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66화. 4부 5장 2화 - 잘난 남자

by 지구인



시은아!


때마침 진원이 카페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시은이 뒤돌아보았다. 진원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두 여자를 번갈아보았다. 시은이 깊게 숨을 내쉬고는 자리를 떠나자 진원이 그녀를 뒤쫓았다.


잠깐, 잠깐… 시은아.


진원이 카페를 나가자마자 다급히 시은의 팔을 붙들었다. 시은이 그의 손을 차분히 뿌리쳤다.


어머님께 당할 각오는 했어. 내 엄마도 때려죽일 기세였는데 말해 뭐해. 그렇다고 이런 일까지 당해야 돼?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자기한테 너무 미안하고 창피해서 바로 말 못한 잘못이야. 여기까지 쫓아올 줄은 생각도 못했어.


…단 둘이 술 마시면서 무슨 짓을 했길래 저 여자 저렇게 당당해? 게다가 내 일… 요한 씨와의 일까지 어떻게 알아?


그래, 다 얘기할게. 그 얘기하고 용서 빌려고 만나자고 한 거였어. 잠깐만 기다려줘.


진원은 다시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이나는 그 사이 카운터에서 음료를 주문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이야?


여유로운 표정의 이나에게 진원이 어금니를 깨문 채 속삭였다.


뭐가. 너도 공범 아냐?


…그래. 그래서 오늘 다 말하려고 했는데 네가 선수쳐줘서 아주 고맙다.


경멸을 담아 소곤거리고 떠나려는 진원의 팔을 이나가 붙잡았지만 바로 거칠게 뿌리쳐졌다.


난 안 되고 저 여잔 되는 이유가 뭔데?


이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까 시은과 대거리할 때처럼 카운터의 직원을 비롯한 카페 안 사람들이 그녀를 흘낏거렸다. 그러나 이나는 이번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우린 그때 이십대였어. 그리고 얼마 사귀지도 않았지만 저 여잔 약혼까지 했잖아!


너한테 답할 이유 없어. …그래, 그때 아직 우린 어렸고 지금은 서른이 넘었지.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넌 똑같아. 지독하게 제멋대로인 거!


진원은 좀처럼 드러낸 바 없는 혐오감을 옛 여자친구에게 아낌없이 퍼붓고 시은에게 돌아갔다. 이나는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다 곧 시은이 앉았던 자리에 앉아 유리창 너머의 두 남녀가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카페 안의 진원과 이나의 모습을 보지 않으려 했지만, 시은의 시선은 저절로 그들에게 향해 있었다. 장신에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세련된 옷차림의 두 남녀는 더없이 잘 어울려 보였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자신은 좀처럼 신기 어려운 높은 구두에 화려하고 비싸 보이는 원피스에 진한 화장을 하고 다니는, 진원의 어머니가 좋아했을 정도의 탄탄한 배경을 가진 기 센 여자. 시은은 뒤늦게 주눅이 들었다.


연주는 자신보다 조그맣고 나이도 한참 어려서인지 역시 엄청난 부잣집 딸임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았는데, 이나라는 여자는 키도 크고 나이도 몇 살 위라고 들어서인지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 아니, 단지 체격과 나이 탓이 아니었다. 진원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시은은 자신의 질투심을 인식하자 민망해져서 카페 입구 앞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다 또다시 다친 발목을 삐끗했다.


괜찮아?


진원이 시은을 잽싸게 부축했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시은은 시선을 피했다. 진원에게 고맙고 미안하고 화가 나서, 그리고 카페 안의 여자에게 그를 절대로 주고 싶지 않아서, 아니 어떤 여자에게도 그를 줄 수 없는 마음을 새삼 깨달아서.


괜찮으면 저녁 먹을래?


진원이 부드럽게 물었으나 시은은 대답하지 못했다. 양가 부모, 특히 시모가 알아버렸으니 그 상대 때문이라도 부친 말대로 결혼이 파투나게 생긴 마당에 진원의 옛 연인에 대한 질투심이나 느끼고 있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어서였다.


설마 요즘도 저녁 안 먹는 건 아니지?


진원의 걱정하는 얼굴은 이 모든 사건사고들이 있기 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어서 시은은 눈물이 나려 했다. 그래서 다시 눈을 피했다.


전부터도… 안 먹은 건 아니야. 칵테일 바에 가지 않으려고 핑계댄 거야.


…그래.


둘 사이에 짧게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진원이 급히 오느라 차를 두고 온 회사 쪽으로 가도 되겠느냐 물었고 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택시 안에서 진원은 시은의 손을 계속 잡고 있었고 시은도 거부하지 않았다. 둘은 두어 번 가본 적 있는 한정식 전문점에 오랜만에 가기로 했다. 정갈한 편인 음식들을 천천히 즐길 수 있고 작으나마 분리된 공간에 둘만 있을 수 있어서였다.


