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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같은 곳, 다른 생각 [3부 完]

by 지구인 Mar 06. 2025



연주의 치기 어린 청혼에 당사자는 물론이고 모두가 어이없어했다.


그 자리에 있던 어느 누구도 연주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채 제각기의 생각에 잠겼고, 시은은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다친 발목을 걱정한 요한이 따라 일어섰으므로 연주의 마음은 초조해졌다. 연주는 잠깐만! 을 외치며 다급히 누군가에게 전화했으나 시은과 요한은 아랑곳 않고 방문 쪽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그들이 방문을 열기도 전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연주가 날아갈 듯한 얼굴과 발걸음으로 그들을 제치고 방문을 활짝 열었다.  


엄마! 연주가 방문객에게 안기며 좋아라 방방 뛰었다. 으이구 내가 못 살아. 연주에게 엄마라 불린, 단정한 중단발에 우아한 투피스 차림을 한, 딸만큼이나 작은 체구의 여성은 딸을 떼어낸 뒤 요한과 시은에게 실례인 줄은 압니다만 말씀 좀 나누죠. 차분히 얘기하고는 객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수행원으로 보이는 체격 좋은 남자 두 명이 각기 들고 온 의자 두 개를 객실 안에 들여놓고는 방 앞을 지키고 서는 것이 보였으므로 요한은 탈출을 포기했다. 연주는 모친의 팔짱을 끼고는 좌절한 두 남녀를 우쭐대며 바라보았다.


여자분하고도 할 얘기 있으니 잠깐 와요. 서울에야 어떻게든 보내드릴 테니.


연주모가 시은에게 살짝 눈길을 주면서 말하고는 딸과 함께 소파에 가 앉았다.


요한이 난처한 표정으로 시은을 보았다. 시은은 더욱 골치 아파진 상황이 짜증스러웠으나 이왕 이렇게 된 것 부딪힐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시은은 샌들을 벗어 들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요한이 그녀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그 사이 태수가 방문 앞에 놓인 의자들을 옮겨 소파 맞은편에 내려놓고 요한과 가깝게 앉았다. 다시 요한의 옆에 놓인 의자에 앉은 시은이 휴지로 가볍게 먼지를 털어낸 발에 다시 신발을 신었다.


이모, 어떻게 된 거야?


언니가 사장님 끌어들였잖아. 그래서 나도 엄마한테 부탁했지.  


설마 이모… 연주랑 같은 생각은 아니죠?


지수가 의자를 끌어당겨 연주모에게 다가앉으며 물었다.


누가 봐도 모녀관계인 똑 닮은 이목구비에 왜소한 체격인 연주모녀와 건장한 체구의 지수는 누가 봐도 혈연관계임을 알아채기 어려워 보였다. 또한 딸만큼이나 동안인 탓에 연주모는 삼십대 중후반인 조카딸과 또래로 보였다.   


무슨 아침 드라마 같아서 이렇게 하고 싶진 않았는데, 어떡해. 이 천방지축을.


연주모가 한숨을 쉬며 답했다. 그녀의 철부지 딸은 또다시 엄마에게 안겨들며 신나했다. 그러나 연주모는 딸의 어리광을 마냥 받아주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딸에게 약속대로 묻는 말에만 입을 열 것과 그렇지 않으면 당장에 집으로 돌려보내겠다고 다짐을 받은 뒤 입을 열었다.


보다시피 오냐오냐 키워서 이 모양이네요. 미안합니다. 뒷조사한 것도 양해 부탁드려요. 마냥 반대만 하면 반항심만 커질 거 같아 지수 붙이고 지켜보고 있었어요.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연주 아버지도 나이가 많아요. 전처에게서 얻은 자식이 셋이나 있죠. 이복오빠들은 요한 씨보다도 더 나이가 많아요. 회장님은 이미 병석에 누워 계시고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고… 솔직히 말해 나만큼은 아니라도, 하나밖에 없는 딸이 나이 차이 많은 남자와 결혼하는 게 반갑지 않아요. 지금이야 젊다지만 금방 마흔 되고 쉰 되고… 세대차이도 세대차이지만 나는 연주가 늙은 남편 수발들며 늙지 않았으면 좋겠거든요. 늙어 할머니 돼서도, 오히려 남편의 보살핌 받으며 살았으면 하거든요.


연주모의 젊어 보이던 얼굴이 그늘이 지며 순식간에 제 나이를 찾았다.


