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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4부 5장 4화 - 슬픈 기도

by 지구인



그토록 듣고 싶어했던 엄마 소리를 아들에게서 듣고, 그토록 안고 싶어했던 아들의 품을 실컷 느꼈지만 정여사는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번 한 번만 봐주세요. 네?


진원이 어머니를 안고 짐짓 어리광을 피웠으나 정여사는 그의 등을 찰싹 때렸다.


이제 와서, 이런 일 생기니까 아쉬우니까 엄마라고… 이 나쁜 놈.


네에, 저 나쁜 놈이에요. 너무 나쁘죠. 죄송해요, 엄마. 그래도 엄마 아들이잖아요. 봐주세요… 네?


진원이 특기인 햇살 같은 미소를 날렸으나 그의 모친은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너 이나랑 그런 짓 좀 했다고 괜히 더 찔려서 그러는 거 같은데, 세상 아무리 변했다고 해도 남자랑 여자랑 같니? 더구나 이나는 너랑 과거가 있는 애고, 걔는 네 형제 같은 사이 아니야. 아 강남역에라도 나가서 사람들 붙잡고 물어보라니까, 누구 말이 맞는지. 다들 나만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몰더니, 꼴좋다!


정여사는 의기양양해서 남편과 자식들에게 손가락질까지 하며 소리쳤다. 오히려 이 사태로 인해 그동안의 억울함이 조금은 풀리고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도 같았다.


…네, 어머니 말씀이 맞아요.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허락해달라는 건 아닙니다. 기다려야죠. 대신 어머니도 집에서 요양하시면서 다시 생각해주세요. 시은이나 시은이 부모님께 연락하거나 하지 마시고요. 그것만 부탁드릴게요. 결국 어머니 뜻대로 하게 되더라도, 아직 청첩장도 안 나왔으니 시간 좀 있잖아요. 저희도… 무작정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다시 더 깊이 생각해보기로 했습니다.


진원이 차분히 말하자 정여사는 아들을 빤히 보았다.


병실에서 내쫓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들은 술독에 빠져 있거나 눈물로 하소연하며 보기 싫게 휘청거리던 모습에서 벗어나 원래의 뚝심과 자신감 있는 모양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무래도 시은과 다시 만나 의기투합이라도 한 것 같아 정여사는 다시 힘이 빠졌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따로 없지 않은가.


그래 알았다. 한동안은 나도 조심해야 하니, 괜히 그쪽 집안사람들과 엮이고 싶지 않다. 뭐 추석 때쯤엔 결판을 내야겠지만.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진원이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어 대답하자 정여사는 한숨을 쉬었다. 얼굴도 알지 못할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편일 것이나 지금 함께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기에 그녀에게는 불리한 싸움이었다. 그래도 쉽게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다만 햇볕정책을 표방할 필요성을 아들을 보며 정여사는 깨달았기에 그의 요청을 일단은 수락한 것이다.


******


한편 그 전날 김원장과 만나고 있던 카페를 갑작스레 뛰쳐나온 요한은 곧바로 연주에게 전화했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은 요한은 곧장 그 아이를 쫓아가 요절을 내고 싶었다. 마치 그를 알아채기라도 한 듯 연주는 여러 통의 전화를 모두 받지 않았다.


요한은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입에 물며 연주의 소재를 알아낼 방법을 궁리했다. 그는 카페까지 따라온 두 명의 감시자들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연주는 몰라도 그 어머니나 지수의 연락처는 알고 있을 것이므로. 몇날며칠을 동고동락해온 그들 중 한 명은 담배까지 나눈 사이였으므로 그 정도 부탁은 들어주게 할 자신이 요한에게는 있었다.


그가 몇 걸음 떨어진, 자신이 질색하여 양복 대신 캐주얼한 사복을 입은 두 명의 체격 좋은 남자들에게 가려고 했을 때 연주에게서 전화가 왔다. 요한은 분노를 감당키 어려웠다.


이 지랄맞은 기집애! 죽을려고 환장했냐?!


- 김지수예요.


침착한 목소리였다.


연주 바꿔줘요.


요한이 가까스로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 이미 엎질러진 물, 연주한테 뭐라고 한다고 달라질 거 없잖아요? 연주 반성하고 있어요. 일 저질러놓고 요한 씨가 이렇게 나올까 봐, 다신 자기 안 본다고 할까 봐… 또 병원 신세 질 지경이에요. 딴엔 요한 씨 위한다고 한 일이라구요.


제발 좀!


요한이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제발 좀, 나 좀 내버려달라니까! 제발 좀 아무것도 하지 마… 제발 나 좀 위하지 마…


요한은 다시금 절망의 늪에 빠졌다.


