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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세 사람

by 지구인 Feb 13. 2025



그 뒤의 이야기들은 듣지 않아도 시은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고 그렇게 자라다 한창 예민한 시기에 그렇게 마음을 다쳤으니 요한이 정여사의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피하려고만 하는 것은 당연했다. 요한이 좀 더 못되고 독했더라면, 정여사에게 편견에 가득 찬 속물이라 욕하며 대들었을 것이다. 김원장에게는 적극적으로 아내를 막지 못한 것을 탓하며 위선자라 지적했을 것이고, 하랑에게는 그야말로 질 나쁘게 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진원에게는 어떠했을까. 너희 부모처럼 너도 가식을 떨었던 거냐며 밀어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여전히 진원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고, 하랑을 친동생처럼 아꼈다. 김원장은 물론이고 정여사에게조차 감사하면서도 죄스러워하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다 실제일 가능성이 높지만 시은의 추정에 불과했다. 요한은 진원을 제외한 세 명에게서는 도망치느라 바빴으므로.


그 중 특히 하랑에게는 옆에서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곁을 주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요한에게서 그토록 지키려 했던 딸의 몸 대신 그 마음을 요한이 가져가버린 것을 알게 되면 정여사는 어떻게 반응할까. 혹시라도 요한이 하랑을 조금이라도 마음에 두었다 해도 그 어머니가 무서워 결코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유일하게 사랑한다 말할 수 있는 진원조차도 만약 자신이 여자였다면 어머니가 둘 사이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라고 요한은 쓸쓸히 말했으니까.


시은은 아들에게 더는 밉보이지 않으려 성에 차지 않는 며느릿감에게 티 내지 않으려 조심하면서도 순간순간 속내를 드러내고 마는 시어머니가 요한에게도 그랬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아들을 그만큼 잘난 여자에게 보내도 서운할 마당에 평범하기만 한 자신을 데려왔으니 그럴 만한 일이라고 시은은 생각해 왔다. 더구나 결혼하면 진원은 명실공히 그 아내의 사람이 되고 마니까. 이미 거리감 있는 아들을 완전히 뺏기는 꼴 아닌가.


그러나 요한은 진원도 하랑도 정여사에게서 뺏아가지 않았었다. 그럴 마음조차 없었다. 요한을 가지고자 한 것은 하랑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이미 속설에 갉아먹힌 그 모친은 결국 순진무구한 내 딸을 후렸다고, 그렇게 난봉꾼인 아비와, 그런 남자와 배꼽을 맞추더니 그도 모자라 또 다른 남자와 살을 섞은 어미를 꼭 닮았다고, 그 더러운 피가 어디 가겠느냐며 저주를 퍼붓지 않을까.


혹시라도 요한이 자신에게 한 짓들을, 그리고 그 와중에 자신은 육체적으로나마 요한에게 흔들렸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그야말로 악다구니를 퍼부을 정여사를 상상했던 것이 떠오르자 시은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소름이 돋았다. 진원이 아는 것보다도 정여사가 알게 되는 날이 더 두려워졌다. 시은은 서둘러 따뜻한 물로 속을 덥혔는데도 싸늘한 느낌은 가시지 않았다.


그때부터였지. 나하고는 눈도 못 마주치는 것이. 그저 피하기만 하더라고. 차라리 원망하거나 대들거나 그랬으면 서로 솔직하게 맘 터놓고 풀어버렸을지도 모르지. 근데 어디 애가 그럴 만한 성격이니? 그것도 제 엄마랑 똑같아. 그렇다고 내가 괜히 다가갔다가 더 악화시킬까 봐 걱정도 되고. 그래서 서로 불편해지고 만 거지. …뭐 어쩌겠니. 어차피 정식으로 입양한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남남인 사이에.


정여사가 나지막이 말했다.


차라리 이렇게 된 거 아예 연이 끊어졌으면 속 시원하겠는데, 진원이가 그러고 있으니 어떡하면 좋니. 아니 아예 결혼을 기화로 그앨 다시 우리 가족에 넣으려고 하는 모양인데 어떻게 걱정이 안 되겠니? 그래서 내가 그런 거다. 정말 피할 수 없는 일 아니면 굳이 만나지 말라고. 이런 악연이 또 어디 있겠니, 참…


그런데 진원 씨는 그럴 마음이… 어머님 같은 생각이 전혀 없는 거죠?


