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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두 아이 (2)

by 지구인



그러나 요한이 교복을 입게 된 후로는 실낱같이 이어져오던 부자의 만남마저 끊겼다. 나이가 들며 투병생활이 힘에 부치기 시작한 원장은 원래 제사에는 병자가 참여하지 않는 법인데 제주가 아픈 마당에 제사는 무슨 제사냐는 처와 장모의 오랜 주장에 마침내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고, 그의 큰아들 역시 더 이상은 부친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거칠게 대드는 대신 요한은 이젠 싫어요, 갈라지기 시작한 목소리를 낮추어 어른들에게 맞섰다.


진원부에게서 첫째아들의 침착한 반항을 전달받은 원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때 그는 이름뿐이었던 부자관계의 파국을 비로소 인정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후배에게 적지 않은 양육비는 꼬박꼬박 보내고 있었으나 그야 최소한의 도리였다. 그것만이 요한이 완전한 고아는 아니라는 유일한 증거일지도 몰랐다. 그마저도 요한은 거부감을 보였다. 진원부의 간곡한 설득이 없었다면 요한은 그때 이미 거리로 뛰쳐나갔을지도 몰랐다.


애아버지가 얼마나 챙겼는지 아니? 우리 애들보다도 그앨 더 그랬다니까. 어떤 땐 내가 서운할 정도였어. 그런데도 어느새 네 아버지한테도 연락이 뚝 끊겼다니까. 뭐 명절이나 생일은 그나마 챙기긴 한다만. 그마저도 안 하면 그게 사람이니.


정여사가 어느덧 가장자리에만 립스틱 자국이 남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시은은 어머님께도 연락드리나요? 물어보고 싶었으나 그저 차만 마셨다. 시은이 마시던 차도 더 이상 따뜻하지 않았다. 시은은 다시금 오한이 느껴져서 직원에게 따뜻한 물을 요청했다.


그런데 어쩌다가 어머님과는…


시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으나 정여사는 얼굴을 찡그렸다. 하랑의 고백을 통해 짐작하는 바야 있었으나 시은은 정여사에게 확인하고 싶었다. 상대방의 반응에 시은은 잠시 위축되었으나 예상했던 바였으므로 곧 평정을 되찾고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그저 요한 씨 부모님 때문에 그렇다기에는… 어머님이 그 사람을 키워주셨으니까요. 어머님 친자식들하고도 각별한 사이로 보이구요. 친형제도 그렇게 우애가 좋을 수는 없을 거예요.


말 잘했다. 그게 바로 문제야.


정여사가 다소 위로 째진 눈을 부라리며 맞장구를 쳤다.


중학교에 올라가며 반마저 갈라진 두 사내아이는 아무래도 초등학생 때처럼 학교에서도 친밀하게 지내기가 쉽지 않아졌다. 진원은 해를 거르지 않고 학급회장에 뽑히는 데다 점점 늘어나는 공부량 때문에도 요한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이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점점 줄어들었고, 진원 없이는 입을 떼기는커녕 잘 웃지조차 않는 요한은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이가 없었다. 워낙 눈에 띄는 외모 때문에 남녀불문 호감과 흥미를 갖고 다가오는 경우가 꽤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소년은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


진원과 함께 있지 않으면서도 요한이 웃는 때는 어린 하랑을 볼 때뿐이었다. ‘미운 네 살’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순둥하고 예쁜 짓만 하는 하랑은 친오빠의 그 나이 때의 모습과 빼닮아 있었고, 요한은 마치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때를 하랑을 통해 다시 만나는 듯 보였다. 김원장이 퇴근해 돌아올 때면 요한은 하랑을 업고 대문 앞까지 내려갔다. 두 아이는 그곳에서 손을 꼭 잡은 채 다정한 가장을 기다리곤 했다.


