꿇은 무릎 위에 두 주먹을 올려놓은 채로 고개를 떨군 진원의 넓적다리에 굵은 눈물방울들이 떨어졌다. 끔찍한 악연의 그애가 처음으로 집을 나갔을 때 말고는 부모 앞에서 운 적 없고 무릎을 꿇을 정도로 부모에게 잘못한 적도 무언가를 빌었던 적도 없던 잘난 아들이, 뼈를 갈아마셔도 시원찮을 두 연놈을 위해 그러고 있는 꼴을 보는 그 모친은 속이 썩어들어갔다.
오빠… 그게 정말이야? 한이 오빠가…
하랑 역시 붉어진 눈으로 친오빠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오빠도 바의 사장도 그저 스트레스만 말했었다. 하랑은 그제야 요한이 한여름에 굳이 긴 소매를 입고 있던 이유를 알았다. 유난히 창백했던 그의 낯빛도 이해했다. 얼굴의 맞은 흔적은 진원에게 고백한 결과라며, 앞으로는 그와 만나지도 못할 것 같은 마당인데 다신 남몰래 찾아오지 말라고 하던 요한의 단호한 얼굴을, 그래서 울며 그를 떠나온 것을 하랑은 가슴 아파하며 되새겼다.
그런데도 나는 도저히 너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는 없어. 그렇게 불안정하고 위태한 녀석한테 하나뿐인 여동생을 어떻게.
진원이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그리고 태어나 처음으로 원했다는 여자 역시… 양보 못해. 근데 또 그 자식을, 그 불쌍한 녀석을 놔버릴 수도 없어. 둘 다 서로 자기를 버리라는데, 난 누구도 버릴 수가 없어… 아마 욕심이겠지. 녀석 말대로 나는 위선자일지도 몰라. 하지만 그렇다 해도, 녀석을 좋아하는 것만큼은 진심이야. 그 자식이 그저 평범에 가깝게라도 행복해진다면 모를까, 난 포기 못해.
오빠…
하랑이 진원의 한 손에 두 손을 포개며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녀도 오빠의 마음과 같았다. 살아온 짧은 삶의 반절을 사랑해온 남자를, 아무리 그가 마음을 아프게 해도 그를 아예 안 보고 안 듣고 살 수는 없었다. 더구나 생모의 비극이 너무 가슴 아파 하랑은 단박에 그에게 가고 싶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함께 울어주는 일밖에 없을지라도. 그러나 하랑은 자신에게는 그런 모습도 그런 소식도 전해주고 싶지 않은 요한의 마음 역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요한이 어딨니.
김원장이 소파에서 일어서며 나직이 말했다.
내가… 가서 봐야겠다. 앞장서라. 불편하면 넌… 안 봐도 괜찮다.
제가 알아요. 알 수 있어요. 바 사장님께 물어보면 돼요. 같이 가요, 아빠.
하랑이 눈물을 닦으며 일어나 주방에 가 전화기를 들고 돌아왔다.
이게 무슨! 하랑이 넌 뭐가 어쩌고 어째?
…그애 소식 듣고도 그래요? 사람이 어떻게 그래요.
김원장이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아내를 나무랐다. 그러나 정여사는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그럼 당신 그애 혼쭐을 내는 게 아니라 위로라도 하러 가겠단 거예요? 미쳤어요?
그만 좀 해요!
김원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하잔 대로 다했어요. 그애, 그 불쌍한 모자 돕고 거두어준 게 너무 고맙고 미안해서. 그래서 제대로 사과 않는 당신을 뭐라 하지도 못했어요. 진원이가 내 몫까지 요한일 챙겨줘서, 하랑이도 그러려고 해서, 내가 속으로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알아요? 그런데 그런 일까지 생기고… 더는 안 되겠어.
…걔가 우리 아들한테 한 짓은요?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당신?
당사자가 용서한대잖아. 우리가 결혼해요?
미쳤어미쳤어…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정여사가 도리질을 하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동시에 현기증이 느껴져 그이는 이마에 손을 얹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엄마! 하랑이 모친에게 달려갔다. 아유 어지러… 속 뒤집혀.
김원장은 요한에게 가지 못했다. 그 처의 혈압이 안정되기는커녕 위급한 수준으로 치솟아 끝내 병원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악에 받친 정여사가 마지막 기운 한 방울까지 짜내어 자식이고 남편이고 다 소용없다고, 이대로 죽고 말겠다고 몸부림을 치며 내과의인 남편의 처치를 거부한 탓이었다.
한편 시은부는 아내의 대성통곡이 잦아들길 묵묵히 기다린 끝에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화냥질이라니 그 무슨…
이거 봐봐요. 당신 딸이 이러고 다녔다고!
