는 것은 내게는 다소 귀찮은 일이고, 그에게 맞춰주는 것은 매일같이 집과 직장만을 오갈 뿐인 내게 소소한 재미거리가 되기 때문이었는데도 그랬다. 그가 너무 좋아하고 고마워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솔직히 말하기도 했지만 그때조차 진원은 우리가 천생연분이라고 답해서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그때 처음 진원과의 미래를 꿈꾸었던 것 같다.


내가 만난 남자들 중에서 가장 열정적이고 가장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던. 거기다 사회적 조건으로 봐도 가장 훌륭한 남자.


나의 엄마는 대놓고 그를 절대 놓치면 안 된다는 말을, 심지어 진원 앞에서까지 해대서 그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엄마보다는 살가운 편인 아버지는 그가 삼대독자인 점과 그의 부모님이, 특히 시어머니 자리가 독실한 ‘예수쟁이’라는 점을 문제삼아 보았지만, 엄마는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아들은 하나 있어야지, 그리고 제사도 안 지내는데 얼마나 좋아, 라는 말로써 아버지를 간단히 무력화시켰다.


나 역시 엄마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나는 방식만 다를 뿐이었다. 그러나 그 다른 방식 때문에 나는 엄마를 견디기 힘들 때가 종종 있었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타입인 엄마 역시 행동이 굼뜨다며 나를 답답해할 때가 많았으므로, 더 늦기 전에 떨어져 사는 것이 모녀 사이에 오히려 도움이 될 것이다.


근데 시은아.


진원이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친구들 데리고 오겠다는 거… 안 그랬음 좋겠는데.


왜?


진원이 좋아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분명 그 중에 또 요한이한테 반해서 쫓아다니거나 할 사람 있을 텐데… 자기가 거기에 얽히는 게 좀 그래. 중간에서 곤란하지 않겠어? 내가 경험자야.


그새 요한의 미모에 익숙해져버린 것일까. 나는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겪은 일들이 있으니 자기 친구나 지인이면 요한이는 오히려 조심할 거야. 하지만 또 모를 일이잖아. 무엇보다 자기가 조금이라도 곤란해질 일을, 녀석 때문에 만들기 싫어. 요한이랑 자기가 불편해지는 것도 바라지 않고.


…일리가 있네. 내가 술집에 데려갈 정도의 사람들 중엔 그럴 만한 사람은 없는 것 같지만… 조심해서 나쁠 거 없겠지. 그치만, 잘될 수도 있는 거잖아?


맞아. 그럴 수 있지. 그러면 좋고. 하지만 혹시 연주처럼 그런 일 생기면? 더 심한 일 생기면?


아마도 내가 모르는 일들이, 진원이 내게 말하지 않은 사건사고들이 더 있는 모양이었다.


근데 사장님께 말씀드렸잖아. 나 빈말 싫어하는 거 알면서.


그 정도야 인사치레로 넘어갈 수 있는 정도잖아. 정 맘에 걸리면 내가 따로 말씀드릴게. 대신 우리 둘이 자주 가면 되지. 더 좋아하실걸.


…그래.


나는 요한의, 꼭 행운이지만은 않을 아름다움을 떠올렸다.


밝은 낮에 음식점에서의 불편해하던 모습과 어두운 바에서는 활기찬 모습이 대비되어 어쩐지 측은했다. 자신의 미모를 한껏 이용할 생각이라면 오히려 한낮에 거리를 활보해야 할 텐데, 그렇게 숨어다니다가 해가 지면 가게에 틀어박혀 있는데도 사장님 말에 따르면 여자관계가 복잡하다니, 거기에 나까지 힘을 보탤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사람도 참, 힘들겠어…


응?


요한 씨 말이야. 아직 결혼할 만한, 아니 뭐 결혼은 아니어도 진지하게 사귈 만한 사람도 못 만났다는 거잖아?


…아직 젊은데 뭘.


그래도 자기는 결혼까지 한다는데, 아무리 절친이라도 서운하고 그러지 않겠어? 자기가 좀 더 신경써줘. 나 미워하지 않게.


요한이가 자길 미워할 일이 뭐 있어.


진원이 웃었다. 나는 웃지 않았다.


분명 술에 취했고 내게 말하지 않은 어떤 폭발할 계기가 있었다고는 해도, 요한은 눈물까지 흘렸었다. 누구에게도 진원을 줄 수 없다고까지 했다.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구였어도, 진원이 사랑하고 결혼하겠다고 나선 여자에게라면 요한은 그렇게 쫓아왔을 것이다.


…내가 요한 씨라도, 형제 같은 친구가, 나는 아직 제대로 사귀는 사람도 없는데 결혼한다고 하면 서운할 거 같거든. 친구 뺏기는 것 같고.


뭐? 말도 안 돼. 질투한단 얘기야, 요한이가 자기를? 나를 두고?


각별한 사이라며. 형제 같다며.


에이, 그래도 그건 아니지. 이상하잖아. …여자들은 그럴 수도 있나 보지? 남자들은 그런 거 없어.


남자들은 그런 거 없을지 몰라도, 요한은 그런 게 있을 수도 있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랬다. 보수적인 진원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형제에 방점을 찍는다면… 뭐 나도 하랑이가 시집간다고 하면 서운하긴 하겠네. 어떤 놈이 데려가나 예의주시할 거고. 그치만 그건 여동생이니까 그렇지. 남자애였으면 안 그럴 거 같은데? 오히려 코찔찔이던 이놈이 어느새 다 커서 장가갈 때가 됐네, 뿌듯할 거 같은데? …아무래도 자기가 너무 간 거 같다.


진원은 재밌다는 듯 또 웃었다. 나는 여전히 웃을 수 없었다.


요한이 사과했고 재발방지 약속까지 했지만, 나 역시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쿨하게 받아들였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여전히 찜찜함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요한의 비현실적인 미모에서 느껴지는 그늘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명확히 말할 수 없기에 더욱 불길한.


나 역시 그처럼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기를 얼마나 바라는지 진원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그리고 그는 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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