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몇 초만 맞아도 온몸이 다 젖도록 그렇게 비는 세차게 내렸다. 우산도 없이 그대로 맞은 곳곳들이 따갑다 못해 아플 정도로. 그렇지 않아도 가뜩이나 얇은 여름옷은 몸에 달라붙어 거의 맨몸끼리 닿는 느낌이었다. 시은은 뒤늦게 부끄러움을 느끼고 요한에게서 떨어져나왔다. 남자로부터 전해오던 온기가 사라지자 바로 으슬으슬했지만 대신 머릿속도 차갑게 식었다.
이젠 말해야겠어요.
빗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기에 요한은 빗물 때문에 제대로 뜨지 못하는 눈으로 시은을 보았다. 젖은 마스크가 닿는 느낌이 싫어 그는 그것을 벗어던졌다.
말해야겠다고! 더는 안 되겠다고!
안 돼!
요한도 소리쳤다.
네가 말하면 더 안 돼!
그럼 어떡해? 이렇게까지 됐는데 어쩌라고! 계속 숨겨?
…내가 떠날게. 내가 떠나면 돼.
요한은 나지막이 말하고는 차들이 다니는 큰길 쪽으로 뛰다시피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말을 듣지 못한 시은은 어디 가! 외치며 그를 쫓아갔다. 그러나 빗줄기가 너무 세서 시은의 몸이 휘청였고 그 바람에 오랜만에 신은 굽 높은 샌들바닥의 물기에 발바닥이 미끄러졌다. 여자는 발목을 접질리며 넘어졌다. 요한이 놀라 뛰어와 부축해 일으켰으나 시은의 하얀 원피스는 홀딱 젖은 데 이어 얼룩까지 져버렸다.
괜찮아? 걸을 수 있겠어?
시은이 얼굴을 찡그린 채 대답도 못하자 요한은 여자의 치렁치렁한 치맛자락을 조심스레 수습하며 양팔로 들어올렸다. 시은은 무릎 위로 살짝 올라오는 치마를 다리에 꼭 붙이며 주변에 행인들이 없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안도하는 데만도 기운이 다 빠져 요한의 손길을 거절할 경황이 없었다. 요한이 몇 발짝 가지도 않았는데 호텔 정문에서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고급 외제차 로고가 박힌 커다란 장우산을 쓰고 손에 같은 우산을 든 채 요한 쪽으로 뛰어오더니 남녀에게 우산을 씌워주었다.
요한은 놀라서 시은을 떨어뜨릴 뻔했다.
일단 가자.
이태수 사장이었다.
요한은 입술을 깨문 뒤 시은을 안은 손아귀에 힘을 주며 걸음을 옮겼다. 정문에서는 칵테일 바에 연주와 함께 오던 ‘언니’가 착잡한 표정으로 커다란 호텔 타월 두 장을 들고 그들을 맞았다. 그녀를 알아본 순간 요한은 어찌된 일인지 순간적으로 알아차렸다. 시은을 만나러 이곳에 오면서 느꼈던, 내리막길로 한없이 구르는 듯했던 기분이 무의식적인 징조요 경고였음을 요한은 깨달았다. 그러나 그가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연주 육촌언니 김지수 씨. 연주 경호 겸 수행해주신대.
…이렇게 인사하게 될 줄 몰랐네요. 유감이에요.
요한에게 타월을 건네고 시은에게는 수건을 크게 펼쳐서 덮어주며 지수가 말했다.
시은 씨, 발은 괜찮아요?
…부축해주시면 걸을 수 있습니다.
시은도 그 잔망스러운 연주가 개입했다는 것을 깨닫고 태수의 물음에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연주의 친척 언니가 시은을 붙잡아주었다. 태수가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도대체가!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웬일로 여자랑 놀러 간다고 해서 정신차렸나 했더니, 지수 씨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속을 뻔했잖아. 그래놓고 너 이 새끼, 아까도 내 전화에 뻔뻔하게 거짓말하고!
…이거… 호텔 거잖아요. 그냥 빌린 거예요, 아니면…
타월로 젖은 머리칼을 닦으며 요한이 물었다.
연주가 방까지 잡아놓으셨어. 스위트룸 없다니까 그 아래 큰 방으로, 편하게 있다 가자며 두 개나 잡더라. 연주 아버지가 무슨 회장님이라며? 지수 씨 아니었으면 너 더 큰일날 뻔했어. 무슨 짓을 했을지 알 게 뭐냐. 심지어 회사 직원들까지 붙였다던데. 우리 같은 서민한텐 뭐 재벌이 따로 없겠더라. 알고 있었냐?
…그렇게까진 몰랐어요.