자상한 김원장을 실망시킨 것도, 두려운 정여사를 분노케 한 것도, 그 착한 하랑을 슬프게 한 것만으로도 요한은 자신을 용서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가 더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그 세 사람에 대한 미안함을 모두 합쳐도 진원 한 사람에게 미안한 것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만큼 자신이 저지른 일과, 또한 비록 진원에게 자신을 버릴 명분을 확실히 주기 위해서였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그에게 잔뜩 날선 말들을 했던 것에 요한은 뒤늦게 가슴 아파했다. 그런 짓을 당하고도 병원에 달려와 울고 갔다는 진원의 애절한 얼굴을 떠올리며 요한은 태수 몰래 숨죽여 울었었다.


그런데 이젠 진원에게 미안한 것보다도 시은에게 더 미안해져버렸다. 그 영상을 본 정여사가 시은을 가만둘 리 없었다. 마주하기 껄끄러운 자신에 대한 분풀이까지 더해 그녀에게 이미 터트렸거나, 앞으로 터트릴 것이다. 진원이 애걸복걸하여 마지못해 결혼을 시킨다 해도 그 일로, 그 영상을 본 일로 앞으로도 내내 시은을 괴롭힐 것이다. 그나마 악독하기만 한 것은 아닌 정여사는 자신에게는 일말의 미안함이 있어 경원시하는 와중에도 조심하려는 면이 있었지만, 시은에게는 그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 곰같이 미련해빠진 여자는 또다시 참고 견디다 속병이 나 죽고 말 것이다… 요한은 당장에 시은에게 달려가 그녀와 함께 도망치고 싶었다. 아니 그저 그녀를 도망시키고 싶었다. 어차피 자신에게는 오지 않는다는 것쯤은, 굳이 진원이 말하지 않았어도 알고 있었다. 진원처럼 잘난 남자와 결혼하려던 여자에게 자신같이 못난 남자가 눈에 차겠는가. 그녀에게 동정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비참한데 이젠, 미움까지 받게 돼버린 것 아닌가. 이젠 더더구나 그녀 앞에 나설 수 없는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요한은 멀쩡히 살아났을 때보다 훨씬 더 궁색맞고 처량한 자신을 느꼈다.


다신 나한테 연락도 말고 볼 생각도 말라고 전해줘요. 만약 그러면 둘 중 하나는 죽는다고. 귀한 집 아가씨니까 아마도 내가 되겠지. 다음엔 실패 안 해.


숨도 안 쉬고 내뱉은 요한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는 높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내쉬었다. 이젠 정말 엄마를 찾는 일밖에 남지 않았구나. 만약 엄마가 잘못된 거라면… 나는 그땐 무엇으로,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할까. 요한은 허무함에 빠졌다. 그러나 마침 대체 무슨 일이냐. 시간 될 때 연락하렴. 김원장의 문자를 받고 그는 자신의 무례함을 기억해내고, 당장에 닥친 일부터 처리하자고 마음먹었다.


아버지, 아직 계세요? 요한은 김원장에게 전화하며 카페로 발길을 되돌렸다. 김원장은 요한을 다시 보게 되자 무척 반색했다.


급한 일 생긴 거 아니었니?


죄송해요. 영상… 그 얘기 때문에, 그걸 몰래 찍고 또 어머니께 보낸 사람한테 화가 나서요.


요한은 연주모녀의 일을 털어놓았다.


어머니… 난리나셨죠?


요한이 조심스레 묻자 김원장은 애써 웃어 보였다.


진원이한테 화가 많이 나셨지. 시은이나 너나 용서했다고 해서. 너희 둘 없인 살 수 없다고 해서.


……


하랑이가… 널 오랫동안 좋아했다면서. 넌 알고도 피했다면서.


요한이 당혹스러워하자 김원장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하랑이 말로는 저 혼자 그런 거라 하더라만… 야단치려는 게 아니라, 솔직한 네 맘을 알고 싶다. 그러니까 내 말은… 혹시 조금이라도 너도 그런 마음 있었는데 네 어머니랑 나랑… 반대할 거 같아서, 특히 네 어머니 반대가 무서워서…


네, 그런 생각은 해봤습니다.


요한이 망설임 없이 대답하자 김원장은 당황했다.


하랑이에 대해서가 아니라, 어머니에 대해서요. 제 마음 깊이 어머닐… 원망해서, 잠깐. 하지만 걱정 마세요. 하랑인 제 하나뿐인, 정말 소중한 여동생입니다. 어렸을 땐 제가 늘 안고 업고 했던 거 아시잖아요. 그리고 그앤 그저 어린 마음에, 아직은 어린 마음에 잠깐 그런 거겠죠. 소개팅이랑 열심히 한다던데요. 어머니도, 벌써부터 좋은 자리 알아보고 계시다고 들었고요.