그렇다니까! 말했잖아, 다시 친형제처럼 데려오려는 것 같다고. 결혼하고 나면 아마 적극적으로 그애도 짝 지어주려고 할 거다. 지금이야 당장 결혼식 치러야 하고 일도 많다고 하니. 근데 결혼하면 서른 줄에도 들었고 했으니 더 적극적으로 굴겠지. 아마 늬들 커플끼리 친하게 지내고 아이들 낳아서도 그러고 싶은 거겠지. 안 그러겠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네가 중심을 잘 잡아야 된단 얘기다. 원래 남자들이란 결혼하고 나면 엄마보다 마누라 말만 듣는 건데 진원이는 뭐 이미 그때부터 그랬으니 더 그러겠지. 그러니 네가 휘말리지 말고 우리 아들한테, 아 네 말은 들을 거 아니야. 출신도 그렇고 학력도 그렇고 하는 일도 그렇고 모든 게 다 안 맞지 않느냐고 얘기 좀 잘해보란 말이다, 응?


시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이미 요한에 대한 안타까움이 커져버렸기 때문에.


혹시라도 그를 떨쳐버릴 만한 거리가 있나 해서 시모를 찾아왔던 것인데, 예상보다도 더 신산스럽고 고단했던 요한의 지난 삶 때문에 시은은 오히려 맥이 빠졌다. 자신조차 이러한데 오랜 세월 옆에서 그 꼴을 다 보고 함께 있었던 진원이 요한을, 그가 자신에게 저지른 짓들을 다 말하지 않는 이상 놓아버릴 것 같지가 않았다.


설령 정여사의 말처럼 시은이 이간질을 한다고 해도 성공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을 뿐더러 무엇보다 이미 시은의 마음도 진원에 가까워졌는데. 그처럼 가엾은 요한을 밀어내버리지 못할 것만  같은데. 시은은 절망스러워졌다.


그나저나 너도 뭔가 느끼거나 한 거 아니니?


시은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고 정여사가 물었다.


아니야? 그애가 멀쩡하게만 보였다면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물어봤겠니? …그래, 내가 뭐 아주 세상에 드러내 놓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는 건 안다. 뭐 나도… 그애한테 미안한 마음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야. 그애도 뭐 아까도 말했지만 무슨 죄겠니? 그런 부모한테 태어난 게. 하지만 또 어떡하겠니? 그렇게 태어난 것도 다 제 팔자인 거지. 감당해야 될 몫인 거야. 그애 몫의 십자가.


정여사가 차분하고도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게 태어났으면 제 부모처럼 어떻게 교회라도 열심히 다녀야 될 텐데 그것도 안 하고. 근데도 그것마저 진원이 따라 그러는 건지 아니면 뭐 지 에미애비가 그렇게 교회 다녔어도 결국 그렇게 십계명에 어긋나는 짓만 하고 다녀서 넌더리가 났는지 모르겠다만. 진원이가 다니자고 했으면 아마 다녔을 텐데 진원이부터 뭐 싫다고 난리니. 그러니 너도 다행인 줄 알아라. 진원이가 우리 하랑이같이 우리 따라서 열심히 교회 다녔으면 너도 꼼짝없이 그랬어야 했는데 네 남편이 안 그러고 그렇게 버팀목이 돼주니 얼마나 좋아. 좋아 죽겠지?


정여사가 살짝 눈을 흘기다가 다시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조심해라.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 법이니까. 너에게만 하는 말이다만 조심해. 그앤… 무슨 일인가 저지르고 말 거다. 내가 얼마나 기도하는지… 그 덕분인지 아직까지는 그렇게 큰일은 없었다만. 헌데 진원이가 결혼한다니까 왠지 더 마음에 걸려. 꼭 무슨 사고를 칠 것 같단 말이야. 그나마 이제라도, 너한테라도 털어놓으니 다행이다. 진원이 앞에서야 뭐 이런 말할 수 있겠니? 나만 더 미워하겠지.


네, 어머님… 말씀 잘 알겠습니다. 제가 아직 자식은 없지만 부모 마음에 그럴 수 있다는 거 어느 정도는 알겠습니다.


