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에게 시은과의 일을 털어놓고 난 후 요한은 자의반타의반 그의 감시체제에 다시금 들게 되었다. 사장은 요한의 전화기를 검사했고 가게 밖에서도 매의 눈을 했다. 그러나 시은에게 이미 수신거부를 당하고 있었고 유독 성가시게 구는 여자 몇 명에게는 요한이 수신거부해버린 데다, 그마저도 귀찮아 아예 전원을 꺼두는 시간이 많아진 휴대폰에서는 사장은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오히려 요한을 걱정한 진원의 전화를 대신 받고 진땀을 흘려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연주를 비롯해 요한과 문제가 있었거나 있을 법한 다른 여자들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연락도 방문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수다스러운 사장도 행여 부정을 탈세라 그에 관해서는 함구했고 덕분에 가게는 평화로웠다. 되레 남녀 함께 오거나 남자끼리 오는 손님들이 슬슬 늘어난 덕에 매출도 상승세를 기록했다. 콧노래가 절로 나오게 된 사장은 잔뜩 힘주었던 눈동자가 스르륵 풀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요한은 무려 하랑에게 연락을 했다. 도저히 진원에게는 물어볼 수 없어서였다. 진원의 혼약자가 그랬듯 그의 의형제도 양심에 찔려 진원을 대하기가 힘들어졌다. 마치 그를 알아채기라도 한 듯 진원도 며칠 동안은 바에 들르지 않아 요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자신의 작은 방 옷걸이에 고이 모셔둔 시은의 볼캡을 볼 때마다 그는 모자의 주인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고, 그 생각은 도저히 사라지지 않았다.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더욱 생각났다. 그 생각 끝에는, 결국 실물을 봐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모자를 돌려주려는 것뿐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세우면서.
요한은 하랑에게 시은이 정여사를 만나는 시간과 장소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진원의 약혼녀에게 자신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할까 봐 걱정이 된다는 핑계를 대면서. 그 전에 어머니를 내가 먼저 뵈어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내 얘기는 하지 말고 넌지시 여쭤봐줄 수 있을까. 하랑은 잠시 의아하게 여기긴 했으나 연모하는 이에게서 마침내 전화가 온 것에 감격하여 기쁜 마음으로 요한의 청을 냉큼 수락했다.
어차피 그 어머니는 늦둥이 딸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해 자신의 일상을 시시콜콜하게 말하는 것을 소소한 기쁨으로 여기는지라 별로 수고로울 것도 없었다. 오빠한테는 말하지 마라. 그애 때문에 만나는 거니까. …요한 오빠요? 그래, 네 올케언니도 뭔가 불안한가 봐. 하긴 네 오빠랑 뭐 어디 한 군데라도 격이 맞는 구석이 있어야지. 어떤 여자가 반가워하겠니.
그렇잖아도 시은 언니가 나한테도 물어봤었어. 근데 나도 잘 모르고 엄마아빠만 아실 거라고 했었어. 그래… 그럼 내 생각이 맞은 거네. 근데 오빠, 언니가 알면 안 돼? 뭐 어때. 오빠가 그렇게 태어난 게 오빠 잘못도 아니잖아. …어머니가 말씀하셨나 보구나. 아니야. 나한테 직접 말씀하신 건 아니고 몇 년 전에 아빠랑 말씀하시는 걸 들었어. 오빠, 얼마나 힘들었어… 그치만 절대, 오빠 잘못 아니야. 우리 꼬맹이한테까지 동정받고 싶진 않았는데… 그냥 몰랐으면 했는데. 그래, 바보 같은 기대였어. 어쨌든 고맙다. 잘 지내. 오빠… 나… 얼른 남친 사귀어, 중매결혼 싫으면. 파이팅해라. 요한은 모르는 척 못 알아들은 척 전화를 끊었다. 하랑은 또 울었다.
어느 순간 요한은 하랑에게 짐짓 말한 대로 정여사에게 쫓아가 맞서볼까도 생각했다. 아예 올라오셔서 동네방네 소문내지 그러세요? 쟤 아버지는 이러저러하고 쟤 엄마도 그렇고저렇고하다고! 그리고 그 자식은 그런 부모한테 잘도 버려졌다고! 큰맘먹고 거둬주었는데 피는 못 속여서 삐뚤어져버렸다고! 결국 술이나 팔고 몸도 판다고! 그러나 그 짜릿한 상상은 잠시뿐이었다. 열과 꿈에 들떠 시은을 눕히며 불거진 그의 욕정은 하랑의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바로 사그라들기 시작했었다. 모녀가 얼굴은 달라도 목소리는 비슷하다는 것을 그때서야 요한은 알아챘던 것이다.