한여사가 전화기를 남편에게 보였다. 그 순간 시은은 전날밤 연주와의 통화가 생각났다.
- 아직도 안 헤어졌어? 그 오빠 진짜 이상한 남자네.
시은이 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온 연주의 다그침이었다.
…그 사람은, 요한 씨는… 이젠 괜찮아? 어떻게 하고 있어 그 사람.
- 혹시 몰라 감시는 계속하는데, 괜찮은 거 같아. 울 엄마가 오빠 엄마 찾아주기로 했거든. 그거 땜에 기운이 난 거 같아. 그거만 생각하는 거 같아.
고마운 일이구나. 너는… 괜찮아?
- 뭐가.
어쨌든 요한 씨 많이 좋아한 거잖아. 방식은 잘못됐어도, 좋아한 건 맞잖아. 그 어머니도 찾아줄 수 있고, 요한 씨 유학도 시켜줄 수도 있고, 그런 재력 있는 너한테 가면 그 사람도 좋을 텐데.
- 그런 얘기 이제 와서 하면 뭐해. 짱나!
그래, 미안해. 그래도 사장님이랑 네가 있어서 그 사람 걱정은 나 더는 안 하려고.
- 와, 진짜 뻔뻔하구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결혼하겠단 거야? 오빤 죽을 뻔했는데! 난 오빠 생각해서, 오빠가 행복한 게 내가 행복한 거보다 더 중요해서 죽을 거 같이 힘들어도 오빠 포기하고 양보하겠다는데 이럴 거야?
…나는 그 사람한테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너같이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진원 씨처럼 친형제처럼 여길 수도 없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 돈 문젠 걱정 말라니까!
아마 그 사람도 네 어머니 도움 받고 싶어하진 않을 거야… 어머니 찾는 것만으로도 신세지는 건데.
- 아이 참! 뭐가 그렇게 생각이 많고 복잡해? 준다는데 그냥 받음 되지!
미안해.
시은은 진원에게 이별을 고했다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요한이 헛된 꿈을 꿀까 봐, 아니 무엇보다 자신이 그를 거부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였다. 그러나 그것이 실수였던 것이다. 성질 급한 연주가 일을 저지른 게 틀림없었다.
내가 사돈한테 이런 걸 받아야 되겠냐!
모친의 말에 시은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머리채를 잡고 뺨을 치는 정도로는 끝내지 않을 것 같은 그분이, 하필 그분이 봐버렸구나. 진원도 보았을까. 이미 들어 알았던 일이라도 시각적 충격은 감당키 어려울 일이기에 시은은 비관했다. 술에 취해 달려온 이후, 진원은 진심이라며 여러 번 연락해왔고 시은은 갈등하면서도 신중해야 한다고 말리던 참이었다. 그나마 그 덕에 알량한 자존심의 한 조각이나마 지킬 수 있게 된 것에 시은은 웃음마저 나왔다.
뭘 잘했다고 웃어!
한여사가 딸의 등짝을 세게 때렸다. 시은은 휘청이며 모친의 억센 주먹을 견디었다. 자신이 엄마였어도 똑같이 했을 것이었다. 그 부친 역시 이번엔 말리지 못했다.
너 이제 어떡할 거야? 이 결혼 어떡할 거야? 그러잖아도 고리눈을 하고 있었을 텐데 옳다구나 할 거 아니야! 그 여편네도 참 대단타! 무슨 흥신소라도 붙였대냐? 그래도 어쨌거나 네가 똑바로 처신했으면 이런 걸 왜 찍히고 다녀!
한여사가 소리쳤다.
남잔 또 누구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났길래 결혼 앞두고 이런 짓이야! 그것도, 맞지? D시에 내려간 그날, 네가 쫄딱 비 맞고 돌아온 그날이잖아! 옷도 똑같고 설마 이 남자 만나러 갔었던 거냐? 시엄마 만난단 건 핑계였어?!
시은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가만히 있었다.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생각하려 했으나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눈물 역시 나지 않았다.
세상에 어떤 남자가 이런 일 당하고 그냥 결혼한대! 그래서 김서방이… 아니지. 그 정도만 한 게 양반이지. 아니 가만있자, 나한텐 암말 없었지. 혹시… 김서방은, 용서해준 거냐? 응?
…내가 헤어지자고 했어요.
한여사의 실낱 같은 희망을 그 딸은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뭐, 제정신이야? 바짓가랑이 물고 늘어져도 모자란 판에 네가 헤어지자 해?! 아니 헤어지고 이, 이 남자… 이 남자랑 그렇게까지 깊은 사이란 거야? 설마 잤냐?
