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45화. 폭우

by 지구인 Feb 25. 2025



식사를 마치고도 둘은 말이 없었다.


요한은 왠지 시은에게 말을 못 걸겠다. 시은은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당연하게도 시은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앞에 앉아 있는 요한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그를 어떻게 잘 달래어 더 이상은 민망한 상황에 처하지 않게 할 수 있을지를. 그러나 바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화장실을 다녀올까, 아니면 아예 자리를 옮겨볼까. 왜 담배를 피우러 나가지도 않는 거지…


몇 시 차예요? 올라가는 거.


문득 휴대전화를 확인하여 진원에게서 아직도 얘기 중이냐는 메시지가 온 것을 보고 응, 이따 연락할게, 라고 답을 보낸 시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시작은 가볍게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였다.


난 9시까지 있어야 되는데.


난… 안 끊었어.


요한이 혼잣말하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요.


몰라… 내려오는 것만 생각했어. 너를 봐야겠다고만 생각했어. 다른 건… 생각 안 했어.


진원의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이악한 자신은 또다시 요한의 그 말에 흔들렸을지도 모른다고 시은은 생각했다. 시은은 잠시 눈을 감고 쓰게 웃었다.  


…장요한 씨, 잊지 말아요. 우리 둘 다 진원 씰 사랑한다는 거.


……


그리고 진원 씨도 우리를 사랑한다는 거.


……


그래요. 나 솔직히 그날, 요한 씨가 잠결에 그러고 나서… 그게 잘 안 잊혀지더라고요. 근데 그건 한때의 욕정인 거고… 이젠 꽤 괜찮아졌고 또… 시간이 흐르면 완전히 괜찮아질 거예요. 요한 씨도… 취해서 또 아파서 자신도 모르게 그랬던 거니까. 그리고 우리집 앞에 온 것도, 내가 어머님 만나러 온다고 하니까 너무 흥분해서… 발작버튼… 뭐 그런 거니까.


…다 들었어요? 다른 궁금한 건 없어요.


요한도 잠시 쓰게 미소하더니 상대방에게 대답 대신 물었다. 그래, 왠지 그럴 것 같았지. 그때 진원이가 그랬던 것처럼 너도 그럴 것 같았지. 그의 물음에 시은은 당황했다.


아니 뭐…


우리 엄마 얘기… 내 엄마 얘기도 들었겠죠. 내 아버지 얘기도. 그 잘난 아버지 얘기도.


그 뒤 어머님 소식은… 전혀 모르나요?


알아보지도 않았어요.


요한이 내뱉듯 답했다.


아버진… 화냥년이라고 했어요. 오갈 데 없는 여자를 거두어주었더니 그렇게 보답했다고. 그때야 무슨 뜻인지 몰랐고 나중에야 알게 됐죠. 엄마가 행복하지 않다는 건 그 어린 나이에도 나도 알고 있었어요. 그래도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자식을 버리는 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그래요, 아마도 나를 원해서 가진 건 아니었겠죠. 그래도 결국 날 낳은 건 엄마잖아요. 근데 고작 남자 때문에 자식을 버려요. 그럼 아버지와 다를 게 뭐야. 그래서 찾지 않았어요. 그래도 엄마라고 아직도 여전히 꿈속에 나오고 날 버리고 잘 사나 또 다른 자식들을 낳았을까 궁금할 때도 있지만, 언젠가부터 포기했어요.


진원의 모친 말에 따르면 요한의 생모는 남편에게 쫓겨난 것이었지만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일까, 시은은 생각했다. 그 뒤 친모가 겪은 기가 막힌 일은 요한도 알게 되었을까. 그 불행한 여인은 그 뒤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요한의 아름다우나 어둔 그림자가 드리워진 얼굴을 바라보며, 그나마 어설픈 위로는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시은은 생각했다.


