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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두 아이 (1)

by 지구인 Feb 06. 2025



요한은 입이 짧았다. 조그맣고 마른 것이 꼭 어미를 닮아서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진원과 함께 있으면 그를 따라 요한의 자그마한 입도 오물오물 꽤 열심히 움직이곤 했다. 요한이 먹는 모습을 보고 진원도 또다시 입을 벌리고, 또 그를 따라 요한도 고기 한 점이라도 더 집어먹고.


그렇게 두 아이는 함께 밥을 먹으면 먹성이 좋아졌고, 그렇게 배가 부르면 나란히 누워 잠이 들었다. 역시 무매독자로 자란 진원부는 두 아이가 함께 있는 모습을 유독 보기 좋아했다. 그러면 정여사는 더욱 남편에게 미안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원장의 세 번째 아내는 연년생으로 둘째를 낳았다. 이번에도 아들이었다.


사실 원장은 자식을 더 바라지는 않았다. 딸 하나만 있다가 아들이 둘이나 생겼으니 충분했다. 그러나 남편만큼이나 욕심 많은 그의 새아내는 아이 하나로는 안심하지 않았다. 쉰 살이 넘은 남편에게 연달아 고추 달린 자식을 안겨준 그녀는 기세가 등등했고, 원장은 투덜거리면서도 아내의 뜻대로 뒤늦게 정관수술을 했다.


졸지에 삼형제를 얻어 아들부자가 된 원장은 슬하에 삼대독자뿐인 진원부에게 꽤나 거들먹거렸다. 그 꼴이 보기 싫어서라도 정여사는 둘째를, 되도록 아들로 점지해주십사 열심히 기도했으나 좀처럼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그녀는 원장의 새아내에게 굽신거려서 그 친정어머니가 알려줬다는 한약방을 소개받아 보약을 지어먹는 눈물겨운 노력까지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진원과 요한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해 가을에 원장은 신장에 생긴 심각한 문제를 뒤늦게 발견했고, 겁을 먹은 그는 급격히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그때는 이미 진원부가 독립하여 개원한 후였고  아직은 못미더운 후임자에게는 부원장 직책을 주지 않았으므로 이래저래 원장의 부담이 늘어난 때였다. 그럼에도 원장은 근무시간을 줄였고, 그 때문에 아내와 갈등이 빚어졌다. 아직 유치원도 가지 못한 어린 아들들을 의대입시건 유학이건 뒷바라지하고 여유 있는 노후를 보내려면 원장은 아직 한참 더 많은 돈을 벌어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야무진 일처리로 원장의 환심을 샀던 그의 간호사 출신의 새아내는 자신과 아들들의 미래를 준비하는 데에도 그토록 빈틈이 없었다.


적지 않은 나이의 원장은 늘 자신했던 건강이 나빠지자 마음이 약해졌다. 그는 처가의 재력 때문에 눈치를 보면서도 부지런히 딴짓을 일삼다가 스무 살은 어린 고아나 다름없는 여자에게 아들까지 낳게 하고, 그렇게 얻은 여자를 하루아침에 내쫓고 또다시 임신시킨 다른 여자와 결혼식까지 올리면서도 고개 빳빳하던 그 옛날의 철면피 난봉꾼이 아니었다. 이제 병들어 늙어가는 중늙은이가 된 그는 한창나이인 아내의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그는 아내를 달래기 위해 그녀에게 원무과와 자산의 관리를 일임했다.    


이미 원장의 눈밖에 났던 요한은 부친의 투병생활까지 시작되자 더욱 방치되었다. 연년생 두 아들을 키우느라 바빴던 계모에게서야 말할 것도 없었다. 이제 그녀는 병든 남편을 돌보고 병원살림과 자산관리까지 신경쓰느라 전실자식의 존재조차 잊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매일같이 드나들던 친정어머니를 아예 집으로 모셔와 아이들을 맡겼다.


학교 준비물도 제대로 못 챙겨가는 짝꿍이 안쓰러워 어린 진원은 요한의 것까지 챙겨달라 정여사에게 부탁했다. 그녀는 아들의 부탁을 들어주면서 이럴 바에야 친모의 손에 자라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원장도 그 생각이었던지 아이의 엄마를 찾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가련한 여인은 생활고와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동거남을 칼로 찔러 죽인 죄로 복역중이라는 소식만 전해졌다.