거 참…
말해. 잤어 안 잤어!
어허, 이 사람이 할 말 안 할 말 못 가리고…
안사장이 아내를 나무라보았으나 한여사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래 이 정도야 뭐, 넘어갈 수도 있지! 김서방도 뭐 사회생활하는 남자고 어디 술집에서라도 뭐 이 정도도 안 했겠어? 더한 짓 했을 수도 있지. 근데 그건 증거도 없잖아. 그니까 빨리 말해. 잤어 안 잤어, 너?
시은은 아무 말도 못했다. 그녀가 아는 진원은 그럴 남자가 아니었으나 사회생활에 술기운에야 백퍼센트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고, 차라리 그랬다면 엄마에겐 좋았겠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스스로가 어이없고 비참했다.
너 김서방 같은 남잘 또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몇 번을 말했어.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천복을, 넝쿨째 굴러들어온 복을 제 발로 걷어차? 야, 왜 대답 안 해? 잤냐고!
시은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그랬다면 진원 씨도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었겠지. 더는 미련두지 않을 수 있었겠지…
뭔 소리야? 여튼 잔 건 아니란 거지!
얼굴에 화색이 돌며 한여사가 벌떡 일어났다.
그럼 어여, 어여 나랑 아버지랑 다같이 가서 빌자. 무릎 꿇고 빌자. 김서방한테도 빌고 그 엄마한테도 빌고 그 아버지한테도, 잘못했다고 그저 단 한 번 실수였다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결혼은 하자.
…그 사람이 진원 씨 친구야, 엄마.
시은의 말에 그 부모가 딸을 내려다보았다.
아기 때부터 친구였고 열 살 때부터 10년 정도 같이 살기까지 한, 그런 형제보다도 더 친한 친구예요…
딸의 고요한 자백에 한여사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너 그럼 딴 남자도 아니고 김서방 친구를, 그 친구랑?
시은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한여사는 딸의 뺨을 쳤다.
이 미친 게! 돌아도 단단히 돌았네! 그럼 빌거나 말거나, 네 시어머니 땜에 안 그래도 눈앞이 캄캄한데 아무리 김서방이라도, 아니 어떤 남자가 이걸 넘어갈 거야?!
…정말이냐?
뭐 좋은 일이라고 그런 걸 거짓말까지 하겠어요, 이 양반은! 정말 어떡할 거야! 어떡할 거냐고! 이제 두 달밖에 안 남았는데 이걸 어떻게 주워담아악!!
한여사가 몸부림치며 악을 썼다.
그만해!
뜻밖에도 안사장은 처에게 언성을 높였다.
뭐요?
이렇게 된 거 뭐 어쩌겠어. 빈다고 들어주겠어?
그가 담담한 얼굴로 소파에 느릿느릿 앉았다.
당신 말대로 우리가 놓치기 아까운 혼사면 그쪽은 손해보는 장산데 가뜩이나 그 콧대 높은 안사돈이, 절대 안 된다고 할 거 아냐.
아니 이 양반이 정말, 불난 집에 부채질요?!
그럼 어째. 가뜩이나 기죽어서 하는 결혼,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래. 애 말라죽는 꼴 보고 싶어? 까짓것 남의 말 사흘이고 이혼보단 파혼이 낫지. 남자도 있다는데 뭐 어때? 다른 남자가 좋아졌으면 그 남자랑 결혼하면 되지.
한여사는 말수 적고 표정의 변화조차 많지 않은 남편이 마치 이런 일을 기다려온 듯 술술 말하는 것에도 너무 놀라서 말대꾸조차 잊어버렸다.
당신 얘를 몰라. 결혼 앞두고도, 신랑감 친군데도 그랬으면 얼마나 좋아하는 거겠어. 그 남잔 홀몸인 건 맞지? …데려와봐라. 어떤 놈인가 보자. 뭔가 있으니 네가 그런 거겠지.
아 있긴 뭐가 있어요? 사내놈이 허여멀건 기생오라비 뺨치게 생겼던데, 그거에 혹했겠지! 무슨 탈랜튼 줄 알았네. …그래 뭐하고 먹고사냐. 대학은 나왔어?
거 사람 참!
아내에게 다시 화를 낸 안사장이 몸을 움직여 바닥에 앉은 딸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가 짐짓 미소까지 지으며 딸에게 말했다.
시은아. 난 네가 좋은 남자면 된다. 다만 한 가지, 시어른이… 널 그저 예뻐해주셨으면 좋겠어. 돈이 중요하지만 마음보다 중요하진 않다.
시은은 더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고, 그 아버지는 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 어머니는 그런 부녀를 기가 막혀 바라볼 따름이었다.