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무슨 소리야. 그러고 보니… 녀석이 우리 셋 처음 만난 다음날 자길 쫓아가서… 목을 졸랐다고 했어. 그거랑 관련 있는 얘기야?
그래. 우리집까지 쫓아와서 날 불러내더니, 자기 포기하라고 날 협박했었어. 취중진담이라고, 자길 나한테 줄 수 없다면서 울기까지 했지. 악몽이 아니라 실제상황이라 너무 무서워서 자기한테 달려갔고. 그래도 바로 말하진 못하겠더라. 내가 엄청 적극적이어서 자기가 놀라워했던 바로 그날 말이야.
…날 자기한테 줄 수 없다고 했다고?
응.
도대체가 무슨… 녀석도 뭐 비슷한 말을 했던 거 같은데 그땐 너무 경황이 없어서. 자긴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는 거 같은데.
진원의 어리둥절한 얼굴을 바라보던 시은이 젓가락을 들었다. 더 식기 전에 먹자. 그에 진원도 따라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둘이 함께 느긋하게 식사하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시은이 시장기를 느낀 것도 요한과의 D시에서의 어색한 식사 이후 처음이었다.
어느 정도 그릇들이 비워지자 시은이 말했다.
아마도 요한 씨가 내가 자길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자길 사랑할걸.
그게 무슨 말이야?
어려서부터 자기가 너무 좋아서, 차라리 여자였으면 했대. 자기 곁에 평생토록 가장 가까이 있고 싶어서. 가장 사랑받고 싶어서. 그래서 내게 질투났대. …자긴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어?
뭐?
그 사람 정말 미인이잖아. 심지어 자기 어머님조차 요한 씨가 남자라서 다행이라고, 여자였으면 자기랑 결혼까지 갔을 거라고 하셨는걸.
진원의 의아했던 표정이 어이없어하는 얼굴로 바뀌었다.
아니 어려서부터 같이 씻고 군대 같이 가고 찜질방은 또 몇 번을 같이 갔는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 자식 얼굴만 그렇지 그 아래로는 그냥… XY 염색체 그 자체라고! 아니 XYY!!
호오… 그래? 자기보다 훨씬?
이번엔 시은이 놀릴 차례였다.
무슨! 내가 어디 가서 꿀릴…
시은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진원의 얼굴이 빨개졌다.
정말 그 사람 말이 다 맞네. 자기만 좋다고 하면 게이든 수술이든 했을 거라는 말을 자기가 들으면 펄쩍 뛸 거라고 하더니. …자긴 정말 놀랄만치 다정한데 또 놀랄만치 무심해. 둔해. 그거 알아?
그것도 비슷한 말을 녀석도 한 거 같은데.
진원이 눈 사이를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자신이 가장 허물없이 대하는 사람 둘이 같은 지적을 했으므로 진원은 신경이 쓰였다. 하기야 하랑의 오랜 마음은 물론이고 시은이 자신에게 결벽증 환자처럼 굴었던 이유에도 모두 요한이 있었는데 전혀 아무것도 모르지 않았던가. 진원은 요한의 병실에서 느꼈던 소외감을 다시 느끼고 시무룩해졌다.
시은이 고심하는 진원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가 좋아하는 동그랑땡 한 개가 남은 접시를 앞에 놓아주었다. 진원이 예의차 웃으며 음식을 집어 입에 가져갔으나 맛을 즐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시은은 지금 당장에 진원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던져준 듯해 미안했다. 언젠가는 진원도 알아야 할 일이겠으나 현 사태에서는 아니지 않은가.
어머님은 괜찮… 아니 입원까지 하셨으니 괜찮으실 리가 없지.
시은이 용기를 내어 당면한 시급한 과제를 언급했다.
그랬는데 자기 나랑 이러고 있는 거… 잘못하고 있는 거 아니야? 어머님 아시면 더…
쫓겨났어.
진원이 음식을 삼키고 말했다.
물론 다시 뵈러 갈 거지만… 나는 물론이고 아버지까지 보기 싫으시대. 내가 자기랑 그 녀석… 놓을 수 없다고 했거든. 아버지가 내 편이셔서. 하랑이도 그런데 워낙 딸바보시라.
진원이 웃어 보였으나 시은은 웃지 못했다.
내 동생이지만 하랑인 참… 어떻게 그러는지 모르겠어. 요한인 물론이고 자기조차도… 원망 않는 거 같더라. 자기 만나서도 괜찮았지? 예의 있게 굴었지?
…응. 참 착해. 자기도 착한데 자기보다도 훨씬.