어머님이,


시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진원 씨 어머님이… 너무하셨더군요. 그래도 말씀 들어보니까 미안해하시는 마음은 있는 것 같았어요. 그러니까 이제 요한 씨도 마음을 좀 풀었으면…


요한의 얼굴이 냉랭해지자 시은은 아차 싶어서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 사람이, 진원 씨가 왜 우리 결혼을 통해서 요한 씰 다시 가족으로 데려오려고 하는지 잘 알겠고… 그리고 어머님 말씀 들으면서 난 다시 알게 됐어요, 요한 씨와 나의 공통점을. 진원 씨를 사랑한다는 건 이미 말했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 사람 부러워하는 거. 나도 가끔은 진원 씨 남매한테 거리감이 느껴져요. 서민가정에서 태어난 나하곤 다르게 자랐으니까. 나 같으면… 못 견뎠을 거예요. 곁에서 보기만 하는 것도 힘들어서, 견디기 힘들어서 차라리 도망쳐버렸을 것 같은데 요한 씨는 어떻게 그렇게 진원 씨를 사랑했는지, 사랑할 수 있었는지… 하랑 씨까지도. 그런 일 겪으면서도 말예요.


말하면서 시은은 마음의 격동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차라리 이렇게 요한을 바로 만나 허심탄회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요한 씨 보면 내가 더 초라해져요. 그 사람에 대한 내 마음이 요한 씨에 비하면 너무 보잘것없는 것 같아. 곧 부부가 될 건데도 나는 너무나도 모자란 것 같아. 정말이지 요한 씨한테서 그 사람을 빼앗는 기분이란 말이에요. 이런 마음은 들면 안 되는 거 아니냐구요.


그러면 포기할 건가, 진원일? 결혼 안 할 거야?


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냥 기분이 그렇다는 거지.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은데 결혼해서 열심히 그 사람 마음에 보답해야죠. 더 많이 사랑해야죠… 그래서,


시은이 요한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그래서 제발… 부탁할게요.


시은이 간절한 얼굴과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더는 이러지 말아줘요. 오늘도, 어머님 때문에 그랬다고 생각할게요. 어머님이 내게 무슨 말을 할지, 내가 혹시라도 진원 씨한테 다 말해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 때문에 왔다고. 충분히 이해하니까 우리 오늘, 우리 둘 다 사랑하는 진원 씨를 위해서 약속해요. 우리 일… 알면 진원 씨 분명히 상처받을 거예요. 요한 씨에게는 물론이고 나한테도요. 그러지 말아요, 우리. 내가 그러지 않게 해줘요. 부탁할게요.


……


우리 친구같이, 나도 친구처럼 생각해줘요. 그리고 우리 결혼하고 나면 요한 씨한테 어울릴 여자도 진원 씨나 나도 열심히 찾아볼게요. 그러니까 요한 씨만, 내가 예전에 말했던 것처럼 진원 씨 둘도 없는 친구니까 그 사람 행복 빌어주고 선 넘지 않으면…


아니.


요한은 그러나 시은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굳게 다물었던 입술을 떼었다.


이제 알았어. 헷갈렸는데, 이렇게 너를 보니 알겠어. 그래, 진원일 사랑해. 그런데 이젠 너도 사랑하게 됐나 봐.


요한은 담담히 말했다. 시은은 할 말을 잃었다. 이건 또 무슨… 그녀의 야심찬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것만 같다.


네가 보고 싶어서 왔다는 것밖에 몰랐었는데, 그게 왜 그런 건지 잘 몰랐었는데. 이제 알겠다고.


여전히 차분하게 말한 요한은 가방에서 시은의 모자를 꺼내 도도록하게 모양을 다듬은 뒤 탁자 위에 소리도 없이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계산서를 짚고 일어섰다. 한 박자 늦게 볼캡을 알아본 시은은 그것이 요한에게 있는 이유를 떠올리고 얼굴이 붉어졌다. 물건의 부재를 알아챘을 때 당시의 상황이 되살아나 귀에까지 피가 몰렸던 것까지도 함께 생각났다. 잔잔해졌던 호수에 다시 돌팔매질이 시작되었다.


요한은 마스크를 쓰고 유유히 걸어나가 음료와 식사대를 지불하고 건물에서 나갔다. 그제야 시은은 모자를 가방에 쑤셔넣고 황급히 그의 뒤를 쫓아갔다. 건물 사방이 유리로 되어 있었으므로 요한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는 호텔 정문에서 우측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건물을 끼고돌아 흡연구역에 다다른 그는 마스크를 턱에 끼고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흡연자는 몇 명 없었다. 시은은 멀찍이 떨어져 서서 요한이 흡연을 끝내기를 기다렸다. 요한이 시은을 발견했지만 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끽연에만 몰두했다.