끔찍한 일이지. 그래서 차마 애한테는 알릴 수가 없겠더라. 그래서 아마 그냥 남자따라 집 나간 정도로만 알고 있을 거다. 내 아들도 모르는 일이고.


정여사가 다시금 목을 축이며 말했다.


그녀의 며느리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정여사는 이제는 화가 나려 했다. 얘, 내 얘기 제대로 들은 거 맞니? 그애 엄마가 서방질하다가 살인까지 했다니까! 막장도 그런 막장이 없어. 그런 여자의 자식인데 어떻게 내가 맘 편히 대할 수가 있겠니. 이젠 좀 알겠지? 정여사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정여사는 여전히 알지 못했다. 자신의 며느릿감이 별다른 동요가 없어 보이는 것은 단지 껍데기뿐이었음을.


그동안 집에 틀어박혀 부지런히 섭렵해온 각종 자극적인 콘텐츠에 길들여져 있었고 어느 정도 예상했음에도 그야말로 ‘막장드라마’와 같은 요한모의 사연은 시은에게도 적잖은 충격이었다. 마치 머릿속으로만 알고 있던 일이 현실화한 것 같은, 멀리 떨어져 사는 알지 못하는 타인에게서나 일어나는 줄 알았던 일이 알고 보니 옆집사람의 그것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 사람을… 데리고 오셨어요.


여전히 차분한 태도였으나 목소리에서는 동요가 느껴졌으므로 정여사는 일단 잔소리를 거두기로 했다. 그러나 그래, 옛날 같으면 요조숙녀라 하겠다. 시할머님이 살아 계셨다면 예뻐하셨을 거다… 라는 말도 속으로만 삼켰다.


정여사는 병석에서조차 사람을 맞을 때엔 등을 꼿꼿이 펴고 앉았던 시모를 떠올렸다. 전보다 살이 내린 시은의 얼굴이 한평생 군살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그 양반과 비슷해 보이는 것도 같았다. 폐암으로 꼬챙이같이 말라가면서도 끈질기게 숨을 놓지 않았던 그녀는 오매불망 기다리던 갓난 손자가 처음 집에 온 다음날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그분의 외아들 말에 따르면 편안한 얼굴이었다고 했다.


…내가 데려오자고 했겠니. 애아버지가 그런 거지.


정여사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 양반, 그애 아버지 말이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뭐 형제자매 집에라도 맡기려고 했었나 봐. 우리집 양반이 그걸 알고 차라리 자기가 맡겠다고 나섰지 뭐니.


어머님이 싫다고 하셨으면 안 될 일인데요.


아 글쎄 애들 아버지가, 진원이까지 데리고 교회에 나오겠다잖니. 진원이야 예전부터 같이 살면 안 되냐고 떼를 썼고.


아무리 그래도 쉬운 일 아닌데… 대단하세요.


…뭘. 애가 무슨 죄니.


정여사는 짐짓 헛기침을 하며 음료를 마셨다.


다른 사람들처럼 부산스럽게 칭송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더 진정성 있게 느껴지는 것이 희한했다. 애가 무슨 죄냐, 는 말은 사실 정여사의 남편과 친정어머니가 한 말이었다. 그러나 정여사가 그에 동조한 것도 사실이었다. 어린 요한이 진원과 헤어져 집에 돌아가야 할 때면 금세 어두운 얼굴이 되어 예쁜 입술을 꼭 닫고 말을 잃는 것을 보면 정여사도 마음이 편치 않았었다.


진원부는 기독교인인 아내의 넓은 아량에 감동하여 마침내 교회까지 따라서 나오게 되었다고 교인들 앞에서 정여사의 면을 더 크게 세워주었다. 요한모를 교회에 데려왔을 때보다 더 큰 사람들의 칭찬과 감탄이 정여사는 싫지 않았다. 요한모자를 돕고 거둔 일로 인해 정여사의 명성이 높아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어린 요한을 거둠으로써 비로소 그녀는 ‘서울깍쟁이’의 꼬리표를 완전히 뗄 수 있었다.