고마운데 하랑이에 비하면 난… 자기한테 심하게 화풀이했고 그 녀석한테 주먹질도 했고… 부끄러운 수준이지.
나였으면 그 정도로 안 끝났어. 다른 사람들도 그럴걸.
진원이 씁쓸히 웃었다.
그래, 그땐 미칠 거 같았으니까. 내 가치관과 신뢰, 그런 것들이… 다 무너져버렸으니까.
미안해… 그래서 난 더 자기한테 갈 수 없어.
시은이 울적하게 말하자 진원은 그녀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우리 부모님께도 너무 부끄럽고 죄송한데 자기 부모님께야… 더구나 어머님은… 용서 못하실 거야. 더구나 상대가…
내가 설득할 거야.
진원이 단언하자 이번엔 시은이 그를 보았다.
이미 무릎 꿇고 읍소했어. 계속할 거고. 죄송하지만 결국 항복하실 거야. 아버지와 하랑이 때문에라도.
그렇게 억지로 밀어붙일 문제가 아니야… 아마 어머님, 내가 그 사람 이야기 여쭤본 게 괘씸해서라도 더 날 미워하실 거야. 나 너무 죄송하고 또… 무서워.
그래서 나 버릴 거야? 어머니 무서워서?
진원이 웃으며 물었으나 시은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머물러 있었다.
그래, 쉽지 않겠지. 또 오래가겠지. 우린 죄인이 된 기분으로 어머닐 봬야겠지. 하지만 뭐 어떡해. 그럴수록 우리 둘이 더 마음을 합쳐야지. 공동의 적이 생기면… 아 이것도 죄송하지만, 여튼 오히려 그 덕에 우리의 동지애가 더 굳건해질 수도 있잖아. 아니 그런 건 다 차치하고… 이대로 자기 놓치고 싶지 않아. 말했잖아. 다만…
진원에게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요한이한테 더는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약속은 필요해. 자기가 내가 그 일로 앞으로 살면서 자길 괴롭히지 않겠다는 약속이 자기한테 필요한 것처럼.
시은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각자의 어머니에게 야단맞고 손찌검까지 당한 일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각자의 아버지들은 못난 자식의 편을 들어준 점도 나누었다. 둘은 재결합 여부에 상관없이 양가 부모님들께 둘이 함께 사죄할 것에 동의했다. 진원은 자신도 이나와의 일과 어머니가 문제의 영상을 불쑥 전달한 일을 시은의 부모님께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연주는 왜 갑자기 그런 거야?
진원의 물음에 시은은 솔직히 대답했다. 진원은 그냥 한숨만 쉬었다.
미안해. 내가 자기랑 헤어졌다고 했으면 안 그랬을 텐데.
그랬으면 요한이한테 희망이든 죄책감이든… 여튼 또 혼란을 줬겠지. 이렇게 된 거 확실히 다 털고 가는 게 낫다고 생각하자.
진원이 결연한 얼굴로 말하자 시은은 마음이 든든했다. 그가 원래의 긍정적이고 자신감 넘치고 그리하여 믿고 기댈 수 있는 남자로 돌아오고 있는 것 같아 기쁘고 고마웠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고 분노케 하고 슬프게 하고, 그리하여 그를 시험에 들게 하고 방황케 한 장본인이 자신이어서 시은은 슬프고 미안했다.
가까스로 눈물을 삼킨 시은은 화장실을 다녀오며 결제를 했고, 부러 웃으며 남은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진원이 집에 태워다주겠다는 것을 병원의 어머니께 가라고 하며 거절했다. 그러나 이미 면회시간이 지난 탓에 시은은 별수없이 진원의 말대로 해야 했고, 차에 타자마자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았다. 진원은 말없이 그녀를 안아주었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시은에게 진원은 그래 나도 사랑해, 라고 속삭였다.
시은이 그의 가슴에 기댔던 얼굴을 들어 그를 보았다. 진원이 시은의 눈물을 닦아주며 다정히 말했다.
나한텐 그렇게 들리는데. 틀렸어?
진원이 웃어 보였으나 시은은 더욱 눈물이 났다. 통곡하다시피 하는 연인을 안아 달래며 진원은 내가 더 사랑해, 라고 다짐하듯 말했다. 그는 시은의 보드라운 살결에서 익숙함과 포근함을 느끼며 그녀에 대한 사랑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을 마음먹었다.
다음날 아침, 진원은 거실 바닥에 손님용 침구를 깔고 나란히 누워 취침했던 아버지와 함께 출근하기 전에 병원에 갔다. 여전히 김원장을 보고 싶지 않았으나 집에서 편히 쉬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정여사가 더는 휴진할 수 없다는 남편과 함께 귀가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정여사는 퉁명스러우나마 남편에게는 말을 섞으면서도 아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진원은 전날밤 아버지의 충고를 따라 서운한 기색조차 없이 어머니께 서글서글하게 대하려 노력했다. 그래도 네가 자식이고 어쨌든 불효이니 네가 빌어야 한다, 전날밤의 김원장은 단호했다.