그런데 그보다는, 나는, 혼자되는 게 무서워요. 회장님 가시고 나면 얘랑 나 둘만 남는데, 벌써부터 무서워 죽겠어요. 그래서 내 딸은 그러지 않았으면 하거든요. …그런데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원래도 그런 말이 있는데 어려서 정말이지 여러 번 죽다 살아난 애라 미안하지만 일단 부탁해야겠네요. 여자들 다 정리하고 우리 연주에게만 충실하겠다고 약속해주면, 연주가 어디까지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요한 씨가 원하는 건 다 지원해줄 수 있어요. 뭐 외국 유학도 가능하고, 연주만 좋다면, 우리 딸만 행복하다면, 그렇게 해줄 수 있어요. 어때요, 생각해보겠어요?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보복이 있는 겁니까?


보복이라…


연주모는 싱긋 웃었다. 웃는 모습마저 딸과 똑같았다.


그런 건 없어요. 회장님이 한창때였다면 납치라도 해서 결혼시키셨겠지만 난 그러진 않아요. 그래, 결혼이 너무 부담스러우면 그냥 동거는 어때요? 3개월, 6개월, 1년…? 아직 어리니까 그 정도 시간이면 얘도 싫증나 제풀에 떨어져나갈 수도 있죠. 그럴 경우엔 가까운 일본에라도 나가 있는 게 좋겠지.


엄마!


그러나 연주모는 한 손을 들어 보였고 연주는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그도 아니면, 연주가 포기할 수 있게 다른 여자와 결혼할 수 있어요? 그쪽한테 물어보죠.


연주모가 시은을 보았다.


혹시 지금 결혼 포기하고 옆에 있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어요? 파혼에 따른 부대비용은 내가 지원해줄 수 있는데, 그렇게 할래요?


엄마! 대체 무슨 소리야?!


연주가 벌떡 일어나며 항의했으나 그녀의 모친은 침착하다 못해 냉정했다.


약속 잊었어? 아빠한테 가?


여전히 요한들에게 시선을 준 채로 연주모가 차갑게 내뱉었고 그녀의 딸은 겁에 질린 얼굴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연주는 흐느끼기 시작했고 지수가 그녀를 달래며 침실로 데려갔다. 연주모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음, 현실적으로 그건 당장은 어렵겠네. 아님 둘이 뭐 어디 멀리 섬이라도 도망치겠어요? 그것도 지원해줄 수 있는데.


대체 무슨 말씀을…


태수가 참다못해 입을 열었으나 요한이 그의 말을 막고 나섰다.


아닙니다. 제가 일방적으로 그런 거예요. 그럴 일은 없습니다.


…여자분은 어때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식장에 들어가고, 아무렇지도 않게 살 수 있겠어요?


세 사람의 시선이 쏠렸으나 시은은 아무 대답도 못했다. 다만 하얗게 얼굴이 질렸을 뿐이었다.


뭐 바로야 대답 못하겠지.


연주모가 일어서며 말했다.


일주일, 아니 열흘 시간 드리죠. 내가 말한 것 중 어느 것에라도 결정되면 지수 통해서 연락 줘요. 연주는 내가 데리고 가니 걱정 마시고, 지수는 두고 갈 테니 차 이용할 일 있으면 하세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연주모는 고개를 까딱 숙여 보이고는 방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서연주, 라고 소리 높여 딸을 불렀다. 잠시 후 훌쩍이며 나온 연주는 요한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구고 모친의 뒤를 따라 방을 나갔다. 지수도 조용히 모녀 뒤를 따라나갔다.


연주모에 대한 예의차 의자에서 일어섰던 태수가 비워진 소파로 옮겨 철퍼덕 주저앉았다. 요한과 시은을 소파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게 된 그는 두 남녀에게 번갈아 시선을 주었다. 당분간 영화 보러 극장은 안 가도 되겠다, 농담 삼아 그렇게 말하려다 태수는 그만두었다. 두 명의 청자 모두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뭐라 말하는 대신 태수는 길게 한숨을 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시 비가 오고 있었다.


잠시 후 지수가 돌아오자 그 소리에 정신이 든 듯 시은이 아 기차… 라고 말하며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은 운이 좋다면 늦지 않게 역에 갈 수 있어 보였다.


죄송한데 저희 역까지만 태워다주실 수 있을까요?


요한이 일어나며 지수에게 말하자 태수가 정색을 했다.


너는 왜 가?


그럼 다친 사람을 혼자 보내요?


…차라리 내가 갔다오마. 아니 아예 댁까지 모셔드릴게.


안 돼요. 꼭 함께 있으셔야 해요. …혼자 두지 마세요.


시은의 머릿속엔 두 가지 생각뿐이었다. 무사히 귀가해야 한다는 것과 요한을 사장에게 맡기는 것. 허리에 양손을 올린 채 세 사람의 오가는 얘기를 듣던 지수가 그냥 다 같이 올라가시죠, 라고 말해 논란을 종결시켰다.