요한이 웃어 보이자 김원장은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한편 다행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김원장은 요한의 헛헛한 웃음 앞에 부끄러웠다.


그래도 차라리 하랑이가 낫지 않겠니. 그건 나라도 도와줄 수 있잖아.


…시은 씨, 아니 진원이 일도 걱정 마세요.


요한이 웃음을 거두고 조용히 말했다. 김원장이 자신을 아무리 아껴도 친딸과 친아들의 걱정이 앞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천륜이라고들 하지 않던가. 요한은 서운하지도 않았다.


제가 일방적으로 쫓아다닌 거예요. 그 영상에서의 일은, 어머니께 제 사연을 다 듣고 절 가엾어한 그 여자가, 시은 씨가… 제가 너무 불쌍해서 그냥 받아준… 아니 그냥 가만히 있었던 것뿐이에요.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그날 이후로는 만난 적도 연락한 적도 없습니다. 이미 그전부터 시은 씨는 절 수신거부하고 있었고, 전 비겁하게도 하랑이한테, 절 좋아하는 그애 마음을 이용해 어머니랑 시은 씨가 어디서 언제 만나는지 알려달라고 해서 몰래 쫓아간 겁니다. 그리고 이젠… 뭐 이렇게 됐는데 저도 그만해야죠. 그만… 뒀습니다.


김원장을 이렇게라도 안심시키는 게, 요한은 그의 길러준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원장 부부마저 알게 된 이 마당에 요한은 정말이지 시은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알았고 각오했던 일이었지만 이렇게 김원장을 만나서 약속하게 될 것은 상상도 못한 일이어서 요한은 스스로 말하면서도 어처구니가 없고, 서글펐다.


이젠 정말이지 그저 그 애잔한 옛노래를 눈물로 읊조리며 자신을 안아주던 것밖에는 기억도 나지 않는 낳아준 엄마 말고는 - 그녀가 다른 자식이 없으면서 멀쩡히 살아 있다면 - 요한이 살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잠시 태수를 떠올렸지만 요한은 그의 외로움보다는 자신의 괴로움이 훨씬 더 중요했다. 김원장에게 자신보다 친자식들이 더 중요한 것처럼 말이다.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요한은 웃었다. 이젠 정말 모든 것의 끝이, 그 끝의 끝이 다가오는구나. 요한은 이토록 무언가를 절실하게 원했던 적이 없었다. 어려서는 진원을, 몇 달 전부터는 시은을, 너무도 갈구했지만 그것은 삶에의 욕구였다. 그러나 자신은 늘 살기보다는 죽기를 얼마쯤 더 바랐었다는 것을 요한은 새삼 깨달았다. 만약 엄마가 저 세상에 있다면 거기서라도 함께 있을 수 있겠지… 요한은 기뻤다.


김원장은 진원이 그랬듯 요한의 광기를 느끼고 흠칫했다.


이 아름다운 청년의 마음에 드리워진 어두움을 부디 거두어주소서. 부디 자비를 베푸소서. 명색이 개신교도였으나 그가 가장 사랑하는 기도문은 구교의 미사를 시작하며 바치는 기도이자 노래의 그 문구였다. 그는 늘 기도의 마침에 요한모자를 두고 그 짧은 문장을 세 번씩 되뇌었다. 아내가 펄쩍 뛸 것이기에 명확히 혼자가 아니고서는 그 기도조차 소리내어 한 적이 없었지만, 그의 심장 한구석에 요한은 물론이고 그 생모도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그가 기도를 바치는 그분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리라.


얘야.


김원장이 물기 어린 목소리로 요한을 부르며 그의 손을 잡았다.


진원일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그랬다는 건… 안 그러려고 했는데도 그랬겠지. 그렇게 된 거겠지. 그런데도 괜찮다고…? 내겐 안 그래도 괜찮다. 억지로 그러지 마라. 안 그래도 돼.


김원장의 눈시울이 붉어진 것을 본 요한도 눈물이 났다.


왜 그렇게 마음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걸까요… 요한은 그 말을 삼키며 키워준 아버지의 따뜻한 손에 마르고 찬 손을 맡긴 채 뜨거운 눈물을 떨어뜨렸다. 차라리 시은이도 네가 좋다면 내가 어떻게든 해줄 것을… 김원장 역시 말을 내지 못하고 키워준 아들의 새하얀 손등을 아픈 가슴으로 어루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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