아빠에게 달려오는 귀염둥이 딸내미를 안아들고 김원장은 학교에서 잘 지냈느냐고 요한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랑이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과 한이 오빠와 보낸 시간을 종알종알 들려주는 것을 들으며 저녁을 먹을 때가 김원장이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랑이 유치원에서 너무 뛰어놀았던지 지쳐 거실 소파에서 낮잠이 들었다. 그날도 바로 학원으로 간 진원 없이 귀가한 요한이 마침 발견하고 여느 때처럼 하랑을 안아 침대로 옮겨주려고 한 모양이었다. 마당에서 빨래를 걷어오던 가사도우미가 그를 보고 어서 내려놓으라며 쫓아왔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엉거주춤 서 있는 요한에게서 깊이 잠든 아이를 빼앗아 안아든 여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찼다. 그리고 외출에서 돌아온 안주인에게 은밀히 낮의 일을 고했다.


정여사는 무슨 소린가 싶어 여인을 보았다. 가끔씩 지나친 참견을 할 때가 있으나 살림솜씨만은 천하일품이라 전에 해고한 뒤 한 달도 못되어 다시 모셔와야만 했던 탓에 정여사는 그녀의 잔소리 섞인 수다를 애써 웃으며 들어줘야 할 때가 많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냥 저렇게 두었다가 무슨 일 생기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무슨 일요? 문신을 하여 푸르뎅뎅한 눈썹을 찡그리며 정여사의 가사사용인은 어이없어했다. 아이고 우리 원장님 양주께서는 워낙에 인품들이 훌륭하셔서 그런가, 불안하지도 않으신가 봐.


사생아로 잉태되었던 그 아이의 출생과 오입질을 일삼으며 세 번이나 혼인하며 배다른 자식들을 여럿 둔 그 아비의 행태와 그에 질세라 화냥질하여 쫓겨난 그 어미의 일을 쏟아내며 ‘피는 못 속인다’고 일침을 가한 파출부는 요한이가 계집애고 하랑이가 남자애였으면 나도 이런 걱정은 안 한다고 덧붙였다. 다들 쉬쉬해서 그렇지 어릴 때 몹쓸 짓은 사촌오빠나 이웃집오빠, 심지어는 친오빠한테도 당하는 법이라며 사실 내 친정조카딸도 매일같이 놀러가던 친구네 오빠에게 당했는데 소문이 두려워 감히 누구한테도 말하지도 못했다고 눈물까지 찍어내는 품새가 괜한 노파심에 만들어낸 이야기 같지는 않아서, 정여사는 쓸데없는 말씀하지 말라고 엄정히 굴어 안주인의 품위를 지키는 데 실패했다.


그날부터 그들 고용인과 사용인은 중간중간 눈빛을 주고받으며 요한에게서 하랑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커다란 집에 두 아이만 두었던 적은 이미 없었지만 그 이후 정여사는 아줌마가 오지 않는 날에는 더더욱 딸아이를 자신의 곁에만 두었다. 그래도 아직은 요한에게는 물론이고 남편에게조차 왠지 당당하지 못한 자신의 속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던 정여사는 얼마 전 돌아간 서울의 어머니가 더욱 그리웠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친모의 사진을 봐도 이젠 눈물도 나지 않는 정여사는 한때나마 의붓딸의 골탕에 시달렸던 계모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했다. 통곡하는 딸의 눈물을 닦아주며 숨을 거둔 어머니가 살아서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는 말씀으로 자신을 혼내주기를 바랐던 것인지, 아니면 불자로서의 평등한 자비심을 접어두고 부모로서의 배타적인 이기심을 이해해주길 바랐던 것인지는 정여사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이미 파출부가 말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어린 딸을 보호하려는 마음뿐이었다. 요한이 상처받기를 원한 적은 없었다. 그것만은 낳아준 어머니와 길러준 어머니 두 분이 한 지아비 곁에 나란히 잠든 무덤 앞에서도 맹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친딸의 몸을 지키는 것과 양아들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을 모두 이뤄낼 정도로 정여사는 연기력이 뛰어나지 못했다.


더구나 시간 역시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정여사가 찬찬히 마음을 다스릴 여유를 조금도 주지 않고 속절없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오빠만큼이나 숙성한 편인 하랑은 하루가 다르게 다리가 길쭉해졌고, 마치 작기만 했던 어린시절을 만회하려는 듯 요한도 어느새 진원에 버금가게 머리가 솟기 시작했던 것이다. 변함없이 마르고 늘씬한 체형이었으나 이미 소년은 남성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딸을 둔 어머니의 비뚤어진 모정은 커져갔다.