******


서울로 올라가는 자동차 안은 빗소리, 타이어와 와이퍼의 마찰음, 그리고 운전자가 작게 켜놓은 클래식 음악 외에는 조용했다. 뒷좌석에 앉은 시은은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고 있고, 요한은 그런 시은에게 뭐라 말을 하려다 그만두는 것을 거듭하고, 그런 요한을 조수석에 앉은 태수는 힐끗거리고, 그런 세 사람에게 시선을 두지 않으려 지수는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객실을 나설 때 진원에게서 전화가 왔으나 시은은 감히 받지 못하고, 하루종일 밖에만 있다 보니 배터리가 모자라 전화기를 꺼두겠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이어 어머니에게도 같은 내용의 메시지를 보내고 휴대폰을 종료했다. 이젠 죄책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집에 가야 한다는 당위만이 컴퓨터의 명령어처럼 시은을 조종했다. 그 외에는 어떤 느낌도 어떤 생각도 없이, 마치 누군가의 꼭두각시가 된 것처럼 그녀의 손은 저절로 움직였다. 어차피 어둡고 비까지 내려 별다른 게 보이지 않는데도 저절로 고개는 창밖으로 향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주차장에서 차를 타기 직전에는 요한에게 진원의 전화가 왔다. 요한은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평소에도 진원이 요한에게 더 많이 연락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요한도 시은처럼 진원에게 거의 연락을 하지 않았었다.


…어.


- 어디야? 뭐 하고 있냐?


뭐, 그냥. 너는?


- 나야 모처럼 집에서 혼술 중이지. 월요일까지 쉰다면서 어디 놀러갈 계획은 없어?


뭐 내가 그런 거 하는 사람이냐…


- 하긴 이렇게 비가 오락가락이니 어디 가기도 그렇네. 주말 중에 하루 형님하고 셋이 한 잔 할까?


…일정 없어?


- 뭐 이번 주말엔 없고 오늘 당장 만나고도 싶은데 혹시 시간 되냐?


…만나러는 안 가?


- 응. 어머니 뵈러 갔다가 올라오고 있대. 근데 배터리가 없다고 전화 못한다고. 마중 나가고 싶은데 놀래키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이라 조심스럽네. 주말에나 보겠지.


그렇구나. …오늘은 너무 늦었고, 형한테 일정 물어보고 다시 연락 줄게. 응.


아이고, 내 염통이야… 요한이 통화를 마치고 차에 탈 때 태수가 가슴을 치며 말했다. 드물게 집에서 혼술을 할 때면 요한과 태수에게 전화를 걸어오곤 하는 진원을 잘 알기에 태수는 전화기를 붙잡고 안절부절못했으나 다행히 그에게는 전화가 오지 않았다.


태수는 속이 상했다. 요한이 짠하긴 해도 진원이 보기 드물게 좋은 청년이라는 것이 새삼 떠올라서였다. 그렇다고 연주의 집착과 연주모의 배려를 가장한 협박에까지 시달리는 요한을 나무랄 수도 없었다. 그는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까지 된 것인지 골치가 아프다 못해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도 말없이 그저 자동차의 앞유리만 바라보고 있었다.


지수도 마음이 갑갑했다. 범 같은 전실자식들의 눈치를 보느라 독해져만 가는 이모가 마음 아프고, 달래도 보고 나무라도 보았지만 아직도 어린 마음에 첫사랑에 대한 어리석은 꿈을 놓지 못하는 동생도 안쓰러웠다. 무엇보다 그 무모한 모녀를 막을 힘이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괜히 태수까지 끌어들여 안 봐도 될 꼴을 보게 한 것도 후회스러웠다. 그래서 그녀도 말없이 그저 운전만 했다.


요한은 연주모의 말들을 되새기고 있었다. 연주와 동거든 결혼이든 하라고, 연주가 싫증 나고 질려서 떠나게 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아니 그보다 시은이 결혼을 포기하고 어디 단 둘이 도망가서라도 살고 싶다면 그것도 지원해줄 수 있다고 하는 제안에 대해서. 그리고 연주모의 말에 아무 반응도 없던 시은을 떠올렸다. 마치 지금 옆자리에 앉아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 모습처럼.


지금 시은은 혼을 잃고 창백한 껍데기만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차라리 화를 냈으면. 나를 원망했으면. 요한은 그러나 시은에게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하고 그저 그 칠흑 같은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그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물속에 머리끝까지 빠져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깊이깊이 가라앉아버리고 싶었다.


마침내 진주색의 값비싼 외제차가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시은은 그제야 감사하다는 인사만을 남기고 모두의 시선을 피하고 부축도 거절하며 하차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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