새어머니의 눈빛과 양어머니의 목소리, 그리고 친어머니의 눈물. 요한을 못 견디게 하는 것들이었다. 그것들 앞에서 요한은 마치 여름에도 녹지 않는 얼음벽에 갇힌 듯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나마 친모의 눈물은 조금이나마 애착을 동반하고 있었지만 나머지 두 어머니들에 대해서는 원망과 두려움뿐이었다. 나이가 들면서는 그나마 미움은 줄어드는 듯도 했지만 무서움만큼은 좀처럼 그렇지 않았다. 어머니들 앞에서 요한은 아직도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요한은 그러나 정여사에 대한 두려움보다 시은에 대한 그리움에 굴복했다. 어쩌면 그저 비뚤어진 욕망이고 집착일지 몰랐지만, 그 대상이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소중한 절친인지 아니면 그의 정혼녀인지도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여자를 보고 싶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토록 사랑하는 진원조차도 이토록 그린 적이 없었다. 부럽도록 잘난 친구는 다정하며 믿고 기댈 수 있는 이였다. 유일한 안식처였다. 친구의 여자는 그렇지 않았다. 많은 순간에 무표정한 그녀는 따뜻하기는커녕 차가운 어머니들을 닮은 것도 같은데 왜 그녀를 생각하면 설레고 보고픈 것인지 요한은 스스로도 알 수 없어 짜증이 날 형편이었다.
그의 많은 어머니들이 그를 얼음에 가두어 깊이를 잴 수 없는 차가운 물속에 가라앉힌다면, 절친의 약혼녀는 그를 얼음에서 꺼내어 높이를 알 수 없는 대기로 띄워올리는 듯했다. 다만 그것이 열기구에 올라탄 듯 즐거운 흥분을 주는 유희였다면 더없이 좋았을 것이나 요한은 마치 내리막길로 치닫는 기분이었다. 산사태가 일어 무너지는 눈덩이들을 그저 바라보다 휩쓸리고 마는 느낌이었다. 도망쳐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피하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요한의 마음은 요한의 마음을 떠나 있었다.
또다시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요한은 태어난 곳을 향하는 차표를 끊었다. 좌석이 없어 그는 시은보다도 일찍 떠나야 했다. 사장이 알면 펄쩍 뛰며 말릴 것이 확실했으므로 그는 다시금 거짓말을 만들어냈다. 요한은 바의 여름휴가에 맞춰 사귈까 하는 여자와 그 친구 커플과 교외로 놀러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사장은 여자와 아침부터 놀러간다는 전에 없던 요한의 말에 눈이 동그래졌다.
어떤 여자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났어? …내가 어디서 누굴 만나요. 화실 민선생님이랑 그 친구네 커플요. 몇 년 전부터 띄엄띄엄 다니고 있는 화실의 이십대 후반인 여자 강사를 빙자하자 사장은 뛸 듯이 좋아했다. 요한은 오후 늦게 차가 막혀 밤 늦게야 도착할 것 같다고 둘러댈 요량이었으나 사장은 기왕 간 것 외박을 하고 오라며 마냥 기뻐했다.
그러나 사실 요한이 말한 민선생은 동성애자였고 그래서 요한이 모처럼 긴장과 경계를 늦추고 대할 수 있는 여성이었다. 맞담배를 피우며 나름 맘 편한 대화를 나눌 수도 있는. 지독한 탐미주의자인 그녀는 요한을 보자마자 모델, 이왕이면 누드모델이 되어달라 했지만 요한은 극구사양해 왔다. 이번 일로 모델을 해줘야 할지도 모르겠네. 누드는 안 되지만. 요한은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그는 한여름 날씨에 마스크와 안경알이 큰 선글라스로 얼굴을 꽁꽁 가리고 시은의 모자 외에는 딱히 넣은 것도 없는 작은 가방을 매고 새벽같이 집을 나섰다. 군제대 이후로는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던, 아니 눈길조차 안 줬던 탓에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이 요한은 낯설기만 했다. 그는 역사와 그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택시를 타고 옛날에 살던 동네로 가서 진원의 본가가 보이기 시작하는 곳에서 내렸다. 그는 그 집을 그저 멀리서 바라만 보았다.