연주는 그저 부모님이 강남에 건물 좀 가지고 있다고, 그래서 돈 걱정은 없다고만 말했었다. 그 아이의 도움으로 시은의 뒷조사를 하면서도, 그 아이의 정체에 대해서는 일말의 의심도 관심도 두지 않았던 것을 요한은 뒤늦게 후회했다.
그래, 알았으면 그렇게 어처구니없게 당했을까. 그러니 상대를 봐가면서 해야지. 어쩌다 그런 제정신 아닌 애한테 걸려서는, …아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사장님. 그래서 제가 도움 요청드린 거잖아요.
지수가 태수의 말에 숨을 길게 내쉬며 대답했다. 주변이나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그들 뿐이었으므로 태수의 장탄식이 이어졌다.
이러려고 화실 선생까지 팔아서 온 거냐? 내가 안 된다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기어이… 이제 어쩔 거냐. 연주가 사람 시켜서 두 사람 영상까지 다 찍었는데. 실시간으로 보고받으면서 아주 여유만만하게 룸서비스도 비싼 걸로만 시켜먹고 수영장 못 가서 아쉽다고 하질 않나… 난 이런 데 처음이라 쫄려죽겠고만 연주는 제 집이 따로 없더라.
…근데 왜 안 내려왔어요?
연주의 성격이라면 당장 내려와서 소리 지르며 욕하며 날뛰어야 하는데 조용한 것이 오히려 불길해 요한이 물었다.
말했잖아, 아주 여유만만이라고. 너희 둘이,
태수가 시은의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방에 같이 있는 현장까지 붙잡아야 한다고 내버려두라는 걸 내가 참을 수가 없어서 쫓아내려 왔다. 어쨌거나 비가 이렇게 퍼붓는데 감기 걸리기 딱 좋잖냐.
마치 그 말이 기폭제가 된 듯 시은은 다시 오한을 느끼기 시작했다. 몸이 떨리고 윗니와 아랫니가 부딪혔다. 그녀 옆에 있던 지수가 알아차리고 물었다.
괜찮아요?
…감기 걸렸나, 걸릴 건가 봐요.
그러니까 내 말이! 시은 씨도 이게 무슨 꼴이에요. 진원일 어떻게 보려고. 영상 보니까…
사장이 소리치다가 입을 다물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서였다. 프런트가 있는 층에서 투숙객들 몇 명이 올라탔다. 기계가 움직이며 나는 희미한 소리와 누군가의 작은 기침소리 외에는 적막이 흐르자 요한은 엘리베이터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젖은 몸 탓인지 분명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데도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으나 싫지 않았다. 차라리 홀가분했다. 그야말로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으니, 이제는 정말이지 끝을 보겠지. 아마도 파멸이겠지만. 그래도 그게 낫지 않을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휘적거리는 것보다야. 다만 요한은 시은이 걱정이다. 넘어져 다친 데다 감기까지 걸리면, 이제 곧 역에 가야 할 텐데 어떡해야 할까.
시은은 머리까지 감싼 타월을 턱 아래에서 양손으로 꼭 붙잡고 있었지만 몸이 계속 떨리고 있었다. 하루종일 드문드문 느껴왔던 한기가 폭우에 촉발되어 한겨울의 습기를 품은 것과 같이 뼛속까지 시린 추위를 느껴서였지만, 충격과 공포 같은 격렬한 감정들이 한꺼번에 몰려와서이기도 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간절히 바랐지만, 방금 전 분명 시은은 요한을 거부하지 않았다. 동조하고 순응하였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면 시은 씬 필요 없잖아요. 나만 가면 되지. 시은 씬…
태수가 누른 30층에 도착하자마자 요한이 말했다.
나도 방을 잡아놨어요. 거기서 옷이랑 몸 좀 말리고 쉬고 있어요. 연주는 나 혼자 만나면 되니까.
…아니에요. 나도 같이 만날래요. 우릴 찍었다면서요?
내가 해결할게요. 무슨 말할지 알 것 같으니까.
그걸 아는 놈이 그래. 아무리 돈이 많다지만 이제 스물인 기집애가 보통이 아냐. 나도 일단 너를 붙잡아 가야 하니까 따라오긴 했는데, 걜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다. 아주 질려버렸어.
다시 센 화장과 옷차림으로 돌아간 연주는 창가 소파에 앉아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는 그쳤으나 하늘은 여전히 흐렸고 밤이 다가와 강은 검어지고 교각과 도로의 불빛들이 보였다. 마치 그 아버지의 직위인 것처럼 잔뜩 거만하게 앉아 있던 연주는 일행을 보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요한과 시은을 노려보기만 했다.
에어컨 꺼라. 우리 춥다. 아니면 말리고 올 시간을 주든지.