청첩장 나오면 여기서 형님까지, 넷이서 보려고 했는데.


직원이 죽과 전채들을 차려주고 돌아가자 진원이 나직이 말했다. 시은은 그저 고개를 떨구었다. 설령 결혼을 재개한다 해도 진원의 말대로는 할 수 없게 되었지 않은가.


미안. 자길 탓하는 게 아니고…


괜찮아. 내 탓 맞아.


시은이 내뱉듯 말하고 죽을 입에 떠넣기 시작하자 진원도 조용히 숟가락질을 했다. 입맛을 돋우는 기능에 충실한 작은 죽그릇은 금세 바닥이 드러났다.


내가 요한 씨랑 그래서… 자기 복수심에 그런 거야?


무슨! 아니야.


진원이 손사래를 쳤다.


그랬다고 해도 나야 할 말 없지만… 그 여자… 혹시 예전에 요한 씨한테…?


응. 맞아.


진원이 대답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긴 더 심하게 당했다고, 친구까지는 아니어도 제법 친하게 지낸 여자였는데 그렇게 되고 심지어 아이까지 가져서 그 둘이 결혼한다고… 전에 내게 그런 것 때문에 벌 받나 싶어 사과하고 싶대고 결혼도 축하한다잖아. 마치 개과천선한 것처럼, 안 어울리게 기가 팍 죽은 얼굴을 하고 말이야. 그렇더라도 어쨌든 술은 마시면 안 됐던 거였는데 다 내 잘못이지 뭐. 걔가 원래부터도 육탄공격을…


진원이 얼굴이 벌게져서는 황급히 물을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시은은 그저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근데 걔가 그러니까 오히려 자기가 생각나잖아. 걔랑은… 그래, 솔직히 걔가 덤벼들어서 만나자마자… 그랬었어. 딱히 데이트랄 것도 없이 거의 내 집에만 있었지. 근데도 같이 식사한 적도 드물었고 자고 간 적은 한 번도 없었어. 나도 그땐 한창 공부해야 했던 때라 내심 좋았지. 생각해보면 말만 연애였지 정서적 교감이란 게 전혀 없이 그저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진원이 헛기침을 하며 시은의 눈치를 보았다. 시은의 표정은 덤덤했으나 속은 엉망이었다. 여자가 봐도 눈이 절로 가게 육감적인 몸매의 그녀와 알몸으로 얼크러졌을 진원의 흐트러진 얼굴이 그려져서였다.


어쨌든 걔가 그러니까 갑자기 생각났어. 자기가 나한테 와주었던 그날밤이.


진원이 수줍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다른 밤들도. 하기 전후로 껴안고 키스하고 우리 함께 잠들고 함께 눈 뜬… 얼마 되지도 않는 날들 말이야.


나보다 그 여자랑 더 많이 잤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시은의 앙칼진 말에 진원은 당황했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질투하는 거야? 그러게 왜 그렇게 몸을 사리셨어요오.


진원이 놀리기까지 하자 이번엔 시은이 얼굴이 빨개져서 대꾸할 참에 상차림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진원은 시은을 힐끔거리며 계속 웃었고 시은은 그만 웃어, 여전히 새빨간 얼굴로 복화술하듯 속삭였으나 진원의 웃음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찔끔 나온 눈물을 훔치며 진원은 분노와 슬픔 같은 가슴속 응어리가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시은과 요한이 고향에 갔다 돌아온 그날밤 후, 몇 주만에 처음으로 소리내어 웃었음을 진원은 새삼 알았다. 어머니 앞에서 무릎 꿇고 운 것이 아직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렇게 울게 만든 시은 때문에 또 이렇게 웃게 될 줄은 알지 못했어서 진원은 ‘한 치 앞을 모른다’는 속담을 실감했다.


언제까지 웃을 거야?


미안미안… 이제 다 했어. 자기 너무 귀여워서. 평소 안 그러다 한 번씩 그러니까 귀여워 미치겠잖아.


진원이 예전처럼 햇살같이 웃으며 말하자 시은은 자신이 그런 그의 미소를 무척 사랑했던 것이 기억났다. 남자답게 잘생긴 얼굴이 웃으면 소년같이 싱그럽고, 농구를 즐겨 다소 굳은살이 있는 커다란 손과 넓고 탄탄한 그의 가슴은 늘 따뜻했던 것이 떠올랐다. 전처럼 당당하게 그에게 안길 수 없는 자신을 인식하고 사무치는 그리움을 애써 가라앉혔다.