그래, 너도 자식 낳아봐. 어느 정도 알겠다고? 자식 낳아봐야 완전히 아는 거다.


네. 그런데… 그때 그 사건 이후에 다른 일은 없었나요? 진원 씨가 그 사람 안쓰러워하고 편 들어주고 싶어할 만한, 또 다른 사건은 없었나요?


글쎄다. 뭐 굳이 얘기할 만한 일은… 아니,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미 그랬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우리 하랑이 생각하면 그애가 여자애였으면 하다가도, 또 우리 진원이 생각했을 땐 그애가 남자인 게 천만다행이지 뭐니. 아이고, 그렇게 아기였을 때부터 서로 눈도 떼지 못하는 사이였는데 그애가 여자였어 봐라. 벌써 눈 맞아 살림부터 차렸을지 모르지. 그럼 어떻게 됐겠니? 집안 풍비박산 나는 거지.


요한이 했던 말과 비슷한 얘기여서 시은은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진원을 가운데 두고 그 어머니와 절친은 같은 상상을 하고, 그 결혼상대에게는 눈에 불을 켜고 흠을 찾으려 드는 것이 똑같았다. 그것만큼은, 진원을 몹시 사랑하는 것만큼은 서로에게 지지 않는 정여사와 요한이었다. 그 둘의 마음에 비하면 시은의 진원에 대한 마음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다. 시은은 진원에게 더욱 미안해졌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 얼굴에 걔가 여자애였으면 어땠겠니? 그리고 그렇게 진원일 좋아하는데 우리 진원이가, 걔도 남잔데 어떻게 거부하냐고. 그렇다고 우리 아들이 그러고 말 애니? 책임지려고 했겠지. 결국 결혼한다 했을 거다. 그랬으면 네가 무슨 수로 내 아들이랑 맺어져. 그러니 이젠 네가 막아야지. 더는 나쁜 영향 끼치지 않게 말이다. 너도 벌써 겪었잖니? 네가 살기도 전에 그애 먼저 들였다며 신혼집에. 네가 말랑하게 굴면 결혼해서는 그런 일 없을까.


정여사가 고개를 저으며 찻잔을 들었다.


얼른 아이부터 갖는 게 그나마 방편일 거다. 아무리 친구가 좋다 해도 제 자식보다 좋겠니. 우리 책임감 강한 진원이는 제 아버질 닮아 더욱 가정에 충실할 거다. …그래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산전검사는 받은 거니? 풍진 주사는 맞았어.


네, 아직…


결혼식 준비한다 그랬겠지만 그렇게 얼굴이 상해서야 되겠니. 결혼하는 대로 다이어트 그만두고 몸관리 잘해서 얼른 건강하게 아이 낳아라. 그게 여러모로 너한테도 좋을 거다.


네… 그래야 할까 봐요, 시은이 체념하여 대답하려 했을 때 정여사가 문득 시간을 확인하더니 황급히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어머 얘, 나 가야 돼. 너희 아버지 밥 차려줘야 된다. 아줌마 안 오는 날이거든. 나 간다.


정여사는 시은의 인사도 받는둥마는둥 허겁지겁 가버렸다.


시은은 잠시 그대로 서 있다가 천천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저녁식사를 하러 오는 손님들이 늘어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 소란스러워지고 있었으나 시은은 아까 들렀던 카페에서와 달리 그 소음들에 신경이 곤두서지 않았다.


요한의 삶이 생각보다도 너무 기구하여 정신이 온통 그에 팔려 있어서였다.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심했다. 그리고 진원에게도 요한이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시은은 새삼 깨달았다. 그는 요한을 정말 친형제 이상으로 여기는 게 분명했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부모님에게조차 그 다감한 성품에 그토록 서늘해질 정도로.


그러니 내가 고백하면 진원은 정말 상처받을 것이다. 그렇다고 말을 안 하면 진원은 요한과 계속 함께하려고 하겠지.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까. 나는 이미 흔들리고 있다. 그리고 요한도 너무 가엾다. 그에게서 진원을 빼앗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그렇다고 그대로 두면 나는 점점 더 힘들어진다. 요한과 최대한 거리를 두면서 내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아 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언제까지,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그때 요한이 시은 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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