행복했던 시간이 분명 있었다. 그나마 친부모와 함께 살던 원래의 집에서는 기억에조차 없는 행복이. 넓은 마당에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면 보송보송 말라가던 빨래들이 바람을 타고 살랑살랑 나풀대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 사이를 까르르 웃으며 뛰어다니던 어린 하랑의 천사 같은 모습이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했다. 진원부자와 함께 캐치볼을 하고 배드민턴을 치며 즐거워했던 광경이 머리를 지나 가슴에 사무쳤다. 그러나 그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요한은 눈물을 삼키며 돌아서서 역으로 다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찮게 시은을 발견했다. 그는 멀찍이 떨어져 그녀를 쫓아다녔다. 시은이 진원모를 만나러 간 호텔 카페에도 그는 두 사람이 대화에 정신 팔린 사이 소리 없이 입장해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난 구석자리에 유령인 듯 그림자인 듯 앉아 있었다… 돌려주려 챙겨온 시은의 모자를 하염없이 어루만지며.
이제 속 시원해요?
정여사가 나간 후에도 시간차를 두고 신중히 움직인 요한이 앉아 있는 시은을 내려다보며 말했으나 시은은 놀랄 힘도 없었다. 그녀는 반쯤은 넋이 나간 상태였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진원이한테 말해서 나 절교시킬 건가.
요한이 맞은편 의자에 걸터앉으며 말했으나 시은은 그저 그를 보기만 했다. 요한이 마스크와 색안경을 벗었다. 이곳에 정여사를 만나러 오는 일로 시은의 집앞에 쫓아온 날 어두워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요한의 아름다운 얼굴이 오랜만에 시은의 망막에 제대로 상을 맺었다.
지난 두어 시간을 내내 그의 지난날들을 듣고 난 다음이었건만 막상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눈앞에 있는 것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시은의 눈에는 오로지 요한만이 보였다. 카메라의 렌즈가 줌인한 듯 요한만이 또렷하고 주변은 초점을 벗어나 흐려졌다. 시은은 불현듯 요한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오직 요한만이 보였던 순간들이 기억났다.
점심 먹었어요?
시은이 불쑥 묻자 요한은 말문이 막혔다.
난 못 먹었어. 배고파요. 뭐 좀 먹어야겠어.
시은이 혼잣말하듯 내뱉자 요한은 어안이 벙벙하여 그녀를 보았다. 첫 만남에서 탄성을 자아내던 요한의 미모에 느꼈던 떨림과 당혹감의 재생을 중단시키고자 대뜸 쏟아낸 말이었지만, 막상 말하고 나자 시은은 달거리 직전을 제외하고는 최근에는 좀처럼 느낀 적 없는 시장기와 함께 솟구치는 식욕에 사로잡혔다.
요한 씨는요?
…밥을 먹자고?
난 먹어야겠어. 여기요!
시은은 차림판에서 제멋대로 두 가지를 골라 주문했다.
먹을 거죠?
요한은 여전히 아무 말도 못했다. 시은이 도망치듯 자리를 피하면 쫓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녀가 또다시 귀싸대기를 올려붙이면 그대로 맞을 각오는 하고 있었는데, 식사하자는 것은 생각도 못한 일이어서 요한은 어쩔 줄을 몰랐다. 물론 그도 오전에 열차에서 내려 야채김밥 한 줄을 꾸역꾸역 욱여넣은 뒤에는 얼린 생수 한 병과 정여사가 사라지기만을 기다리며 마실 때마다 마스크를 턱에 내리는 것이 귀찮아 결국 다 못 마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말고는 입에 넣은 것이 없긴 했다.
어느덧 요리가 나왔고 시은은 말도 없이 스푼과 포크를 들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요한이 당황한 얼굴로 보거나 말거나 그저 열심히 턱관절을 움직이는 데 집중하던 그녀가 몇 번의 삼킴질 후 말했다.
어서 먹어요. 너무 말랐다고 말했잖아요. 살 좀 찌워요.
시은의 명령에 요한은 자신도 모르게 양식기를 들었다. 그 스스로는 몰랐지만 그는 여자가 엄마처럼 말하면, 명령하면 좀처럼 거역하지 못했다. 그것은 두려워서였지만 또한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리워서이기도 했다. 세 명이나 가졌지만 한 명도 제대로 가지지 못한 그녀들이.
그렇게 둘은 졸지에 호텔 레스토랑에서 사치스러운 저녁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