…자기도, 다른 보통의 남자들처럼 그럴 줄은 몰랐어. 탓하는 것만은 아니야. 우리 일 때문에 자기 마음 어지러웠고 술도 마셨고 예전에 그렇게 뜨겁게 지냈던 여자가 유혹까지 했다는데, 그걸 밀치고 나와 내게 달려와줬으니 오히려 그 여자한테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지.


시은이 담담히 말했다.


난 늘, 몸만 앞서는 게 더 나쁜 짓이라고 생각했어. 상대방을 수단으로 삼는 거니까. 그런데… 내가 그 사람한테 흔들린 건 몸만이 아니었어. 그게 더 가슴 아파. 자기한테 미안하고. 그러니까… 자기도 다시 생각해. 날 정말 용서할 수 있는지, 그리고 다시는 자기 실수… 없을 수 있는지.


용서했다니까. 자긴 물론이고 요한이마저… 당장 볼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그리고 그 실수… 는, 내가 더 끔찍해. 내가 더 싫다고. 이제 생각해보니 그 불쌍해 보이던 표정도 다 연기였잖아. 혼자 술 마시기 싫다고 하던 말에 넘어간 내가 미친놈이지.


진원은 진저리난 표정을 하고 물을 마셨다.


그래도 그 여자가 한 말 중에 동의하는 게 있어. 혹시라도 우리 다시 만나더라도 난, 요한 씨 일로… 약점 잡히고 싶지 않아. 자기가 무슨 일 저질러도 지은 죄가 있으니 참고 살고 싶지 않다고. 자길 사랑해도 결국엔 내겐… 내가 제일 중요하니까.


난 자기가, 아니 우리가 더 중요한데. 나자신보다는.


진원이 달콤하기 그지없는 멘트를 던졌으나 시은은 오히려 짜증이 났다.


…자식 있어도 갈라지는 세상이야. 자기는 뭘 믿고 그래? 이미 이런 일 벌어졌잖아. 결혼하고 나서 일어난 것보다야 낫지만.


그러나 진원은 살포시 웃었다.


자긴 미래를 볼 수 있어?


뭐?


다시 또 매력적인 남자가 나타나 또 흔들릴 수도 있겠지. 아니면 내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 요새 불륜이 그렇게 넘친다던데.


……


그런 유혹을 이겨내는 게 진짜 사랑 아닐까?


…난 이기지 못했고…


무너진 건 아니잖아. 그냥 흔들린 거지. 내가 여자였어도 흔들렸을걸.


대체 자기의 그런 관대함은 어디서 오는 거야? 이른바 알파메일이라서 그런 건가? 실패한 적 없고 사랑받지 못한 적 없고 늘… 중심에 있었고 잘났고?


시은의 자격지심과 시기심이 거칠게 드러났으나 진원은 또 웃었다.


내가 그렇다고 생각해? 뭐 어떻게 보면. 하지만 아냐. 나도 더 잘났으면 할 때 많았는데. 더 가졌으면 할 때도 많아.


…그래, 양 99마리 가진 부자는 마저 100마리를 채우고 싶어한다더라.


시은이 신경질적으로 물을 마셨다. 진원은 그저 미소지으며 그녀를 보고 있었다. 시은이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좋았다. 속으로 혼자 앓고 있는 것보다 훨씬 좋았다. 요한도 진작부터 그랬다면 좋았을 것이다.


자기야말로 너무 욕심 많은 거 아니야? 그래 뭐 나만큼은 아니라고 하자. 그래도 자기도 그만하면 예쁘고 공부도 제법 했고 공무원 시험도 한 번에 붙었고… 무엇보다, 나를, 자기 말대로라면 이 잘난 나를 가졌잖아. 근데도 부족해?


진원은 어느새 예전처럼 밉지 않게, 귀여운 수준으로 잘난 티를 낼 정도로 자신감을 회복했다.


그래, 내가 가진… 가졌던 것 중에 자기가 가장 훌륭해. 근데 자기가 가진 것 중에서도 내가 그래? 연애 초반에, 나 튕긴 거 아니었어. 정말 이해가 안 돼서 그랬던 거야. …그 사람도 그랬어. 솔직히 여자 골라서 갈 수 있지 않겠느냐고. 그래서 나 뒷조사까지 했다고.


응?


…요한 씨 말이야. 자길 아무 여자한테나 줄 수 없어서 날, 아마도 연주의 도움을 받아서 불법사찰을 했다잖아. 날 멀리서 몇 번 본 적도 있었대.


시은은 진원 앞에서 요한을 입에 올리면서도 별다른 감정의 동요가 없어진 자신이 신기했다.

keyword
이전 18화65화. 4부 5장 1화 - 사랑한 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