그러나 교회에 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진원은 싫증을 냈다. 그 시간에 차라리 문제집 하나를 더 풀겠다는 것이었다. 교회의 아이들 사이에서도 요한이 은근히 무시와 따돌림을 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서가 더 큰 이유였다는 것을 정여사가 알게 된 것은 좀 더 시간이 흐른 후였다.


어린 요한은 손이 많이 가지 않는 아이였다.


말이 적고 얌전한 데다가, 깔끔해서 알아서 잘 씻고 주변도 잘 정리할 줄 알았다. 잘 때는 옷을 반듯이 개어놓고 일어나서는 이부자리를 말끔히 정돈하며 식사자리에서 음식이라도 흘릴라치면 바로 치우는 것이, 나름 깔끔하다고 생각했던 정여사의 남편을 비롯해 서울 친정의 아버지나 이복형제들에게서는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그마저도 제 어미를 그대로 닮은 것 같아 정여사는 한편으로는 떨떠름하기도 했다.


진원은 그때부터도 닥치는 대로 책을 쌓아놓고 읽곤 했는데 다 읽고 난 책들을 책꽂이에 다시 꽂아놓는 것은 늘 요한이었다. 진원과 똑같은 책가방을 매면 어깨끈이 흘러내리는 그 조그만 아이가 가느다란 양팔에 책들을 잔뜩 들고 뒤뚱거리는 것이 정여사는 안쓰러웠다.


그냥 둬, 아줌마가 치워줄 거야. 어느 날 보다못한 정여사가 요한에게서 무거운 학습만화들을 내려놓았을 때 아이는 말없이 그저 정여사를 바라보았다. 어린것의 눈빛이 그토록 처연할 수가 없어서 정여사는 가슴 한쪽이 내려앉았다. 그냥 놔두세요 사모님, 그렇게라도 은혜 갚아야죠. 몇 년을 일해온 가사도우미였지만 그녀는 그날 바로 해고되었다. 이젠 우리집 아이예요, 내 아들이라고요. 파출부의 대거리에 정여사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소리쳤다.


네 식구는 그렇게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렸다.


진원부 김원장의 개인병원도 예약이 넘칠 정도로 잘되고, 진원은 시험마다 만점을 받아오고, 요한까지도 덩달아 성적이 올랐다. 요한이 미술시간을 가장 좋아하고 제법 손재주가 있다는 것도 그즈음 알게 된 일이었다. 진원부는 그림도구를 잔뜩 사다주었고 정여사는 미술학원에 보내주려고 했다. 그러나 진원 없이 혼자 다녀야 한다는 말에 요한은 고개를 저었다. 어린 요한은 공부하거나 책을 읽는 진원 옆에서 만화책을 보거나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요한이 진원네 집에 와서 살게 된 지 얼마 안 되어 정여사는 뜻밖에 둘째를 갖게 되었다. 거의 포기하고 있었고 요한을 데려온 후로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던 터였다. 그녀의 남편은 진원을 가졌을 때보다 더 기뻐하며 요한을 거둔 덕이라고 했다. 친정어머니와 주변 사람들도 다 그렇게 말했으므로 정여사도 그렇게 여겼다. 그리고 전과는 달리 둘째는 예쁜 딸이었으면 하게 된 것도 이젠 아들이 둘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기대했던 늦둥이 딸아이를 낳고 정여사는 세상을 다 가진 듯싶었다. 가정에 충실한 의사 남편과 잘난 친아들과 어여쁜 양아들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둥이 딸내미까지, 그야말로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김원장과 진원은 물론이지만 특히 요한은 갓태어난 하랑을 너무 예뻐했다. 하기야 입덧으로 힘들어할 때, 순산을 위해 조심스럽게 산책을 할 때, 정여사의 곁에 가장 많이 있어준 이는 다름아닌 요한이었다. 그녀의 남편과 아들은 평일 낮에는 각각 업무와 학업으로 짬을 내기가 힘들었다.


요한의 친부는 후배 내외에게 버리다시피 맡긴 자식을 따로 불러보지도 않았다. 다만 두 번의 명절과 부모님의 기일에는 집안의 장손을 배제할 수 없다는 명분으로 그는 맏아들에게 기어코 제사상에 절을 올리게 했다. 처가의 압박과 사교 및 영업을 목적으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던 그는 순종적인 후처를 맞자마자 첫째아우네에게 돌려놨던 제사를 냉큼 가져왔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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