요한의 말에 지수가 재빨리 냉방기를 끄고 시은에게 여분의 타월과 목욕가운까지 건넸다. 시은은 젖은 타월을 벗고 새 타월로 물기를 더 닦아낸 후 두꺼운 가운을 걸쳤다. 순간적으로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요한에게는 태수가 똑같이 했으나 요한은 그저 새 타월만 받아들었다.
오빠, 말 못 들었어? 다 찍어놨다니까.
그래. 그걸로 나한테 바라는 게 뭔데? …네가 이럴 수도 있다는 걸 생각했어야 했는데. 이미 전적이 있는데. 나는 그저 시은 씨 보고 싶다는, 봐야 한다는 생각밖엔 아무것도 없었어. 그래도 나를 원하니? 이런 나를.
요한이 물기를 마저 닦으며 연주의 맞은편에 놓여진 의자에 걸터앉았다.
아, 너도 그 여자들처럼 그런 거라면, 내 얼굴과 몸이 탐나서 그런 거라면, 그래 뭐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그 정도야 해줄 수 있지. 방도 두 개나 잡아놨다며? 잘 됐네. 나도 하나 잡아놨거든. 지금 당장 갈까?
연주가 벌떡 일어나 요한의 뺨을 때렸다. 역시 손이 매웠으나 요한은 피식 웃었다.
사람을 뭘로 보고! 내가 그런 여자들 같은 줄 알아? …언니.
연주가 시은을 보았다. 여전히 날 선 눈빛이었다.
언니랑 얘기하는 게 빠르겠어. 오빠 놔줘요. 안 그럼 영상이랑 사진이랑 언니네 오빠한테 보낼 거야. 이름이 뭐랬지 진원이었나? 바에서 나한테 명함도 준 거 알죠? 뭐 그거 없어도 알아낼 수 있지만 그렇다고요.
그렇게 해요, 그럼.
시은이 요한 옆 의자에 엉덩이를 들이밀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러나 부어오른 발목이 새삼 아파서 곧 얼굴을 찡그렸다.
시은 씨…
요한이 당황해 그녀를 보았으나 시은은 다시 연주만큼이나 노여운 눈빛으로 말을 쏟아냈다.
요새는 뭐 자료를 지워도 다시 되살릴 수도 있는 세상인데 그 말을 어떻게 믿어요? 도청은 안 했나요? 몰카는 안 찍었나? 마음대로 하라고. 그런다고 사람 마음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뭐 그렇게 해야 속이 풀린다면 해야겠지.
요한과 지수가 당황스러워 할 말을 잃은 사이 사장 역시 당혹스러운 얼굴로 나섰다.
시은 씨, 왜 그래요? 쟤 무슨 짓 할지 모른다고. 몸만 저래 조그맣지 아주 속은 백 년 묵은 불여시가 따로 없어. 그렇게 말하면 안 돼요. 잘 달래야지.
그러나 시은은 벌떡 일어나 요한에게 한 손을 내밀며 내뱉었다.
방 키 줘요. 얼른 수습하고 나 기차 타러 가야 돼.
어이가 없네. 아니 뭐가 그렇게 당당해? 결혼할 사람 친구랑 그런 짓 해놓고?!
연주도 벌떡 일어서서 소리쳤으나 시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래, 난 그런 여자야. 그럼 넌 뭐야? 싫다는 사람 그렇게 쫓아다니면서 사람까지 심어놓고 지저분한 협박이나 하고. 차라리 저 사람처럼 직접 쫓아다니면서 마음을 담아 고백하지 그랬니. 그랬으면 요한 씨도 나처럼 널 거부하지 못했을지도 모르는데. 아하, 부잣집 아가씨라 우리 같은 서민하고는 생각하는 게 다른가 보네. 행동하는 것도 다르고. 그렇게 해서 요한 씨랑 나 떼어놓으려고? 축하해. 소원성취했네. 요한 씨한테 바라는 게 뭔데? 하룻밤 자주면, 아니면 네가 원할 때까지 몸 대주면 되는 거야?
아니! 나는 그런… 그런 쌍스러운 여자 아니라니까! 누구처럼 여러 남자랑 그러는 여자 아니라고! 나, 순결… 나 혼전순결인가 뭐 그거라고요. 오직 한 사람하고만, 한 남자한테만 그럴 거라고. 뭣보다 내숭백단 그쪽한텐 그런 말 듣고 싶지 않거든?
그럼 뭔데. 그거 외에는 내가 줄 수 있는 게 없어. 그것도 네가 입 다문다는 조건 하에서만 가능한 건데.
요한의 말에 연주는 숨을 크게 내쉬더니 또박또박 말했다.
우리, 결혼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