왜요.


두 개비를 연달아 피우고 난 요한이 시은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뭐 더 할 말 있어요?


시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보낼 수 없어서 나도 모르게 쫓아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자신에게 모자를 돌려주고 마치 할 일을 다했다는 듯 알아서 자리를 떠나주기까지 했는데 왜 그를 따라왔는지는 시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겨우 마음을 다스리고 평온을 되찾았나 싶었는데 그깟 없어도 그만일 싸구려 야구모자 하나로 또다시 요동치는 심장은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


같이 올라가요. 내가 차표 알아볼게요.


시은은 요한을 혼자 두면 안 된다는 강렬한 직감이 들었다. 같은 열차에 눈에 보이는 곳에 그를 태워 사장에게 인계해야 할 것만 같았다. 시은은 앱을 켜서 차표를 알아보기 시작했으나 요한이 시은의 양손 위에 한 손을 덮더니 아래로 내렸다.


그만둬. 내가 알아서 해.


요한이 전에 없이 강하게 말하자 시은이 그를 보았다. 그러자 그가 피식 웃더니 속삭였다.


대신 위에… 같이 올라갈래요?


그 순간 엄청난 소리의 천둥이 울렸다.


놀라 제풀에 감겼던 눈을 뜨고 시은이 하늘을 보았다. 바로 위의 하늘은 아직 해도 지지 않고 멀쩡한데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하늘은 성난 먹구름이 가득해 밤처럼 어두웠다. 아무래도 곧 이곳에도 폭우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날씨를 걱정하는 시은을 보며 요한은 다시 힘없이 웃었다. 못 들은 걸까, 못 들은 척하는 걸까. 어느 쪽이든 다시 말할 배짱은 없었으므로 그는 호텔 정문 쪽으로 향했다.


…역에 바래다줄게요. 잠깐 안에 있죠.


시은은 얌전히 그를 따라갔지만 속으로는 사장에게 따로 연락해서 요한을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때마침 요한이 전화를 받았다. 아, 하룻밤 자고 가기로 했어요. 죄송해요, 형. …네, 여기도 곧 쏟아질 거 같아요. 네.


사장님께 말했어요? 여기 온다고?


아니. 알았으면 안 보내줬겠죠. 형도… 다 알아요.


요한의 얼굴은 어두워졌지만 시은은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하룻밤 자고 간다는 요한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얼른 호텔 안 화장실에 가 사장에게 전화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빨리 걷기 시작했는데 오히려 요한은 걸음을 멈추었다.


미안한데, 혼자 가요. 안 되겠어.


시은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금방이라도 비는 쏟아질 것 같고 화장실 생각을 해서인지 일도 보고 싶은데 이 남자는 도저히 혼자 버려두면 안 될 것 같아서.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일단 안에 들어가요.


그러나 요한은 절박한 시은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기만 할 뿐 미동조차 없었다. 시은이 제발 좀… 이라고 울 듯한 얼굴이 되었을 때 요한은 그녀를 부둥켜안았다. 시은은 뿌리치지 못했다.


태수 형한테 말하고… 형한테도 미안해서 다 그만두려 했는데, 그만둬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시은을 껴안은 두 팔에 더욱 힘을 주며 요한이 중얼거렸다. 그의 품에 안긴 시은의 감은 두 눈에는 어느새 물기가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이게 끝이겠지. 이제 다시는… 만날 일 없겠지. 만나주지… 않겠지.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는데… 막상 닥치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시은도 같은 마음이었다. 요한을 잘 다독이고 자신은 잘 다그쳐야 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데, 막상 요한이 갈팡질팡하는 모습에 머리로 아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어져버리지 않는가. 시은은 요한에게 다시금 동질감을 느꼈다. 그래서 양팔을 올려 그의 몸을 감쌌다.


투둑투둑.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캄캄해진 사위에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이 젖은 얼굴로 요한이 말했다.


널 갖고 싶어.


이어진 그의 입맞춤을 시은은 거부하지 않았다. 어느새 홀린 듯 남자의 감정에 공명한 여자는 저항을 잃었다.


빗줄기로 변한 빗방울들이 순식간에 장대비가 되어 하늘이 무너진 듯 쏟아졌다.

이전 18화 44화. 귀향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