아들들의 이차 성징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정여사의 태도에 김원장은 의아함을 느꼈으나 따져 묻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여사가 이제 제법 자랐으니 제 아버지에게 돌려보낼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에둘러 말했을 때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힘겹게 털어놓은 걱정에 아직 내연녀일 뿐이었던 요한모에게 원장의 본처와 함께 쳐들어갔던 그때보다 더 정색하며 꾸짖는 남편에게 아내도 그때보다 더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 돌아서면 남이라는 부부의 일이 아니라 죽어도 떼어놓을 수 없는 자식의 일이니 더욱 그러했다.


…듣겠어요, 김원장이 뒤늦게 방문을 열어 확인했을 때 그는 그야말로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눈빛의 친아들과 그의 등 뒤에 한 걸음 떨어져 서서 고개를 떨구고 있는 양아들과 마주쳤다.


그날부터였다. 정여사가 하나뿐인, 아직은 어리다고 생각했던 아들에게서 엄마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것이.


중학생이 되면서 마침내 요한은 김원장 부처를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에 진원도 그를 의식해 어머니라고 부를 때가 있었지만, 요한의 눈을 피해 드물게 엄마엄마하며 안길 때도 있었다. 2학년에 올라가면서는 먼저 그러는 일은 사라졌지만 적어도 역시 잘난 우리 아들, 이라며 부친의 뒤를 잇기에 모자람 없을 성적에 팔 벌리는 모친을 외면하지 못하고 안겨주는 착한 아들인 것은 전과 같았다.


그러나 그날 이후 진원은 정여사를 어머니라고만 부르며 에누리없이 깍듯한 높임말만 썼다. 어머니란 말이 그토록 정 없이 차갑게 들릴 수 있음을 배아파 낳은 자식 때문에 알게 될 것이라고는 정여사는 꿈에도 몰랐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요한은 더욱 말이 없어지고 귀가하는 시간이 늦어지더니 급기야는 가출을 했다. 잔병치레 한 번 없이 건강하던 진원은 입원해야 할 정도로 심하게 앓았다.


김원장이 병원문도 닫고 며칠 발품을 판 끝에 찾아낸 요한은 집에 돌아가지 않으려 했으나 진원이 아프다는 말에는 사색이 되었다. 미안해 요한아… 미안해… 열에 들떠 중얼거리는 진원에게 울며불며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요한을 보고서는 정여사도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처럼 단란한 가족이 되어가는 듯싶었던 시간은 그러나 생각보다 짧았다. 요한은 중간은 가던 성적이 바닥을 쳤고 술과 담배를 배웠으며 폭력사건에까지 휘말렸다. 덩달아 진원의 학업도 전에 없이 소홀해졌다. 그나마 요한과 함께 다니는 학교는 빼먹지 않았고 성적도 크게 떨어지지는 않았으나 방과후의 선행학습에는 무단결석이 늘어나 모친의 속을 태웠다.


요한의 방황은 쉽사리 멈추지 않았고 그예 두 번째의 가출사건을 일으켰다. 진원은 이번엔 아프지 않았다. 울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버지와 함께 문제아를 찾으러 돌아다녔다. 소년은 친구를 보자마자 주먹을 날렸다. 아주 그냥 흠씬 두들겨팼다. 그따위로 살려면 내 얼굴 볼 생각은 하지도 마 자식아! 씩씩대는 소년의 눈가가 붉어졌고 그가 때린 소년의 눈망울도 흐려졌다. 더 이상 말없이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는 두 아이를 끌어안으며 김원장은 그 순간 아들들이 어른이 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고 정여사에게 토로했다.


요한은 그 뒤로는 전처럼 드러내어 말썽을 피우지는 않았다. 혹여 집에 들어오지 않더라도 진원에게만은 꼭 행선지를 남겼고 약속한 시간에는 반드시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아이의 마음은 다칠 대로 다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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