그런다고 내가 오케이할 줄 아니?
정여사가 마침내 삐죽거리며 입을 열자 진원은 그저 웃기만 했다.
그렇게도 서럽게 울더니 이젠 생글생글 웃으며 어떻게 해보려고? 흥.
아니에요, 어머니. 그냥, 정말 죄송해서 그래요. 어머니 말씀대로 너무 불효자라서.
됐다. 지금은 일단 내려간다만 조만간 다시 올라올 거야. 사돈 만나서 정식으로 사과받고 위자료 얘기도 해야 하고 그집 딸도 혼구녕을 내야지.
여보…
아무 말 말아요. 이건 내가 맞아요. 아 강남역에라도 가서 여론조사라도 해와요?
어쨌든 흥분은 하지 맙시다. 입원하기 싫다면서요.
으휴…
정여사가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침대로 가자 진원이 냉큼 어머니를 감싸안아 도왔다. 아들이 안아준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기에 정여사는 좋으면서도 화가 났다.
아주 작정을 했구나.
정여사가 째려보았으나 진원은 오히려 어머니를 다정히 안아주었다.
네에, 거짓말은 안 할게요. 아버지랑 계략을 짰습니다.
흥.
정여사는 뾰로통하면서도 아들을 밀어내지 않았다. 이젠 늙어가 쪼그라드는 남편보다 훨씬 듬직한 아들의 품이 정여사는 자못 흐뭇했다. 동시에 시은이 괘씸했다. 누구에게 줘도 아까운 아들을 두고 감히, 그것도 하필 그놈과. 그런데도 그 둘을 용서했다는 아들놈에게 다시 화가 나서 정여사는 진원을 밀어냈다.
선택해. 나야 걔네야. 끝끝내 결혼할 거면 앞으로 나 볼 생각은 하지도 마라. 그 저주받은 걔도 마찬가지고.
예상한 바여서 진원은 크게 마음 다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결혼식을 미루는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허락 없이 식을 올리는 것은 차마 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까지 자식의 도리를 저버릴 순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는 못한다고 말대답할 줄 알았던 아들이 입을 다물고만 있자 정여사는 아들의 얼굴을 살폈다. 진원은 그저 애써 웃고 있을 뿐이었다. 차라리 우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얘! 차라리 원래대로, 솔직하게 해! 그게 뭐니,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니고.
정여사가 소리쳤으나 진원은 그대로였다.
내가 정말… 이런 꼴 보려고 그애까지 집에 들여가며 널 떠받들어 키웠다니 세상에 정말 불경스럽지만 하나님이 원망스럽다.
속이 상한 정여사가 벽 쪽으로 등을 돌려 누웠다. 진원은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고 서 있다가 그이의 등에 천천히 얼굴을 묻었다. 김원장과 하랑이 놀라서 그를 보았다.
어머니.
아직은 그래도 젊고 불 같은 성격 때문에라도 팔팔하다고만 생각했던 어머니가 아까 잠시 그녀를 감쌌을 때 생각보다 좁고 마른 어깨여서 진원은 당황했었다. 시은보다 훨씬 넓고 단단한 어깨라고 늘 생각했는데 엇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앙상했던 것도 같아서 그는 생각도 못한 상처를 받았다. 나이가 들면 어깨는 좁아지고 허리만 늘어난다는 것을 청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어머니. 엄마…
진원이 기도하듯 속삭였다. 정여사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아들에게서 엄마 소리를 다시 듣게 될 줄은, 그것도 하필 이런 때 그런 일로 듣게 될 줄은 알지 못했다.
엄마… 죄송해요.
너… 너 그런다고 내가…
정여사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치려 했지만 이미 목이 메었다. 그이는 주먹쥔 한 손을 바닥에 대고 물 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지탱하며 다른 한 손으로 눈을 가리고 울었다.
엄마, 정말 죄송해요.
진원 역시 울먹이며 어머니를 안았다. 시은이 그랬듯 진원도 너무 염치가 없어 차마 사랑한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진원은 자신이 그랬듯 어머니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했다. 언제나 더 많이 사랑하는 이가 약자이므로.
천하에 나쁜 놈…
그러나 정여사의 두 팔은 이미 아들의 목을 감싸고 있었다. 그렇게 엄마와 아들은 십수 년 만에 서로를 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